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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비디오 게임도 쉬라고 가르친다
우리에게 안식일이 있어야 하는 이유
by Jared Kennedy
2022-06-29
마인크래프트 팬텀의 공격을 받아본 적 있는가? 비디오 게임 마인크래프트에서 플레이어는 침대로 가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고지대에 기지나 마천루를 건설하는 데만 정신 팔지 말라. 그러니까 게임의 늪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말라는 것이다. 게임에 너무 몰입해서 잠 자는 걸 잊어버리면, 팬텀 몹이 밤에 덤벼들 것이다! 플레이어의 아바타가 잠을 자게 만든 것은 이 게임 디자이너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긴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쉬어야 한다! 하던 걸 멈추고 지친 몸을 쉬게 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능이 멈춰버릴 것이다. 그리고 결국 미쳐버리거나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단지 살려고 쉬는 것만은 아니다. 쉼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계명으로(제4계명)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마인크래프트 디자이너보다 훨씬 더 철두철미하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하루를 안식일로 따로 떼어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매주 일을 멈추고 그의 안식과 그들의 구원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을 기억하라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시는 내용이 출애굽기 20:8-11에 나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렛날에는 멈추셨다. 하나님은 쉴 필요가 없으시다.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렛날 쉬셨다. 우리가 따르도록 본을 보이셔서 멈추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피로를 느끼고 쉼이 필요하도록 설계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예 하루를 따로 떼어 쉬는 날로 정하셨다. 일을 멈추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다. 이를 애들 알버그 칼훈은 이렇게 설명한다. 안식일과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일을 해야만 하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을 보면서 둘이 얼마나 어울릴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하면서 화가 난다면, 당신의 피곤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 동물은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에게는 쉬려고 따로 떼어 놓은 안식일이 없다. 일과 쉼의 차이를 인지하는 건 우리 인간이다. 우리가 둘을 구별한다는 이 사실이 … 우리는 이 둘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멈추고, 당신의 패턴을 본받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시 127:2) 기억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 너희 구원을 기억하라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두 번째 이유가 신명기 5:12-15에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쉬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14절).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때는 종이었기 때문에, 어떤 신분 차이도 없다. 안식일에 이 무리 전체가 일을 멈추고 바로 이러한 사실을 되새겼다. 15절에서 이렇게 규정하듯이 말이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에게 하루를 따로 떼어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나님이 그의 권능과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그 공동체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함께 예배하고 새롭게 되기 위해서 하루를 따로 떼어 놓는다. 교회의 가장 이른 시기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주의 첫째 날에 함께 모였다. 일요일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신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우리의 구원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지만, 예수님이 순종의 삶과 대속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셔서 그의 백성인 우리가 함께 교통하며 기쁨과 갱신을 누리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현실을 온 교회와 더불어 축하한다. 갱신에 이르는 확실한 길당신은 쉼과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마인크래프트 팬텀에게 시달려서 힘들었던 적 있다면, 어떻게 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확실히 알 것이다. 당신의 아바타에게 쉬라고 명령하면 된다. 잠을 자야 한다면 침대를 만들면 된다. 쉴 만한 곳을 찾으면 된다. 가서 자면 된다!쉬지 못하고 프로젝트 마무리를 지어야 하고, 쌓인 메일들을 처리해야 하고, 보이스메일들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한다면, 데드라인과 과로에 지치고 찌들어 있다면, 지금 그런 당신에게도 똑같이 확실한 탈출구가 있다. 멈추고, 쉬고, 기억하라.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그날에는 만나를 찾지 말라(출 16:27-30). 한 주의 일이 끝나면, 컴퓨터를 끄고, 공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더불어 모여라. 하나님의 안식과 당신의 구원을 기억하라. 안식일의 주인께서 당신의 몸과 머리와 마음을 새롭게 하시도록 내려놓으라(막 2:23-28).원제: Even Video Games Teach Us to Res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쉼
안식
안식일
사자에서 그리스도까지, 단편에서 빅 스토리까지
성경을 읽는 깊이
by Kathleen Nielson
2022-06-28
남편과 나는 돈 카슨의 For the Love of God에 있는 성경읽기표로 성경을 묵상한다. For the Love of God는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 유익한 일정표인데, 온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는 일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멋진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 사이트에서 매일 전자우편을 받아보길 추천한다. 이 우편에는 성경묵상 목록과 함께 그날의 본문 넷 중 하나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하는 돈 카슨의 글도 들어 있다. 말씀을 따라가면서 카슨이 던지는 한마디는 하루를 바르게 시작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최근에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을 묵상했다. 전에도 읽은 본문임이 분명한데도 다시 읽으니 내러티브가 낯설게 다가왔다. 이 본문도 카슨이 설명했는데 도전적인 에스겔서의 몇 장을 제시할 뿐, 이 본문에 나와 있는 이상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 유다로부터 북 이스라엘 베델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이상한 사건 말이다. 이 초현실적인 사건은 북 이스라엘 초기에 이곳 베델에서 일어났다. 이 본문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우리는 이 본문이 다양한 단계에서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러티브임을 알게 되었다. 게으른 단계열왕기상 13장을 읽으면서도 사자가 눈에 안 들어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자는 이 길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 보자. 성경 어디에 또 사자와 나오더라? 가령 잠언에서 게으름뱅이는 이렇게 말한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26:13). 그런데 열왕기상 13장의 이야기에는 사자가 실제로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관찰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이런 게으른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된다. 도덕주의 단계열왕기상 13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요구와 순종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어느 지점까지는 말이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간다. 또 하나님이 도중에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명하셨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다. 여로보암 앞에 서 있는 이 선지자를 보면서 우리는 응원을 보낸다. 그가 타락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가서 잠깐 쉬면서 먹고 마시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말려들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이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경각심과 순종을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시험을 통과하고 좋은 일을 한 직후에 따라오기 마련인 취약하고 독선적인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의적으로 또 고집스럽게 불순종한 사람은 여로보암 왕이다. 13장은 여로보암에게 시종 초점을 맞춘다. 여로보암은 백성은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 장소와 절차를 보란 듯이 어긴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제사장들과 제단들을 세웠으며,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극적인 경고 앞에서도 계속 악행을 일삼는다. 편 손이 마르고 제단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낫기만을 바랄 뿐, 예배를 올바로 회복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13장은 여로보함이 지은 죄가 불순종의 죄라고 명시하고 그의 집이 땅에서 끊어지고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끔찍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물론 순종이 이 본문의 도덕적 요지이기는 하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어도 될까? 이렇게 멈추면, 구원의 은총에 이르지 못하고 도덕적 비판에서 그치고 만다.하나님께 집중하는 단계순종은 인간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13장은 우리를 이 수준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다. 이 본문을 맨 처음 읽을 때부터 마치 국에 들어 있는 빨간 고춧가루처럼 곳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눈에 확 늘어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 어구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거기에 하나님의 관점을 주입한다. “주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여러 번 반복된다. 이 본문의 이야기에서 모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난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여로보암에게 전했고 또 극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그 말씀에서부터, 특이하고 분명히 초자연적으로 사자를 통해 이루어진 그 특별한 이야기까지 말이다. 보통의 사자라면 사람을 물어 죽인 다음에 그 주검 옆에, 그것도 옆에 나귀를 놔두고서 그냥 그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벧엘의 기만적인 늙은 선지자도 이 사실을 뒤집어진 방식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 자기도 정반대되는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들 두 선지자의 불순종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는 경솔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맞바꾼다. 다른 하나는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척한다. 안타까운 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제대로 깨닫는 쪽은 가짜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을 어긴 그 하나님의 사람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전에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를 사자에게 내주셔서, 사자가 그를 찢어 죽이게 하신 것이다”(왕상 13:26). 하나님에 집중하여 보면, 이 이야기의 감독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 야야기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주권적으로 지시하신다. 이 거룩하신 감독의 말씀은 최고의 말씀이며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에게 그의 말씀과 뜻을 알려준다는 사실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감독과 자비로우신 계시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내도 될까? 여기서 멈추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밝히 깨닫지 못한다.빅 스토리 단계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삶에 그토록 자비롭게 개입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은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악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계획이 이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계획 역시 보인다. 그러나 매우 미미하게 보인다. 다윗의 집을 섬기겠다고 남은 충성된 무리가 크지 않으니 말이다. 열왕기하 13장의 독특한 서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왕국이 분열된 후라는 더 큰 역사적 서사의 흐름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윗에게 영원한 보좌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다윗 왕국이 갈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윗의 아들들과 신하들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선을 추구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열 지파와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11:37-38) 자기 길로 행했다. 남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은 좀 나을까? 12장을 보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11:36)고 약속하셨다. 13장 도입부에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요시야라는 아들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가 산당의 거짓 예배를 파괴할 것이다(13:2).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집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다.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른 어두운 불순종 가운데서도, 특히 13장의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더 큰 이야기와 연결되어 유일한 희망을 제시하며 그치지 않고 그 빛을 발한다. 심판 때에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주님의 말씀이 그 심판의 말씀에서 그토록 주권적이고 참되다면, 그 희망의 말씀도 참되어야 한다. 다윗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죽이는 사자도 있지만, 심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유다 집안의 사자도 있을 것이다(창 49:10). 이 사자는 열왕기상 13장 첫머리에서 유다로부터 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사람이 유다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우리 구주를 볼 때, 우리의 묵상은 온전한 빛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겹겹이 쌓여 있는 저마다 신기한 이야기들이 모두 그리스도께 가닿는 이 얼마나 풍부한 내러티브인가.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모든 복합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망인가. 펴진 채 말라버린 손,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먹고 마신 빵과 물, 나귀를 지키고 있는 사자, 이 얼마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이야기들인가. 날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원제: Lions and Levels of Narrat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묵상
사자
여로보암
르호보암
우상숭배
순종
현대 신정주의의 불편한 목소리
by Andrew T. Walker
2022-06-27
공공의 장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감을 넘어 심지어 뻔뻔스러운 태도로 승리주의자처럼 행세하는 기독교 비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승리주의 기독교 비전은 문화 전쟁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독교의 패배에 진절머리를 친다. 세속주의의 타락, 변태, 비합리적 규범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이 기독교 비전은 “중립”을 가장한 세속주의가 사실상 이 시대의 실질적인 신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문화적 온전함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이 비전이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대로 제대로 파악하고 삶의 모든 부분에, 심지어 정부에까지 주님의 권위를 굳건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독교 비전이 미국의 사십 세 미만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 재건의 재탄생 또는 기독교 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신정(Theonomy)이다. 기독교 재건 또는 신정?T .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이 1994년에 쓴 에세이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 재건과 신정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기독교 재건은 문화를 기독교의 도덕적 토대에 보다 더 명시적으로 결합시키는, 광범위한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모세 언약 속에 있는 민법적 요소를 현대 시민 정부에 적용하는 것이다. 신정주의자는 따라서 시민 정부가 단지 기독교적 지향점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약 속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구체적인 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한다. 또 재건주의가 광범위한 문화 운동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특정한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드러낸다. 사실상 모든 신정주의자가 암묵적으로는 다 재건주의자이기 때문에, 기독교 재건과 신정에 대한 비판은 신정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주로 1970-80년대 장로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신정 운동은 정치 참여와 홈 스쿨링 같은 주제가 급부상함에 따라 보수적 복음주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엄격한 성경적 정통주의, 정부 권한의 제한, 친밀한 가족 관계,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했다.신정과 관련 있는 여러 인물들 중에는 루사스 존 러쉬두니(Rousas John Rushdoony)와 그레그 반센(Greg Bahnsen)이 있다. 러쉬두니가 쓴 세 권으로 구성된 ‘성경적 법률 강요’(The Institutes of Biblical Law)와 반센이 쓴 ‘기독교 윤리 속 신정’(Theonomy in Christian Ethics)은 이런 신정 운동을 태동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책이다. 데이비드 칠튼(David Chilton)과 게리 노스(Gary North)도 신정 운동의 주요 지지자이다. 신정 운동을 홍보하는 조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늘날 이 운동은 분위기와 참여 방식에 있어서 과거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 단순하게 정의할 때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신정은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가닥과 논쟁이 존재하며 신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각자 다 취하는 입장이 다르다. 물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법이 가장 위대하며 그 외 다른 모든 법은 다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냐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정한 궁극적인 권위에 따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권위의 불가피함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중립의 신화”라는 허울을 쓰고 세속주의를 정부와 법률 속에 포함시킨 것에 대한 신정주의자들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신정주의자들의 다양한 항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 프로그램으로서 신정은 오늘날 민법이 모세 언약에 따른 이스라엘 민사법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신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 표준에 따라”(By This Standard)라는 말은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구성하는 가장 높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버리는 순간 사회가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퇴보할 것이라는 신정주의자의 비판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점이 많이 숨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때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놓기 마련이다. 일반 형평 신정(General Equity Theonomy)은 모든 사람과 기관이 다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는다. 러쉬두니 신정(Rushdoonian Theonomy)은 모든 민사적 법률 시스템이 모세 언약에 기반한 사법 형태를 구체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한다. 종말론에 대한 신정적 이해와 교회와 시민 질서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 말씀의 적용이다. 역사를 전형적인 후-천년왕국 시각으로 보는 경우에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할 주님의 주권을 이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결실이 점차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주님의 왕국은 서서히 임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모든 의의 표준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통치자들은 자연법칙의 원칙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법의 특수성을 현실 속에 적용해야 한다. “완전한 세부사항에까지 이르는 법의 존속 타당성”은 신정에 있어서 필요한 법률 사용을 설명한 반센의 책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제목이다. 그는 ‘기독교 윤리 속 신정’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구약의 민법(확실하게 드러나는 ‘사법적’ 법칙들)은 범죄자의 처벌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를 다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회 정의의 모델이다.”비록 교회와 정부의 관할권은 신정 아래에서도 분리되지만, 그 둘 다 시민의 의(civil righteousness)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고, 이 사실은 구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은 오늘날에도 도덕적 죄 및 사법적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히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이런 적용을 하기 위한 성경해석학은 무엇보다 모세 율법이 가진 지속적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죄와 사법적 범죄에 대한 성경 속 처벌이 오늘날 현대적 맥락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정은 해결책이 아니다이런 신정 운동과 관련해서, 교회의 사명과 시민권과 신성함뿐 아니라 영원한 권위와 영적 권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복음주의적 틀로서 신정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지한 비판이 있다. 요약하면 신정의 오류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이해를 뛰어넘는 해석학에 있다. 이 잘못된 해석학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타락한 정치 질서에서 교회의 역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신정은 승리의 종말론을 전달하기 위한 손쉬운 해석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신정은 종교를 도구화하고 교회와 국가 관계를 흐리게 하며 또한 종교적 반대까지도 위태롭게 만든다. 게다가 다른 언약이 드러낸 일반은총과 자연법칙의 혜택으로 인해 이제 굳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주장이 신정이라는 사실도 이미 증명되었다.적지 않은 보수 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 복잡한 해석적 문제를 분석하는 대신, 해석학으로서 신정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가장 간단한 검증은 그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관계를 오해함으로 잘못된 적용을 도출한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신정은 이스라엘 민법의 배경이 되는 도덕적 힘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신정은 신권으로 통치되던 이스라엘 시대가 끝난 후 이스라엘 민법의 세부 사항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고찰해야 하는 언약적 단절(covenantal discontinuity)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다른 나라와 맺은 관계와 비교할 때 모든 면에서 매우 독특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가진 관계의 독점성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스라엘의 사법 제도는 애초에 다른 나라가 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민법이 현대 시민 정부의 모델이 된다고 믿고 있는 신정은 이스라엘과 십계명 이전부터 있었던 도덕법의 존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은 제6계명이 금지하기 전부터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파괴하는 살인은 태초부터 금지된 것이었다(창 1; 4; 9). 살인 금지는 창세부터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누구이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자연법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영원한 법은 신성한 법으로 표현된다. 십계명은 자연법칙을 드러내는, 시대를 초월한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공식적으로 성문화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신정이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신권으로 다스려지던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기능했고 또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형태와 실행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이스라엘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율법의 도덕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결과 율법 준수의 의무를 단지 특정 시간과 장소에만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으며, 특히 신약성경은 그 중 아홉 개가 그러하다고 확증하고 있다. 더욱이 신정은 오늘날에도 민사 처벌을 적용하려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형벌 체계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신정이 신권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의 고유 시스템을 현대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해석학은 정태적(static)이며, 구속사 전체를 통해 성경이 분명히 일시적이라고 결론을 내린 한 시대의 법을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오류이다. 잘못된 신학적 태도다른 문제는 신학적 자세와 관련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전자가 즉위와 승리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고통과 상실의 신학이다. 신정은 근본적으로 영광의 신학이다.명시적이든 아니든 교회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가의 여부는 문화가 기독교 규범을 얼마나 채택하고 있는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신정은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가장자리로 밀려난 현실에 대해 일시적인 위로를 받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결코 주변으로 밀려난 교회를 향해 외칠 신학이 아니다. 신정은 그럼 지금 중국이나 이란에 있는 교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신정이 하는 주장은 믿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문화에 대한 원한까지 갖도록 만드는, 문화에 대한 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한 극단적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에 불과하다.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문화가 승리와 패배, 양쪽 모두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놓고 오로지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이분법으로만 보게 될 때 결과는 언제나 유토피아 아니면 절망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영광과 십자가를 동시에 포용해야 한다. 이런 패러독스 안에서 사는 것은 당연히 복잡하지만, 이런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교회의 사명을 깨닫게 함으로 보다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한다. 신정이 교회와 국가 사이에 공식적인 통합을 원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교회와 국가는 서로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의도적으로라도 서로의 권위를 강화시켜야 한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또 나쁠 수도 있다. 종교가 정부의 하녀가 되거나 또는 그 반대가 되는 것은 나쁜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을 자유롭게 선포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좋은 결과이다(딤전 2:1-2).유럽의 중세 시대를 엄밀히 신정 시대였다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연합에 대해 한 가지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런 연합이 얼마나 좋지 않은가이다.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갈망하는 그리움에 가까운 짙은 향수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교회와 국가가 한통속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교회와 국가가 연합했을 때 교회의 순수함이나 종교적 반대(religious dissent)가 고양된 사례이다.도덕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통일성의 매력은 종교의 자유가 희생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하한선은 필수적이다. 모든 종교가 법에 따라 동등하게 인정받지 않는 한, 특정한 종교 단체는 반드시 회원 가입과 사회 참여의 기초로 원하는 엄격한 기준을 설정할 것이다.가톨릭 대 개신교이든 아니면 개신교 대 다른 개신교이든, 어떤 한 그룹은 언제나 종교적 기준에 따라 상대방을 배제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개신교인으로서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 국가가 간섭하도록 허용했던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의 태도를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가 연합해서 통치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없었고, 나는 결코 그 당시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신정이 우리 사회의 무법(lawlessness)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신정이 제시하는 대안은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고, 또한 그 대안이 영속적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신학적 일관성이 빠져 있다. 그리고 정말로 신정이 옳아서 역사가 그들의 주장대로 기독교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왜 세상은 지금 정반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서구 문화가 점점 더 이교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점점 더 믿음을 잃어 가는 걸까? 아니면 주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시대를 사용하여 알곡을 가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상호 호환적 관계를 유지함으로 가져다주는 결과는 시민종교의 바탕이 될 뿐 아니라 문화적 결속을 위해서 쓰임받는 구원 신앙의 핵심이다. 신정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그럼 사회에 대한 도덕적 표준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한 존경을 받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모든 사회가 말세를 살고 있으며 또한 머지 않아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도 이러한 수준의 재생성(regeneracy)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하나님 말씀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럼 입법을 하는 데에 있어서 오로지 자율성과 인간의 이성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자연법칙과 영원한 법칙이 담겨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건전한 원리도 찾을 수 있다. 신정을 거부한다고 제대로 만들어진 세속법 속에 얼마든지 신성한 법칙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J. 버드지스제위스키(J. Budziszewski)는 이렇게 썼다. “살인 금지와 같이 자연법칙 속에 포함된 신성한 법의 일부는 정부가 제정한 법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도덕적 불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창조 패턴에 더 잘 부합하고 노아 언약, 자연법칙, 그리고 성경(딤후 3:15-17)에서 강조하는 원칙과 더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최고이다. 모든 사람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선언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직접적인 관할권 밖의 시민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좀 더 현실적인 정치적 성찰을 위한 더 나은 출발점은 모세의 언약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확증하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이 제공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구조와 설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연의 이해와 더불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도덕법이 포함된다(시 19:1-3; 롬 1:32; 2:15).그러나 타락한 이성은 도덕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모호하게 하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심어 놓은 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사회에서 진정한 도덕적 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 언약의 적용이 아니라 창조 속에 담긴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도록 돕는 특별한 계시이다. 계시는 참으로 탁월하지만, 여러 규범이 선포되는 분야와 선포되는 방법에 관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신성한 명령을 드러내길 기대하는 것은 문화적 동질성이 있는 곳에서는 좋게 들리겠지만, 신정은 종교적 소수를 이등 시민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법 표준의 원천으로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 당국이 등장하는 예는 없다.도덕적 반란 속에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국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신약성경이 말하는 국가가 그 국가의 정당성을 특별 계시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불편한 긴장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정부는 특별 계시에 복종하는 지도자와는 별개로 정의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존재이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이 점을 말했고, 그는 또한 그런 주장을 할 때 조금도 모세의 언약에 의존하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교도 통치자들도 얼마든지 정의롭게 통치하는 게 가능하다(비록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완전한 일관성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사는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세상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연법 내에서는 신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왜? 성경 어디에서도 종교적 합의가 확보된 사회에서 정의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 합의가 있다면 좋겠지만, 정의의 표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정의라는 것 자체가 항상 애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타락했고, 지금은 종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에 앞서서, 언약의 특수성 없이도 더 나은 도덕성의 기초를 제공하는 자연법칙을 주신 이유이다. 살인이나 수간과 같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굳이 이스라엘의 민법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계시를 통해 드러난 창조 언약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정은 구약의 형법을 오늘날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를 좀 더 잘 활용한다면, 현대 국가는 무엇보다 정당한 명령과 신중하고 현명한 형사적 제재를 통해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금지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형하지 않고 수감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과 같은 약속을 통해, 굳이 이스라엘과 똑같은 형태를 갖추지 않더라도 사회에 꼭 필요한 도덕 체계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노아 언약에 대한 데이비드 벤드루넨(David VanDrunen)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창 8:22) 창조세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모호하더라도 자연법칙과 일반 은총을 통해 이 땅을 운영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이 비록 우리에게 문화적 지배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의 목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불일치, 고통, 문화적 갈등은 종교적 제약을 벗어난 국가들로 인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종교적 합의를 공유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의 정당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가 기독교 이상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정부가 그러한 약속을 반영하는 것은 좋지만,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정부의 정통성을 기독교의 인정 여부와 연결하지 않는다.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라성경적 충분함을 지키겠다는 선의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신정은 성경이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그 개념을 확장했다. 신정은 구속 드라마가 아닌 결의론에(역자 주: 보편적인 규범을 정확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특정 경우에까지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명확하게 결정하려는 기술) 더 집중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신정주의자라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전체가 갑자기 또 다른 대부흥을 체험하고 기독교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면, 그건 어떻게 이해할 건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신정적 의제를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교단의 고백을 인용하자면 대답은 이것이다. “자유로운 사회 속 자유로운 교회가 기독교적 이상이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어떤 시민 권력의 방해가 없이 진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우리는 정치적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가치를 능가할 수만 있다면 사탄은 기꺼이 시민종교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도덕적 국가까지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넘치는 국가를 보기 원한다. 거기에는 공무원도 포함한다. 그러나 단지 정부가 우리 사명의 대상이 아니다. 변화된 정부는 모세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법칙을 고수하는 변화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미국 문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깨어지고 비뚤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에 대해 도덕적으로 반항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정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신정은 미국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로 향하는 게 단순히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신 22:8). 우리는 구속받을 문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타락한 문화를 향해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구속받은 개인을 찾고 있다. 신정의 아이러니는 이론적으로 볼 때 그 주창자들이 엄격한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장려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은 국가 지원의 보조금에 의존한다. 신정은 또한 국가에 의존한 복지 지원을 실행한다. 국가의 허락이 없이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신학적 시스템은 결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구조와 사명과 일치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신정이 얼마든지 자유시장 경제학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통계주의 신학에 그칠 뿐이다. 성경과 문화에 대한 신정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게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 및 충분성에 대한 경외심을 덜 갖는다는 의미일까? 결코 아니다. 논쟁의 핵심은 무신앙(unbelief)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재의 구속-역사적 시대에 신정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모든 위조품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이며 참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런 성경 자체가 거부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문화 변증이라는 임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원제: American Culture Is Broken. Is Theonomy the Answ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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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능력
문화변증
시민종교
정교분리
하나님의 여백
우리의 잘못에도 하나님은 넉넉하시다
by Chad Ashby
2022-06-26
내가 옳지 않은 일을 하려고 들거나 문제가 있는 대학에 간다면? 그러면 안 될 때인데도 이사를 간다면? 문제가 있는 교회에 등록하거나 나쁜 사람과 결혼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세워 두신 계획을 내가 뜻하지 않게 바꾸게 되면 어떡하지?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이 마치 외줄타기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떨어져버릴 것 같은 위험에 늘 처해 있다고 느낀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잘못된 데로 곤두박질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더 나쁘게는 우리가 선택해서 연 문 뒤에 하나님이 숨겨두신 심각한 결과가 있을 거라는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우리가 내린 잘못된 선택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을 내릴 거라고 두려워한다.이런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유한한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청사진을 전부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정확하게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특별한 책을 들춰 보고 싶어 한다(시 139:16).요컨대 우리는 전지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린 전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한한 지성과 우리 미래에 대한 제한된 지식을 주신 것은 사실 좋은 소식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외줄타기가 아니다. 인생은 매우 넓고, 넉넉한(forgiving) 길이다. 우리 잘못에도 넉넉하신 하나님의 여백현대 영어에서 우리는 딸꾹질, 실책, 실수를 봐줄 때 넉넉하다고 말한다. 엉덩이가 배기지 않게 해주는 자전거 안장을 두고도 넉넉하다고 말한다. 신체 결함을 가려주는 검정색도 우리는 넉넉한 색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도 어떤 의미에서는 넉넉하다. 시편의 시인이 이렇게 기도했듯이 말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을 넓게 하여 주셨고, 발을 잘못 디디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시 18:36, NIV의 역자 사역).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겠습니다”(시 119:32). 주님은 우리를 외줄 위에 올려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넓게 하여 주셨다.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우리 발목이 접질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넉넉한 길을 주셨다.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넉넉한 자비로우심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갈 5: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눈길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지혜로 살아간다. 우리가 길을 벗어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우리의 죄도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 놓지 못한다. 우리의 나쁜 결정도 하나님이 정해 두신 우리의 목적지를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넉넉하심(forgiveness)으로 우리의 길을 언제나 지켜주신다.그렇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는다(사 53:6). 양은 조심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헤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죄를 짓거나 이기적인 욕심을 좇아도 되는 면허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양 무리인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따라 넓은 데로 다녀야 한다(요 10:27).성경 + 공동체 = 지혜로운 선택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이 사실은 성경을 읽지 않고 교회에 열심이지 않는 바로 그 사람인 경우가 태반이다.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말씀 안에 있는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 이들은 목자이신 주님의 양 무리에서 벗어나 외톨이로 지낸다(잠 18:1).목자이신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성경을 읽으면서 당신이 준비해 두신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매일의 결정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돕는다.어린 양들이여, 겁낼 것 없다. 그리스도의 전능한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있는 그런 결정을 우리가 내릴 일은 없다(요 10:27-29).원제: Can I Mess Up God’s Plan for My 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도의견인
용서
근심
불안
성경
하강과 상승, 비움과 채움
케노시스의 신비
by 최병락
2022-06-25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이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위아래가 없다. 세 분은 완전히 동등하시고 본질상 하나이시며 창세전부터 존재하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인간 세상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기독교 변증가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 인생에서 이 사건을 ‘위대한 하강’(Great Descent)이라 표현했다. 기독교는 ‘위대한 상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대한 하강’의 이야기다. 얼마나 높아졌느냐의 성공 이야기가 세상의 이야기라면, 기독교는 얼마나 낮아졌느냐의 겸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묻는다면, 그는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어디까지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느냐”를 물을 때, 비로소 그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비울 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으로, 죄인으로,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인 십자가와 무덤 속으로까지 낮아지실 수 있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중요한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비워…”(빌 2:7).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예수님의 이러한 비움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 부른다. 이는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3-4세기경 기독교는 기독론을 두고 뜨겁게 논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가 아닌가를 놓고 치열하게 갑론을박했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인가, 유사 본질인가를 놓고 뜨겁게 논쟁했다. 이때 논쟁을 불식시킨 성경 구절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이다. 이로써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정통 기독론이 명확히 정립되고 삼위일체론이 완성된 것이다.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곧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인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할 책임을 지고 보내‘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비워 자원하여 기쁨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영역본 성경 NIV는 자기를 비운다는 말을 “Made himself nothing”로 옮겼다. 말하자면, ‘자기를 없는 존재처럼 여긴다’는 의미를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자기를 감추시고 낮추시고 비우셨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성부 하나님을 높이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를 때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비우시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시는 삶을 사셨다. 사람들에게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자기를 낮추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마음이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품으라고 촉구한다.나를 통해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철저히 비워 오직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만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이다. 나도 보이고 하나님도 보여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나는 확실히 죽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삼위 하나님 중 그 누구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오직 서로를 드러내실 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높여 주신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잠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삼위일체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삼위일체를 제대로 아는 교회는 절대로 갈등이 생길 수 없다”고 했다.어느 공동체든지 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금방 깨지고 만다. 이는 자기를 비우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이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원하는 직분이나 인정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조용히 이동만 하면 그나마 덜 불행이지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유야 수백 가지겠지만 근원은 자기를 비우지 못한 결과이다. 내가 살아 있기에 나를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하고, 무시를 당한 것 같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걷어내고 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본받고 배워야 한다. 비움에는 자력의 비움과 타력의 비움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력의 비움이다. 이는 마음을 겸손히 하여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는 죽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타력의 비움은 그 사람의 욕심과 자존심과 자아가 모두 비워질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거나, 급할 때는 강제로 비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우리가 비우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비워야 채우기 때문이다. 극한 가뭄에 피폐해진 시돈 땅에서 아들과 살고 있는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먹고 죽으려 했다. 그런 모자 앞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엘리야는 이제 곧 목숨과 맞바꿀 그 얼마 남지 않은 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 통에 남은 가루와 병에 남은 기름을 비운다. 이것이 케노시스, 비움이다. 그리고 가루와 기름을 비우고 났더니 그때부터 그 병에 기름이, 그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는 채움이 시작되었다(왕상 17:8-16). 케노시스는 케노시스로 끝나지 않는다. 채워지는 기적이 시작된다. 그래서 케노시스는 곧 케노시스의 신비이다.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어 빈 배와 빈 그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고, 베드로는 그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빈 배는 만선으로 바뀌었다. 놀라운 채움이다. 예수님은 빈 배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요 21:1-14). 완전히 비기 전까지는 베드로에게 아무리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해도, 자기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완전히 빈 배가 되고 나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배와 마음이 철저하게 케노시스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께 순종하게 되었다.사르밧 과부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했는가? 베드로처럼 평생 모아서 사 놓은 배 한 척이 빈 배가 되고, 그물은 찢어져 기능을 상실했는가? 화려한 인생의 시간이 지나고, 명성과 평판을 잃고, 축제의 포도주 통이 텅 비어 버렸는가?비움 앞에서 사르밧 과부와 베드로는 공통의 경험을 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만났다. 비어버린 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전에 예수님으로 채워야 한다. 그 비움에서 채움이 시작된다. 케노시스는 그래서 플레로마, 곧 충만의 시작이다.낮아짐으로 예수님의 위대한 하강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자 그 다음에 위대한 상승이 일어난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다가 땅 위에 오시고, 땅 아래로 내려가셔서 장사되신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려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위대한 자기 비움으로 하강하신 것이다. 땅 위로 오시지 않으면 땅 위의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땅 아래로 내려가시지 않으면 사망 권세에 놓인 자들을 해방할 수 없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비굴한 것도 초라한 것도 실패도 아니다. 낮아지는 동안 그 경험으로 인해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편집자 주_이 글은 최병락,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두란노)의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케노시스
성육신
기독론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by Garrett Kell
2022-06-24
“어떻게 다른 사람을, 특히 목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최근 디모데후서 2장을 함께 공부하다가 마음이 여린 한 자매가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가 거짓 교사들의 위험과 부겔로와 허모게네[딤후 1:15], 데마[딤후 4:10] 같은 지도자의 배교를 토론하던 참이었다. 자매의 표정이 몹시 난감해 보였다. 최근에 남침례교단(SBC) 내부의 학대·부패·은폐 진상 보고서가 공개된 터라, 자매의 질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들 공감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양 떼를 보살펴야 할 목사들이 오히려 양 떼를 해치는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끔찍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설사 그러한 위선자들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상처를 입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교회에 거는 우리의 신뢰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아홉 가지 경고 신호우리는 지도자 전부를 의심하는 태도를 갖는 대신에 분별력을 기르고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벧전 5:8; 요일 4:1).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목회자라고 모두 학대를 일삼는 늑대는 아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부(副)목자들(undershepherds)도 역시 자신의 잘못과 약점 때문에 고뇌하고 씨름하는 양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목회자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정도라면, 그때는 심각한 우려와 엄정한 조치가 따라야 한다. 1. 고립되어 있다목자를 양 떼가 알 수 있어야 한다. 강단에 서는 것은 목사의 책임 중 작은 일부일 뿐이다. 교인들이 목사의 삶이 어떠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면, 교인들은 목사의 삶을 파악할 수 없고, 또 목사의 믿음도 본받을 수 없다(히 13:7).위험한 목사는 지켜보는 눈을 피하려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죄는 그런 고립 속에서 몸집을 키운다. 목사의 삶은 지켜보는 눈에 열려 있어야 한다.분명히 말하건대, 목사도 하나님과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인이 목사와 친밀하고 개인적인 우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경건하고 성숙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 함은 분명하며, 목사는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목사는 매우 의심스럽다.2. 무책임하다믿을 수 있는 목사는 책임을 강조한다. 경건한 복음사역의 파트너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목사는 모든 종류의 악에 취약하다.혼자서 이끄는 목회자는 강압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능하면 자질을 갖춘 복수의 장로들로 이루어진 회를 조직해야 한다. 함께하는 동료가 적어도 괜찮을 때나 상황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요점은 반드시 다수여야 한다는 것보다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느냐에 관한 것이다. 함께하는 동역자 없이 혼자서라도 목자는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목사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이유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이와 같은 책임 구조를 내장하도록 교회를 설계하셨다. 그래서 함께 책임을 지는 구조에 있는 동료 목사들이나 친구들은 “예스 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비판을 꺼려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은 담임 목사를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만드는(딤전 3:1-7) 용감한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목사인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그들의 무언의 행동이 성경적 사랑에서 편향된 충성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3. 방어적이다위의 논의를 이어가자면, 경건한 목사들은 교인들이 피드백을 하고, 함께 걱정하고, 목사가 충실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도록 장려할 것이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방어하려 드는 목사를 경계하라. 비판이 대역죄 취급하는 교회는 목사에게도, 목사의 보살핌을 받는 교인들에게도 영적으로 안전한 환경이 못 된다.예를 들어, 이건 내가 확신하는 것인데, 목사의 강단 사역을 점검하는 어떤 공식 장치가 있는 교회라면, 그 목사는 이를 통해 겸손한 자세를 견고히 유지할 수 있고 또한 방어적인 자세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직원 모임이나 장로 모임, 아니면 별도로 정한 “예배 리뷰” 시간을 통해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 환경이 어떠하든 핑계대지 말고, 반드시 목사는 바로잡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날마다 성장하도록 힘써야 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4. 권리를 주장한다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목사가 있다. 이런 목사는 특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나는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가 그들을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목사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던 한 교회를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목사는 그동안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양을 이용하고 욕망을 채우는 은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교인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도, 그리고 악한 영향력도 크게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목사는 권리를 주장할 게 아니라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원해야 한다. 목사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고 있는 바로 그 교인들에게 자신이 잘못되거나 잘못했을 때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또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내가 주님께 불충하는 데도 나를 쫓아내지 않을 그런 교회라면 나는 절대로 목회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우리 교회 앞에서 종종 이야기한다.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에게 감명 받지 않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필요하다고. 이것은 목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5. 욕심이 많다예수님을 닮아가는 목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넉넉히 베푼다. 감사하지 못하는 목사의 특징은 욕심이다. 이 욕심은 돈, 힘, 관심, 또는 인정을 획득하려는 욕구로 나타날 수 있다.탐욕스러운 목사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탐욕 중에서 성적 학대는 특히나 끔찍한 것이다. 학대하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만족에 신경을 쓴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가 충족된다면 누가 다치든 상관하지 않는 거머리 같은 족속이다(잠 30:15). 최근에 공개된 SBC 목회자 학대 보고서는 섹스와 권력에 굶주려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그 겉모습을 내보이려는(딤후 3:5) 남자들의 썩은 열매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이런 것이 탐욕의 죄다. 6. 통제한다 한번은 어떤 목사가 “내가 책임자니까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 교인들은 “아멘!”이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목사는 성경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자기 뜻에 복종하게 한다.통제하려 드는 사람이 모두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감언이설로 취약한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이런 포식자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체하지만, 그가 늘어놓는 미사여구에는 속셈이 따로 있다. 이것은 자기가 보살피고 있는 사람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전술이다.물론 우리는 이것을 어려운 시기에 필요한 용기 있는 리더십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할 때마다 경고 신호를 울린다면, 그것은 합당한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리더십이 부드러움과 겸손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7. 냉담하다목사가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부도덕한 일을 농담거리쯤으로 얘기하고 있는가? 어떤 죄에 집착하고, 다른 죄들은 가볍게 여기는가? 전 세계의 아젠다가 되어 있는 학대 사건들을 부정하는가?여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여성들은 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식으로, 남성우월주의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안에 있는 자매들, 특히 강한 자매들을 얕보는가?과부, 고아, 소수자, 외국인 같은 취약계층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또 어떤 식으로 관심을 보이는가?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또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말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온유하고 온화하게 대하는가(딤후 2:24-26), 아니면 얕잡아 보고 거칠게 대하는가?공감능력과 친절의 결여는 눈에 띄는 경고 신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항목들 중 어느 것을 올바로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실족한다. 그러나 성령이 빚어주시는 확신이나 경건한 책망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는 명백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8. 패거리 짓는다SBC 학대 보고서에서 가장 기괴한 면의 하나는 힘 있는 사람들이―희생자들을 비난하고―자기네끼리 서로 보호했다는 사실이다. 시종일관 그들은 복음의 사역을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네 부족(tribe)을 진리의 유일한 수호자로 여기는 목사들은 그들의 담장 너머에서 제기되는 반드시 필요한 교정 요구를 묵살한다. 그들의 부족을 진리의 수호자로 보는 목사들은 그들의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교정조치에 저항할 것이다. 통계와 재무 보고서를 성공의 증거로 들이대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외부 기관에 학대 사실을 보고하는 걸 선교에 위협이 된다며 거부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선교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자기가 속한 부족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서 유쾌한 친교를 나누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부족을 맹목적으로 변호한다면, 이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9. 균형 잡히지 않은 복음성화를 요구하지 않는 칭의 메시지는 불완전하다(갈 1:4; 히 12:14). 목회자가 전도나 칭의에만 치중하고 경건의 추구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면,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라고(롬 12:9), 죄에서 벗어나라고(딤후 2:22),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고(마 5:8) 명하신다. 교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촉구하지 않는 걸 피하는 목사―또는 단순히 외적인 ‘거룩함’(예를 들어, 술 마시면 안 된다, 춤추면 안 된다, 요가바지 입으면 안 된다)에 안주하는 목사―는 편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실상은, 숨겨 놓은 죄에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회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라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목사는 위험하다. 그런 목사는 심각한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목사는 도움과 치유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도구 중 하나이다.다시 말하건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품을 불완전하게 발하는 충성된 부목자들을 통하여서도 그의 양 떼를 돌보신다(고전 11:1). 충성된 목자들이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처럼 그들은 폭력이 아니라 온유함을 뿜어낸다(벧전 5:3). 예수님처럼 그들은 분노가 아니라 인내심을 보여준다(딛 1:7). 예수님처럼 그들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의 본이 된다(벧전 5:5-6). 예수님처럼 그들은 탐욕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온몸으로 실천한다(딤전 3:3).충성된 목사 찾기는 꼭 해야 할 일이다. 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신뢰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과 맹목적 믿음은 전혀 다르다. 신뢰는 획득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하기 전에 먼저 목사를 알아보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목사를 따르라(고전 11:1; 살전 2:10).물론, 예수님을 신뢰하고 분별력을 발휘하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여전히 목사에게 상처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라면, 당신을 학대하는 목사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충성된 목사의 돌봄을 받으며 신뢰를 회복하도록 도우실 것이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결코 거짓말 하지 않으시는, 결코 착취하지 않으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언제나 성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그리고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시는―하나님께서는 남은 무리와, 곧 자신의 욕망에도, 세상의 우상에도 무릎 꿇지 않은 많은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심을(왕상 19:18)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그분께 맡김으로써 그분을 신뢰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남은 자들을 신뢰함으로써 그분께 맡기는 우리의 신뢰를 여실히 보여준다.집으로 가는 양떼의 여정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걸음을 주께서 돌보신다.원제: When to Distrust Your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연관 주제 함께 읽기 ▶ 이리 식별법 ▶ 이리를 조심하라: 거짓 교사의 세 가지 징후▶ 거짓 선생에 관한 놀라운 진실
목사
거짓교사
목사의직분
분별력
목자
우리의 신음이 최고의 기도가 될 때
by Donnie Berry
2022-06-23
또 그러고 말았다. 십대인 아들과 대화하다가 또 격해졌다. 아들은 화를 냈고 무례했다. “녀석이 이성마저 상실했군.” 나는 이렇게 판단했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번에는 기필코 냉정을 유지하겠다고―부드럽게 반응하고, 상한 감정과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겠다고―다짐했지만, 또 실패했다. 둘이서 내뱉은 말을 몇 번이고 복기해 보았다. 아들은 자러 제 방에 들어갔고,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과의 관계는 또 그렇게 틀어져 버렸다. 소파에 앉은 채 나는 사랑의 방식을 번번이 훼방 놓는 나의 태도를 자책했다. 그렇게 앉아서 나는 속량(redemption)을, 온전함(wholeness)을 간구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신음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 앞에서 말없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확신컨대,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그 신음은 나의 최고의 기도가 되었다. 늘어나는 신음나이가 들수록 내 신음도 늘어난다. 그저 아픈 무릎과 등 때문에 나오는 시름이 아니다. 나이드니 이런 신음도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내면의 신음이다. 나의 완고한 기질을 마주할 때,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가 죄를 지을 때 올라오는 신음이다. 누군가에게 수치심과 고통과 내침을 당한 아이들을 볼 때 터져 나오는 말 없는 신음이다. 배신이나 비극, 충격적인 진단 앞에서 아파하는 신음이다.근래에 신음소리가 더 깊어진 걸 느낀다.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바울은 부활의 이편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신음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 8:23). 신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상의 한 부분이다. 신음은 또 선물이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지를 본다. 신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온전히 누리는 영광의 몫을 깨닫는 수단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영광을 갈구하는 신음우리는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본성이다. 그리고 이 영광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 사람들에게 드러나며, 또한 그 사람들을 통하여 드러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도록, 곧 하나님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나누도록 지음 받았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과 맞바꾸어 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만(1:23; 3:23),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나누게 될 것이라는 확실하고 분명한 소망이 있다(5:2). 로마서 8:17-30에서,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속량의 충만함을 표시하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8:17). 영광이 우리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1:18).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들어갈 것이다(1:21).바울은 세 가지 신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누리게 될 미래의 영광을 설명한다(1:22): 피조물의 신음(22절),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음(23절), 그리고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신다(26절). 이 모든 탄식이 우리를 30절의 바울의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바라보는 신음―피조물의 신음, 성령의 신음, 그리고 우리의 신음―은 영광을 위한 신음이다. 우리가 죄와 망가짐을 마주할 때, 우리는 신음한다. 우리가 육신의 병과 약함과 죽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신음한다. 관계가 틀어지거나 깨질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신음한다. 우리는 고통이 끝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온전해지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함께 나누고,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빛나게 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 어떻게 그 영광에 이를 것인가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음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되는 것일까? 바울은 성령이라고 답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8:26).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내내 설명하고 있는 그 씨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양자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부패에 굴복하고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영향 아래 있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구속 받은,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구원의 충만함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이다.이러한 약함이 우리가 신음하는 이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현재의 약함과 고뇌에서 벗어나 우리의 영광의 상속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아신다. 첫 열매―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보증―이신 성령께서는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신다(26절). 우리의 고통을 통해 어떻게 선한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성령께서는 아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과 목적에 따라 간구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일하신다. 모든 것이 영광으로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지 설명하고 나서 바로 바울은 우리에게 로마서 8:28의 놀라운 약속을 들려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성령의 간구는 적극적이고 적절하다. 그는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심지어 우리의 상처, 낙심, 좌절, 그리고 실패조차도―취하신다. 그의 손에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29절)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생명과 기쁨을 누리도록 시련을 사용하신다(30절).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신음도 커진다. 그러나 그러한 신음과 함께 소망도 자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와 나누시겠다고 결심하신 그 소망이다. 성령께서 그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려고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 소망이다. 성령께서 영광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 신음소리 하나하나를 확실하고 분명한 간구로, 우리의 최고의 기도로 바꾸신다. 원제: When Groaning Is Our Best Pray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로마서8장
피조물의신음
성령의간구
하나님의영광
하나님자녀의영광
기독교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by C. S. 루이스
2022-06-22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연재를 시작하며이 글은 아타나시우스의 말씀의 성육신의 관하여의 영역판에 부친 C. S. 루이스의 서문을 출판사 죠이북스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소제목은 편집자가 임의로 단 것임). 기독교 고전 읽기를 독려하는 C. S. 루이스의 이 글과 함께 앞으로 수회에 걸쳐 매주 주요 기독교 고전을 한 권씩 소개할 예정입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앞으로 소개할 기독교 고전• 요한 칼뱅_기독교강요• 아우구스티누스_고백록• 조나단 에드워즈_신앙감정론• C. 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J. C. 라일_거룩• 존 오웬_죄 죽이기• 존 밀턴_실낙원• 아타나시우스_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J. I. 패커_하나님을 아는 지식• 리처드 십스_상한 갈대 (글 싣는 순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어떤 주제를 다루든 옛날 책은 전문가들만 읽어야 하고 아마추어들은 최신 서적들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상한 개념이 널리 퍼져 있다. 영문학 교수로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어떤 평범한 학생이 플라톤주의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싶을 경우 도서관 서가에서 플라톤의 향연(Symposium) 역본을 찾아 읽어 볼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오히려 그보다 열 배는 더 두꺼운 요즘 책을 읽으려 한다. 온통 “주의”(ism)가 어떻고 그 영향력은 어떻다는 말만 할 뿐 플라톤이 실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겨우 열두 페이지에 한 번 정도 나오는 지루한 책을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오류는 겸손에서 비롯되는 오류이기 때문에 다소 귀엽다고 할 만하다. 이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다.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그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현대 주석가들의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이 학생이 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학생도 플라톤의 말을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플라톤주의를 다루는 요즘 책들 중에는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가 지금까지 힘써 온 일 한 가지는, 직접적 지식은 간접적 지식에 비해 더 애써서 획득할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개 더 쉽고 더 기분 좋게 습득할 수도 있다고 젊은이들을 설득하는 것이다.근래 나온 책들을 더 좋아하고, 옛날 책은 선뜻 집어 들지 못하는 이 잘못된 태도가 가장 만연한 곳은 다름 아닌 신학 영역이다. 목회자나 신학생이 아닌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소규모 공부 모임에서는 누가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혹은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나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 더럼의 주교)가 아니라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Aleksandrovich Berdyaev, 1874-1948,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작가),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1882-1973, 프랑스의 아퀴나스파 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1893-1957), 심지어 필자 같은 사람들의 책을 공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내가 보기에 이는 본말이 바뀌었다. 물론 나 자신도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일반 독자가 현대 서적을 전혀 읽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과 옛날 책 중 한 가지만 읽어야 한다면, 나는 옛날 책을 읽으라고 독자에게 권할 것이다. 내가 독자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는, 그 독자가 아마추어이고 따라서 최신 책들만 읽는 데 따르는 위험에서 보호받을 가능성이 전문가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최신 서적은 아직 검증이 안 된 상태이고, 아마추어는 그 책이 읽어도 될 만한 책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긴 세월에 걸쳐 확립된 기독교 사상의 대계(大系)를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책 속에 감춰진 모든 함축적 의미(그런 의미가 있는지 대개 저자 자신도 생각해 보지 않은)가 밝혀져야 한다. 현대 서적은 다수의 다른 최신 책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여덟 시에 시작된 대화에 열한 시쯤 끼어들면 대개 대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중간에 끼어든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던진 몇 마디 말이 폭소를 낳기도 하고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물론 좌중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끼어들기 전에 나눈 대화가 그 사람의 그 말 몇 마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신 서적 속의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문장들이 사실은 다른 어떤 책을 겨냥한 말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았다면 격분해서 거부했을 말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유일한 안전장치는 당대의 논쟁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게 해주는 명백하고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표준(리차드 백스터는 이를 가리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고 했다)을 아는 것이다. 그런 표준은 오직 오래된 책들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바람직한 규칙이라면, 최신 서적을 읽고 나서는 옛날 책을 한 권 읽고, 그런 다음에야 최신 서적을 또 한 권 읽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버겁다면, 최신 서적을 세 권 읽을 때 오래된 책을 적어도 한 권은 읽어야 한다.각 시대마다 나름의 관점이 있다. 이 관점은 어떤 진리를 특히 잘 파악하기도 하고 어떤 오류를 특히 잘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 오류를 바로잡아 줄 책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책은 곧 오래된 책들을 뜻한다. 당대의 저자들은 당대의 관점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필자처럼 그 관점에 심히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벌어진 논쟁들을 읽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논쟁을 벌이는 양측 모두 지금의 우리라면 절대적으로 부인할 내용들을 상당 부분 아무 이의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양측은 자신들이 더할 수 없이 상반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들은 상당히 많은 공통의 가설로써 은밀히 내내 결속되어 있었다. 이 가설로써 이들은 자기들끼리는 연합했고, 전후(前後) 시대의 이론들과는 맞서 싸웠다. 최신 서적들만으로는 당대의 맹점을 바로 잡을 수 없다 20세기의 특징적 맹점(후대 사람들은 이 맹점에 관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요?”)은 우리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지점에 있으며, 이 맹점과 관련해서는 히틀러와 루즈벨트 대통령 간에도, H. G. 웰스와 칼 바르트 사이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의견이 일치된다. 누구도 이 맹점을 완전히 피해 갈 수 없으며, 최신 서적만 읽을 경우 이 맹점이 강화될 것이 확실하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약화될 것이다. 최신 서적이 맞는 말을 할 경우, 이는 우리가 이미 반쯤은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틀린 말을 할 경우, 이는 이미 위험할 정도로 잘못되어 있는 우리의 오류를 심화시킬 것이다. 이를 완화할 유일한 대책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수세기의 깨끗한 해풍(風)이 계속 불어오게 하는 것뿐이며, 이는 오래된 책들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물론 과거에 어떤 마법 같은 게 있지는 않다. 옛날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에 비해 더 똑똑하지도 않았다. 옛 사람들도 우리처럼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실수는 아니었다. 우리도 이미 오류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우리가 옛 사람들보다 낫다고 우쭐할 일도 없고, 옛 사람들의 오류는 이제 다 드러나서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하나보다 둘이 낫다고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무오(無)하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한 방향으로 잘못 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확신컨대, 미래에 나올 책들이 과거에 나온 책들만큼 탁월하게 우리의 오류를 바로잡아 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래에 나올 책들은 우리 손에 넣을 수 없다.내 경우, 영문학을 연구하다가 거의 우연에 가깝게 기독교 고전을 읽게 되었다. 리차드 후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토마스 트러헌(Thomas Traherne, 1637-1674),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Taylor, 1645-1729),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들 자체가 위대한 영문학 작가들이기 때문이고, 보이티우스(Boethius, 480-525),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단테 (Dante, 1265-1321)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들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맥도널드 (George Macdonald, 1824-1905)는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알게 된 작가로, 그의 기독교 신앙을 무시하려고 오랜 세월 애쓰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내 충성심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알다시피, 이들은 교파도 다르고 환경과 시대도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 분열상은 이 작가 몇몇이 자신의 글로 아주 격렬히 표현했다. ‘기독교’는 아주 많은 의미를 지닌 단어여서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현대 서적만 읽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한 세기에서 한 걸음 벗어 나옴으로써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든 의심을 초월해서 깨달을 수 있다. 수 세대의 세월을 배경으로 판단해 볼 때 순전한 기독교는 교파를 초월한 무미건조하고 명백한 명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기모순이 없고 다함없는 어떤 것임이 드러난다. 다양한 고전들 속에서 기독교의 놀라운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다이는 내가 겪어 봐서 아는 사실이다. 아직 기독교를 싫어하던 시절, 나는 마치 너무도 익숙한 냄새처럼 거의 불변하는 어떤 것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는데, 그것을 이제 청교도 버니언의 작품에서, 국교도 후커의 작품에서,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파인 단테의 작품에서 만났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ois de Sales, 1567-1622)의 글에도 (달콤하고 꽃 같은 형태로 존재했고,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 1593-1683)의 작품에도(장중하고 꾸밈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파스칼과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작품에도 (냉혹하지만 단호한 형태로) 존재했고, 시인 헨리 본(Henry Vaughan, 1622-1695)과 야콥 뵈메(Jakob Bohme, 1575-1624, 독일의 신지학 작가)와 트러헌의 작품에도 온화하고 놀랍고 낙원의 향취를 지닌 형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18세기의 도회적이고 냉철한 풍조 가운데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윌리엄 로(William Law, 1686-1761)와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두 마리 사자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이른바 ‘이교 신앙’(Paganism)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곳,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 에드먼드 스펜서가 쓴 12권짜리 장시)과 아카디아(Arcadia, 필립 시드니가 쓴 목가풍의 연애시) 한가운데서도 숨어서 기다렸다. 물론 형태는 다양했다. 하지만 본질은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을 만큼 똑같았다. 생명이 되게끔 하지 않는 한 이 향기는 우리에게 죽음이며, 이 피할 수 없는 향기를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죽음의 바람이저기 먼 나라에서 불어온다(A. E. 하우스먼의 시 ‘내 맘속으로 죽음의 바람이’에서_옮긴이)기독교 세계의 분열에 대해서는 모두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옳다. 그리고 기독교의 틀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그 분열 때문에 너무 쉽게 낙심할 수도 있다. 분열은 나쁘지만,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의 틀 밖에서는 분열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틀 밖에서 볼 때, 그 모든 분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존(溫存)하는 것은 엄청나게 경이로운 일치성(unity)인 듯하다(실제로 그러하듯). 이것은 내가 틀 밖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안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그 일치성은 자기가 속한 시대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 보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일치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해 온 것 이상이다. 일단 이 일치성을 잘 이해하고, 그런 다음 이를 과감히 말할 수 있게 될 경우,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사실은 버니언의 말을 풀어 옮기고 있는데 로마가톨릭교도로 여겨지기도 하고, 아퀴나스를 인용하고 있는데 범신론자로 오해받기도 하는 등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 시대와 시대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수준의 구름다리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구름다리는 골짜기에서 보면 아주 높게 보이고, 산에서 보면 아주 낮게 보이며, 늪에 비하면 아주 좁아 보이고, 양 떼가 다니는 길에 비하면 아주 넓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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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짐승: 다니엘 4장 이해하기
by Alex Kirk
2022-06-21
다니엘서 4장은 구약성경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장인데, 인간이 동물로 변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들어있다. 따라서 고전적인 변신 비유, 소년들이 갑자기 돼지로 변하는 피노키오 속 이야기나 또는 신들이 인간을 치명적인 신의 결점을 나타내는 생물로 변형시키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여러 이야기가 생각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한다.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단 4:33).이 묘사에 대한 그럴듯한 역사적 설명을 발견하길 희망했던 빅토리아 시대 학자들은 임상적인 라이칸스로피(lycanthropy, 사람을 늑대로 바꾸는 마법) 진단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구절을 읽고 미녀와 야수 같은 상황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그럼 이것이 동화 속 이야기인가? 느부갓네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것은 동화나 정신병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에게 자신을 찬양하도록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다.느부갓네살과 동물적 생각다니엘서 4장은 궁전에서 여가를 보내던 느부갓네살이 상징적인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한다. 꿈에서 왕은 하늘까지 닿아 하늘의 모든 새와 들짐승에게 먹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거대한 나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법령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단 4:13-17). 나무는 강하고 자애로운 왕권의 이미지이며(겔 17:23-24; 31:4-7, 9), 꿈에 나오는 동물은 왕이 먹이고 보호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 나무에게는 능력과 웅장함 그리고 여유라는 면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의 문제가 있다(단 4:30). “나무를 베다”는 왕의 형벌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16절은 형벌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직설적으로 묘사한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교만이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가득 채웠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느부갓네살의 몸은 이 심오한 변화를 보여주는 캔버스가 된다. 그는 노출된 생활을 하며 소처럼 초목을 먹고 산다. 그의 몸은 새가 될 때까지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나 맹금류 또는 다른 종류의 동물과의 일관된 비교는 없다. 오히려 느부갓네살은 동물적이 된다. 그의 외양은 동물의 마음으로 야수처럼 집 밖에서 몇 년 동안 살았을 경우, 누구나 다 겪을 정도로만 영향을 받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외부 변화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내부 변화의 질을 반영한다. 이 형벌은 우주적 공급자이자 보호자가 공급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들 중 하나인 천한 짐승이 되기 위해 창조 질서의 위계를 거쳐서 내려오는 것이다(시 8:5-7). 새와 짐승이 큰 나무 아래서 그늘과 먹을 것을 찾은 것처럼(12절), 느부갓네살도 새와 짐승과 같이 되어 몸을 드러내고 짐승의 몫을 먹는다(33절).그러나 본문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잠시 동물이 된 느부갓네살에서 34절의 회복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핵심적인 순간은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눈을 들 때”이다. 성경은 심오한 계시의 순간을 눈을 들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몸짓과 연관시킨다(창 22:13; 수 5:13; 사 40:26; 51:6; 시 121:1; 123:1). 말 없는 그런 몸짓은 동물이 보이는 겸손의 한 형태이다. 동물은 창조 질서의 위계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위치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본능적 지식은 종종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생각보다 더 참된 것으로 묘사된다(사 1:2-3, 렘 8:7, 욥 12:7-12). 짐승으로 살았던 느부갓네살의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바꾸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무시할 수 없고, 더 이상 자신의 자신감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단 4:17; 4:25b). 그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렇기에 위를 올려다보아야 한다. 왕을 겸손하게 만들기짐승으로 변한 느부갓네살 이야기가 동화는 아니지만, 종종 성경에서 발견하는 진리의 한 측면이 동화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옛 이야기에서 한 오만한 왕자는 사심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야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의 성격도 외모에 걸맞게 바뀌게 된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은 그를 인간 이하로 만들었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인류 중에서 쫓아내셨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동물의 마음으로 바뀌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웠다.이런 새로운 관점은 느부갓네살에게 형벌로 강요되었지만, 여기에는 은혜가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동물적 마음은 그의 관점을 바꾸고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회복시킨다(단 4:34-35).느부갓네살의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을 회개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더 심오한 차원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우리를 낮추시고 올바른 정신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을 드러낸다(단 4:37). 이런 왕이 우리에게 찬양을 명령하신다.느부갓네살의 오만함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겸손으로 왕좌에 오르신다. 주님은 위대한 왕이시다. 그의 왕국은 영원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7). 하나님에서 겸손한 인간으로의 이런 이동은 느부갓네살이 위대한 왕에서 낮은 짐승으로 내려온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바벨론 왕과는 전혀 달리, 왕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생각을 취하셨다. 하나님은 본인이 성취하지 않은 것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예수님의 겸손은 하늘과 땅 전체에 울리는 승영의 서곡이다(빌 2:9-11).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겸손은 하늘의 왕을 향한 찬양의 서곡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37).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해 이렇게 찬양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합당한 반응이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면 결국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추락시킨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빌 2:5). 겸손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찬양으로 인도한다. 느부갓네살처럼, 또 예수님처럼 우리도 온전한 인성(full humanity)을 갖춘 자리로 올라가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원제: The King and the Beast: Understanding Daniel 4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만
느부갓네살
겸손
나무
다니엘
오만함
바벨론
선하심
무신론자의 믿음
by Glen Scrivener
2022-06-20
“너도 알겠지만 난 네 믿음을 절대로 가질 수 없어.” 내 친구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친구는 자기 기질로 볼 때 뭘 믿는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내 친구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친구가 많다. 아마도 당신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이건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이지만 흔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로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나는 신앙인이고 회의론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것이 (또는 의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나는 신앙인이기도 하고 회의론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다. 내 친구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신앙인이고, 동시에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회의론자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살고 있다. 우리 모두, 언제나, 그렇게 산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믿음의 두 유형나는 우리의 믿음을 구분하여 “일상의” 믿음과 “가장 깊은” 믿음’이라고 부르곤 한다. “일상의” 믿음은 우리가 항상 실행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건 무엇인지, 사람을 움직이는 건 무엇인지, 사회를 작동시키는 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가정이 다. 이런 믿음을 우리는 거의 점검하지 않는다. 증명하려고도 정당화하려도 하지 않는다. 이 믿음은 그냥 우리가 숨 쉬는 공기다.이런 믿음에는 “사람에게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 “사회는 가장 약한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으로 판단해야 한다” “힘이 정의는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호(弧)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휘어져 있다” 같은 것이 있다.이런 “일상의”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다들 이것들을 믿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믿는다. 내 친구들도 이것들을 믿는다. 현대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들을 믿는 것 같다. 이렇듯 정말로 우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가장 깊은” 믿음 곧 실재의 근본적인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에 관해서 토론하지만 말이다. 크나큰 틈은 바로 이 수준에서 벌어진다. 가장 깊은 갈등리처드 도킨스가 보는 우주는 “근본적으로 계획도, 목적도, 악도, 선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무관심만을 있을 뿐이다.” 반면에 모세는 “그 영원한 팔이 떠받쳐 주신다”(신 33:27)고 말한다. 그러니 골라잡아라. 무신경하고 잔인한 힘이 떠받치고 있는 우주, 아니면 사랑의 팔을 뻗고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발생하는 믿음의 충돌은 화해가 불가능해 보인다.이처럼 엄청난 차이이다 보니, 내 친구가 왜 내가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무관심”과 “영원한 팔”을 펴시는 사랑 사이의 간극을 연결할 다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틀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두 개의 가장 깊은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다른 불일치에 초점을 맞추는 게 어떨까? 왜냐하면 정말 연결할 수 없는 균열은 우리의 무신론자 친구들 ‘내부에 존재하는’ 균열이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들에 어떤 부조화가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불가침의 인권을 가지고 있는 영리한 침팬지이다. • 우리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볼 의무가 있는 생물학적 생존 기계이다.• 우리는 무의미한 바위에 매달려 무의미한 우주에서 영원한 멸종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행성을 우리가 물려받은 것보다 더 나은 상태로 물려주어야 한다.• 적자생존은 인간 삶에 대한 가장 심오한 설명이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틀렸다.내 친구들은 이 진술들에서 절반은 진심으로 믿는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가장 소중한 직관들이 모든 수준에서 우리의 됨됨이를 형성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증명할 수 없는) 이러한 믿음들에 목숨을 건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나 지적해야 할 진정한 불일치가 있다. 그것은 무신론자의 가장 깊은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믿음 사이의 불일치가 아니다. 가장 극명한 불일치는 무신론자들 ‘안에’ 존재한다.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직관과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믿음 사이에 있는 간극이 그것이다.예수 혁명의 영향을 받다The Air We Breathe: How We All Came to Believe in Freedom, Kindness, Progress, and Equality(우리가 숨 쉬는 공기: 우리 모두는 어떻게 자유, 우애, 진보, 평등을 믿게 되었는가)에서, 나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일곱 가지 직관이 어떻게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가 되었는지 다루었다. • 평등: 우리는 계급, 인종, 종교, 성별, 성(sexuality)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 가족 구성원의 평등한 도덕적 지위를 믿는다. • 연민: 우리는 사회를 가장 약한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믿는다. • 동의: 우리는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을 남에게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다. • 계몽: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을 믿으며, 완력이 아니라 설득과 논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 과학: 우리는 과학을,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개선하도록 도울 수는 과학의 능력을 믿는다.• 자유: 우리는 사람은 재산이 아님을 믿으며,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 진보: 우리는 역사의 호가 길지만 정의를 향해 휘어져 있다고 믿는다.‘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이러한 가치들을 창세기부터 조지 플로이드까지 독자를 초대하여 기독교 이야기의 맥락에서 탐구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구약에서 시작하여, 신약으로 이어지고, 초기 교회의 성장, 중세 그리스도교세계(Christendom), 과학의 진보, 노예무역 폐지, 2차 세계대전과 민권운동을 거쳐 현재까지 살펴볼 수 있다.각각의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직관들이 당시에는 전혀 명백하거나 자연스럽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가치들은 기독교 이전과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러한 믿음들은 모두 예수 혁명(a.k.a. 기독교)을 통해 왔다. 그리고 이것들은 예수 혁명을 빼고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충돌에 집중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신앙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믿음들에 대한 놀라운 합의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입증할 수 없는 가치들이 기독교 혁명을 통해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소중한 믿음들을 역설할 때마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충돌은 정말이지 비그리스도인 안에 존재하는 충돌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친구들이 (비록 스스로 불신자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소중히 여기는 믿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떼어놓고서는 성립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견고한 토대다. 다른 토대는 모두 가라앉는 모래다.편집자 주: 이 글은 Glen Scrivener의 The Air We Breathe(The Good Book Company, 2022)를 간추린 것이며, 이 책은 The Good Book Company와 협력하면 출간되었습니다. 원제: Everyone You Know Is a Believ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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