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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세상 문화 속 기독교 메시지를 찾아서
by Joshua Chatraw2020-09-07

믿지 않는 당신의 친구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기독교적'일 수 있다...하지만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만으로 그들 속에 믿음이 있다는 식의 섣부른 가정을 하는 건 경솔하다. 그들에게는 보다 더 나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Simply put, your unbelieving friends are probably more “Christian” than they realize...but these assumptions don’t make much sense within their current script. They need a better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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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전반에 스며든 기독교적 이야기 덕분인지 몰라도, 서구에서는 한때 기독교가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일류 교육 기관, 매일의 습관과 일상의 대화에서 하늘 나라, 초월적인 도덕성, 죄, 최후의 심판 그리고 궁극적 구원의 가능성 등의 이야기가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문화의 일상을 구성하는 암묵적인 배경이 되었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기본이 되었다. 최소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 속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가능성 높은 선택지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 믿음은 사회 전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다. 많은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의심 보다는 신빙성이 훨씬 더 높은 종교였다. 물론 당시라고 비판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 비판은 결코 비중 있게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의 사고에 깊이 파고든 문화적 서사는 크게 바뀌었다. 그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보는 것도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천국, 최후의 심판, 나를 부인하고 옛 자아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선한 하나님, 그리고 배타적인 구원의 길 등은 이제 설득력 없는 이야기로 들린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복음은 틀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과거가 남긴 억압적인 유산(oppressive leftover) 정도로만 취급된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은 여전히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가 만난 첫 도전, 그러니까 교회를 집단적인 두려움과 혼란으로 이끄는 비 안정적인 첫 번째 문화적 변화가 아니다. 강력하게 기독교화 된 제국, 로마가 주는 궁극적인 희망에 젖어있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회중들에게 임박한 로마의 멸망은 당황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거스틴(Augustine)은 누구나 당연하게 느끼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하나님의 도시’(City of God)에서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 조차도 하나님이 준비한 큰 이야기 속의 일부로 바라보았다. 그런 시각은 그에게 대규모 사회 변화와 기독교에 대한 비난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과 평안함을 제공했다. 그가 취한 접근 방식은 눈앞에 닥친 진짜 압력을 단지 이겨내야 하는 도전으로만 여긴 게 아니라, 하나의 기회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를 둘러싼 이교도의 도전 속에서 그는 도리어 오로지 그리스도의 이야기만이 풀어낼 수 있는 기회로 보았고, 그 기회를 잡고 싶은 열망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맞아 어거스틴이 보여준 굳건한 신학적 태도는 서구 세계가 지금 맞이하고 시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워커 퍼시(Walker Percy)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시대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 때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오래 전 기독교 왕국 때에는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었고, 그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제공하는 이론과 소비의 생존자는 누구나 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자(St. Anthony)처럼 사막을 헤매는 나그네(wayfarer)이다. 그건 다시 말해, 어디로 가야할 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문화적 흔적


우리는 이제 당면한 도전 뿐 아니라 탈 기독교를 향해 가는 서구 사회 속에서 기회까지 살펴보아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기독교가 과거의 오래된 유물로 강등된 사회에서 조차도, 아니 그런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사실상 알게 모르게 접하는 복음의 흔적, 기독교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은 복음의 여파가 어떻게 오늘날 가장 사랑받은 문화 속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이야기를 세계적인 현상으로까지 만든 데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지만, 콘스탄스 그래디(Constance Grady)와 아자 로마노(Aja Romano)는 이 시리즈를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요소에 대해서 확고하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사회 현상으로까지 성공한 것은 그 시리즈가 수백만 명이 사랑하는 스토리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탈출하기를 꿈꿔 왔던 세계, 거대한 마법 세계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토록 매혹적으로 만든 것이 단지 마법의 주문 또는 퀴디치(quidditch) 경기는 아니었다. 저자인 J. K. 롤링(J. K. Rowling)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볼 때, 종교적 유사점은 이야기 속에서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해리의 부모, 덤블도어의 어머니와 누이의 비석에 있던 마지막 책 속에서 다음 성경구절 두 개를 인용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따라서 해리가 고드릭 할로우(Godric’s Hollow)의 비석에서 발견한 이 두 개의 구절은 해리 포터 전체 시리즈를 거의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해리 포터라는 서사는 그렇기에 두 개의 희생적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린 어머니의 사랑과 그가 사랑하는 모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향해서 가는 그 아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 이야기 속 구세주는 해리 포터이다. 극적인 순간을 맞을 때면 앞을 가로막는 악 때문에 언제라도 죽음에 이를 수 있었지만, 결국은 살아 돌아와서 악을 물리친 젊은 마법사 해리 포터이다. 


일단 복음이 문화라는 피투성이 속으로 스며 들어오게 되면, 아무리 회의론자와 비관론자라고 해도 순간 순간 복음을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윤리가 가진 억압적인 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더불어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사용해서도 얼마든지 바른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이 사회가 여전히 도덕적 감수성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주는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19세기 말을 살았던 철학자, 기독교에 특히나 비판적이었던 프레드릭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경우에도 같은 시대 무신론자를 주목했는데, 그가 보기에 그런 “세속적인” 사람들조차도 완전히 기독교가 주는 이야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기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서구 기독교 마인드


오랫동안 세속 진보주의자로 활동한 역사가 톰 홀란드(Tom Holland)는 자신이 한 때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십 대 시절에 이미 사라졌지만, 인간이 가진 삶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본능(fundamental instincts)은 기독교 이야기의 유산으로 이해할 때에만 말이 된다는 고백을 최근에 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책, ‘도미니언’(Dominion)은 우리 문화가 가진 도덕적 이상이 어떻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의 아들이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으며 또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노예나 자유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성경의 주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서구 역사 전체를 살펴보면서 개관한, 하나의 거대한 역사 여행이다. 인권, 취약한 인간을 향한 공통된 관심, 인간 평등, 성적 절제, 겸손에 대한 존경, 그리고 도덕적 진보 자체에 대한 보편적 관심사는 기독교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발전시킨, 우리 사회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홀란드는 이런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당 장의자가 점점 더 비어가는 게 지금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 기독교에 단단히 매여있다.”(콜린 한센[Collin Hansen]과 홀란드의 인터뷰가 실린 ‘가스펠바운드’[Gospelbound]를 들어보라)


간단하게 말해서, 믿지 않는 당신의 친구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기독교적’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이미 특정한 기독교적 이상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만으로 그들 속에 믿음이 있다는 식의 섣부른 가정을 하는 건 경솔하다. 그들에게는 보다 더 나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홀란드 자신도 서구 문명의 미래가 우리 모두가 다 공유하고 있는 역사를 얼마나 더 잘 이해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이 가진 도덕적 열망은 이성으로부터 기인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학으로 인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발전의 독특한 과정이다. 그 과정은 또한 유럽과 미국에서 점점 더 많아진 숫자의 의견에 따라 신을 죽은 존재로 만든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게 시체의 그림자가 주는 가치보다 어떻게 더 나을 수 있는 걸까?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가진 도덕성의 기초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건 올바른 질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홀란드는 그렇다고 모든 신화가 다 비진리(untrue)는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신화가 사실이면” 어떻게 되는 걸까? 


기독교적 상상에 사로잡혀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계몽된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만국 공통어이다. 그냥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문화는 우리 속에 내재한 다른 세상을 향한 갈망을 자극하는 상상의 이야기에 계속 사로잡히게 된다. 자유주의 휴머니스트가 보여주는 전 인류를 향한 도덕적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롤링이 들려주는 희생적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듣고 싶고 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 비춰볼 때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비록 탈 기독교 문화(post-Christian cultures)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결코 복음이 가진 매력의 메아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왜 현 시대에서도 죄책감, 도덕적 용기, 희생, 구원, 그리고 부활이라는 주제가 가장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까지도 뛰게 만드는 것일까? C. S. 루이스(C. S. Lewis)와 J. R. R. 톨킨(J. R. R. Tolkien)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준다. 톨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위 단계의 창조자”(sub-creators)이다. 그렇기에 무의식 중에 우리는 창조자를 계속 흉내내고 있으며, 창조자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그 궁극적인 이야기의 메아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류의 잠재력은 이야기를 포기함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진 유일한 진실된 이야기, 이 세상 모든 이야기를 밝혀주는 그 진짜 이야기를 받아들임으로 가능하다. 급변하는 문화의 조류 속에서도, 또 방향성을 상실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우리의 마음에는 뭔가 더 나은 이야기를 갈망하고 있다. 바로 복음이라는 진짜 이야기 말이다. 


오늘날 전시되고 있는 수많은 세속적인 이야기는 그 구성이 허술하여 생명력이 길 수가 없다. 한번은 무신론자 철학자인 존 그레이(John Gray)가 한 세속적인 휴머니스트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휴머니스트는 인권과 같은 높은 도덕적 이상의 토대를 찾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그 휴머니스트 신화는 다름 아니라 종교에서 빌려온 것이었고, 결코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결코 길게 지속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대를 앞서가는 무신론자 지성인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고백, 현재의 세속적인 신화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을 인정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약간이나마 희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전할 준비를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눈앞에 힘든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두려움에 떠는 건 결코 기독교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진짜 이야기,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를 알고 있다. 그 이야기는 1500년 전 어거스틴 시대를 휩쓴 이교도의 이야기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또한 오늘날 경쟁하는 세속적인 신화들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한 우리의 소명은 복음으로 초대하는 법, 복음을 모르는 이에게 “와서, 진짜 이야기가 주는 실체를 맛 보고 또 눈으로 보라”라고 초대하는 변증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데에 보다 더 실천적인 방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이름 붙인 구조가 담긴 책, ‘더 나은 이야기를 말하기(Telling a Better Story)’를 썼다. 퍼시가 알려주는 것처럼, 오늘날 세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허술한 구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주의의 대본이 제시하는 얕은 수준을 뛰어넘는 뭔가를 찾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오늘날 “표지판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왕국이 무너진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근대가 주는 뒤늦은 기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즉 복음을 잔해 밑에서 파내어 이 표지판이 지난 시간 내내 가리켜온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Unbelievers Are Probably More ‘Christian’ Than They Realize

번역: 무제

급변하는 문화의 조류 속에서도, 또 방향성을 상실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우리의 마음에는 뭔가 더 나은 이야기를 갈망하고 있다. 바로 복음이라는 진짜 이야기 말이다.

The good news is that there is something in the human heart, even amid the culture shifts and our disordered fallen condition, that longs for the better story—the true story of the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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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shua Chatraw

조슈아 차트로는 Center for Public Christianity의 디렉터이다. 저서로는 마크 앨런(Mark Allen)과 공저한 ‘Telling a Better Story'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