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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by Justin Dillehay2020-09-12

로마서 9장을 읽을 때 당신의 생각은 바울에 가까운가 아니면 그 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에 가까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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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향해서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설교한다고 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이 바울처럼 칭의에 대해서 바르게 설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다음과 같은 식의 반대를 로마서 6장 1절에서 예상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부터 이와 똑같은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도 바울처럼 제대로 설교하고 있다는 좋은 지표가 된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선택교리와 관련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로마서 9장에 들어와서 바울은 무려 두 번에 걸쳐 선택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반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롬 9:14, 19). 내가 ‘자연스럽게’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예를 든 반대의 사례가 선택 교리가 전해질 때마다 어디서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나오기 때문이다. 선택 교리는 책에서 또는 설교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사실상 내가 로마서 8장을 만나고 칼빈주의자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에 관해서 바울이 말한 것과 똑같은 두 가지 반대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내가 하고 싶은 주장이 담겨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칼빈주의자가 지키는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를 가르친다. 즉,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그건 그들 속에 있는 믿음 또는 열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목적에 근거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증거는 두 단계로 설명된다. 첫 번째로 바울은 동일한 반대 중에서도 두 가지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교리에 대항해서 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그는 결코 알미니안식으로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가 무엇인가?


1.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런 반대를 14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지금 막 선택과 관련한 두 가지 사례를 구약을 통해서 논하고 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선택하는 것(롬 9:6-9)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는 것(10-13)이다. 바울은 강조하기를 야곱은 에서를 제치고 선택받고 또 사랑받았는데 그건 무조건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


여기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은 이것이다. “말도 안 돼. 하나님이 성품이나 선과 악, 그런 거 하나도 보지 않고 무조건 선택한다고? 그건 정말로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만드는 소리야.”


그렇기에 바울은 바로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반율법주의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바울이 이런 반발을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가 지금 여기서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앞으로 생길 믿음을 미리 바라보면서 하는 조건적인 선택을 가르치는 알미니안의 경우 과연 얼마나 자주 이런 식의 반응을 불러일으킬까? 


물론 이런 식의 논증이, 바울이 지금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라는 사실에 유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무튼 알미니안도 하나님이 선택에 있어서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건 바울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 쪽이 옳은지를 결론내리기 전에 먼저 바울이 무슨 근거로 “하나님께는 결코 불의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봐야 한다. 아마도 반대하는 사람은 바울을 오해한 거 같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살펴봐야 한다.


자, 바울은 선택 교리를 향한 반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께는 결코 불의가 있을 수 없어.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를 선택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앞으로 야곱은 신자가 되고 에서는 세속적인 인간이 될 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렇게 이야기했나? “명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여기서 어떤 특정 개인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야. 어떤 민족이 특별한 쓰임을 받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대답은 둘 다 아니다.


알미니안처럼 대답하는 대신 바울은 여기서 대상이 누구라도 관계없이 당신의 자비함과 애정을 주고 싶은 이에게 쏟아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롬 9:15). 물론 성경은 에서가 사악한 인간이고 야곱을 믿는 이로 그리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선지식이 하나님이 내린 결정의 배경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또 태어나서 뭔가 선하고 악한 일을 하기도 전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이 가지는 목적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구절도 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삼하 22:26; cf. 마 5:7). 그러나 그건 로마서 9장 15절이 말하는 포인트가 아니다. 15절은 왜 어떤 사람은 더 자비함을 받는지에 대한 더 깊은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는 15절의 말씀은 사무엘하 22장 26절의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가 궁극적으로 예견된 믿음이나 자비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은 로마서 9장 16절과 반대로 선택이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한 이유는 야곱이 에서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에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물론 에서가 야곱보다 못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현재 또는 미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가르침은 14절에서 생길 수 있는 반대를 보여주고 15절과 16절에서 그에 대한 설명이 주어진다.


그러면서 이제 두 번째 반대점으로 이어진다.


2.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책임을 훼손한다


19절에 이런 반대가 나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또 하나의 사례로 바울은 출애굽기 9장 16절을 예로 든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름을 온 열방에 떨치기 위해서 바로 왕을 들어 사용한 것을 보여준다(17). 바로 거기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완악하게 하시고”라는 단어가 출애굽기 9장 16절에는 나오지 않지만 출애굽 사건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읽음으로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이스라엘을 독립시킴과 동시에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 이스라엘을 잡고 있는 상황을 함께 설명한 것이다. 반복되는 ‘완악하게 하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바로로 하여금 계속 상황을 질질 끌게 만들게 하여 궁극적으로 바로가 가진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에 전파되게 하기 위함이다(출 14:4; 요 2:8–11).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 결코 바로의 악한 성질로 인한 하나님의 반응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19절 속 반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그와 동일한 반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생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바로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뤄드리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바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는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는 사람의 이성을 공격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완악하게 여길 자를 완악하게 만들고”라는 무조건적인 저버림(unconditional hardening)은 인간의 이성으로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반대가 나온다는 사실은 이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맞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이게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이런 오해가 행여 바울을 오해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다시 한 번 설득력을 가진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가?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해. 일단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거야.”


그렇지 않다. 대신 바울은 감히 하나님에게 누가 이런 반대를 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 반대자의 권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롬 9:20). 그리고 그는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20-21). 그 용도가 “불명예,” “진노,” 그리고 “파괴”(21-22)를 위한 것이든지 아니면 “명예,” “긍휼,” 그리고 “영광”을 위한 것이든지 간에(23) 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토기를 마구잡이로 만든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선택은 결코 토기 자체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세와 바로도 또 야곱과 에서가 한 사람으로부터 나와서 같은 자궁 안에서 살았던 것처럼(10), 다 “똑같은 토기 한 덩어리”에서 나왔다(롬 9:21). 토기가 궁극적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는 토기의 의지 또는 노력에 달린 게 아니라 오로지 “그의 진노를 보이고 열방에 그의 능력을 알리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23) 하심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코 그 누구도 그분의 긍휼이 가져다주는 영광의 풍성함을 바로 볼 수 없다.


선택 교리를 바울처럼 설교하기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서 9장에 있는 신학적 주제가 가진 중요성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고 있다. … 문법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증거가 요구하는 경우에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애초에 선호하는 방식과 다르게 말하도록 힘쓰게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로마서 9장을 읽을 때 당신의 생각은 바울에 가까운가 아니면 그 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에 가까운가? 로마서 9장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신학적 지점을 스스로 테스트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아주 드문 본문이다. 성경 안에서 어떤 특정한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가 그토록 노골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그런 반대에 대한 대답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교리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받아들이기에 얼마나 힘든 지를 생각하면 바울이 그런 드문 방식으로 성경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처럼 귀한 본문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자. 스스로를 점검하라. 행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만든다는 비난 또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어쩌면 선택 교리에 관한 설교를 바울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제: How Romans 9 Anticipates Objections to Unconditional Elect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바울은 여기서 대상이 누구라도 관계없이 당신의 자비함과 애정을 주고 싶은 이에게 쏟아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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