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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우기

코로나 시대의 소그룹 사역
by 김선일2020-09-29

공적 공간은 서로 익명적 관계이면서도 소속감을 갖는 공동체로서 대략 40~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 사회적 공간은 가벼운 대화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로서 10~15명에서 50명까지 이를 수 있다. 인격적 공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명~12명의 소그룹으로서 정기적인 나눔이 가능한 규모다. 친밀 공간은 서로 은밀한 고민을 나누고 삶의 공유를 할 수 있는 2~3명의 가족적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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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서 교회의 중요하고 전망 있는 사역 형태로 소그룹이 부상했다. 그러나 현재의 팬데믹 방역 정책은 교회의 대면 예배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 예배 외의 다른 모임들을 더욱 규제하는 양상으로 가고 있다. 물리적 거리를 두고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용인하지만, 사람들이 더욱 밀착할 수 있는 소모임은 위험한 감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교회는 공예배 외에도 성경공부, 기도회, 부서별 모임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소그룹들을 통해서 양육과 친교의 필요를 충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소모임 규제는 사역의 활성화 측면에서 상당한 난관을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을 통한 모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인간의 본질적 욕구인 관계와 만남을 대체하기에는 미약하다. 비대면이 교육과 정보제공에서는 매우 유용하지만,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오감 동원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고려사항이 있다. 현 상황의 변화는 비록 코로나로 인해 증폭되긴 했지만, 이미 코로나 발생 이전부터 존재하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온라인 교육과 재택근무 등의 비대면 기술은 코로나 이전부터 증가세에 있었고, 코로나는 그것을 훨씬 앞당기고 보편화시켰다. 온라인 기술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전부터 인간의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거대한 변화의 조짐들이 일어났다. 교회는 전통적인 관계와 공동체에 익숙했을 뿐, 코로나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서 인간의 관계 맺는 양상은 변화했던 것이다. 


1.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찾는 시대


약 1년 전에 출간된 트렌드 전망서들은 2020년에 나타날 중요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예기하는데, 주로 관계와 공동체를 집중 조명한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 낸 ‘트렌드코리아 2020’(김난도 외 지음),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의 ‘라이프트렌드2020: 느슨한 연대’(김용섭 지음), 생활변화관측의 ‘2020 트렌드노트: 혼자만의 시공간’(염한결 외 지음) 등은 종래의 익숙했던 끈끈하고 집단주의적인 공동체에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개인의 취향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네트워크의 시대가 왔음에 주목한다.


새로운 변화가 공동체를 버리고 개인주의로 도피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질적이고 생래적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공동체를 찾고 있다. 어느 한 집단에 귀속되어 단일한 자아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에 다양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소속되는 것이 더욱 편하다.


유목민주의라 불리는 ‘노마디즘’ 시대에는 개인의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고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원화된다(김난도 외, 198). 혈연, 학연, 지연에 의해서 형성되는 태생적인 소속감은 힘을 잃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의무감 없는 느슨한 연대가 많은 모임들의 성격이 된다. 가족, 회사, 종교는 전통적으로 끈끈한 연대를 기반으로 유지되어왔는데, 이제는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가족의 다변화, 회사의 수평적 관계 등이 새로운 변화라면 교회도 이러한 문화적 변화를 ‘일정 부분’ 이해하고 수용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탐구해야 할 시점이 왔다. 우리 사회의 관계 문화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넘어가면서 종교의 힘이 퇴색한다는 진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소 일반화된 도식이지만, 기존의 공동체와 새로운 공동체의 차이를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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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새로운 공동체들의 특성은 취향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취향에서는 살롱 문화가 증가하고 있다. 가족의 집과 같은 분위기의 홍대입구 ‘취향관’,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인 ‘문래당’ 등의 공간 중심 살롱이 있고, 유료 독서모임인 ‘트레바리’나 글쓰기, 요리, 영화토론 등의 취미모임인 ‘문토’ 등이 자발적 선택에 의해 모이는 살롱 문화를 대표한다(김용섭, 92)


2. 교회의 새로운 공동체들


소셜 살롱과 취향 네트워크의 문화가 교회의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과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우선 이러한 취향과 수평적 문화가 교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와 배치된다는 선입견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은 책임감과 소속감이 없는 피상적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필자도 오랫동안 이러한 식의 공동체에 의심을 보내왔다. 그런데 현재의 코로나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의 그룹핑(grouping) 방식을 근본에서 재고하게 만들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의미를 새로운 상황에서 추구해야 할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자발성, 취향, 수평성이라는 코드가 헌신과 희생을 기반으로 할 기독교 공동체와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전자에서 근본적으로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헌신과 희생이 아니라,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이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거부하는 서열, 연줄, 가부장과 같은 관습적 공동체의 구심점들은 오히려 성경적 정신과도 명백하게 어긋난다.


그 동안 개인주의와 익명성의 증가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향과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연결되는 소모임이나 공동체를 불편해했다면, 이제는 안전과 위생의 차원에서도 자신들이 편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이들과의 교회 모임을 꺼려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불편함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에 헌신해야 할 성숙한 신앙인들로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신앙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도록 초대하는 길은 지금까지 익숙한 방식의 소그룹이나 공동체만은 아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인간에게는 상호 연결을 이루는 네 가지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것은 공적 공간(public space), 사회적 공간(social space), 인격적 공간(personal space), 친밀한 공간(intimate space)이다(‘숨겨진 차원’ 한길사 2013). 


규모를 기준으로 나누자면 공적 공간은 서로 익명적 관계이면서도 소속감을 갖는 공동체로서 대략 40~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 사회적 공간은 가벼운 대화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로서 10~15명에서 50명까지 이를 수 있다. 인격적 공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명~12명의 소그룹으로서 정기적인 나눔이 가능한 규모다. 친밀 공간은 서로 은밀한 고민을 나누고 삶의 공유를 할 수 있는 2~3명의 가족적 관계다. 홀의 이러한 이론을 교회 공동체에 적용한 조셉 마이어스(Joseph Meyers)는 최근 교회들이 공동체를 지나치게 소그룹 위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공동체는 위와 같이 네 가지의 다양한 공간과 관계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함께 있음’(togetherness)만이 아니라 ‘연결됨’(connectedness)이라고 주장한다(The Search to Belong, Zondervan 2003, 44).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공적 공간에서 연결됨을 느낀다. 또는 교회의 각종 양육모임이나 교구와 같은 규모 있는 사회적 공간에서도 소속감과 가벼운 교제를 나눈다. 인격적 공간의 소그룹은 좀 더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의 나눔과 격려를 원하는 이들에게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일대일 상담이나 멘토링을 통해 더욱 깊은 친밀한 교제를 원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네 가지 공간이 교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각기 다른 차원의 공동체적 필요를 채워준다는 사실이다(Meyers, 51). 대규모 예배와 미리 조직된 소그룹의 두 날개로 사람들의 필요와 상황에 부응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의 수평적 취향 네트워크 성향을 고려한다면 더욱 난감하다.

네 가지 공간 모두가 일정한 공동체적 필요를 채워준다. 오랫동안 소그룹에 머물러 잠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소그룹으로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이들의 처지를 존중하는 것이 각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자세일 것이다. 공동체적 관계는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소그룹에 참여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분위기도 누군가에는 불편한 압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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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로나 시대의 교회 소모임      


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어떠한 식으로 공동체를 이루셨는가?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소그룹 공동체로만 대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교회 소그룹의 상징적 규모인 열 두 제자가 있었지만 그들만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다. 전도를 위해 파송하신 제자들은 사회적 공간의 규모를 약간 상회하는 칠십인이었다(눅 10:1). 오순절에 모인 제자들의 수는 공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일백 이십인(행 1:15)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종종 중대사가 있을 때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친밀 공간을 만들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며 그들을 훈련시키셨고 우리와도 늘 함께 있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마 28:20), 그것이 꼭 외형적, 신체적 근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는,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아픈 종 뿐 아니라 심지어 백부장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하시며 그의 종을 고쳐주셨다(눅7:1-10 누가는 유대인의 장로들과 백부장의 벗들이 와서 예수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묘사한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의 상황은 교회들로 하여금 그간 익숙했던 대면 중심의 사역 방식에 혼란과 당혹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교회 소그룹과 공동체 사역을 다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구성원들의 가벼운 친교와 양육은(현재도 많은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상당부분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개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보와 지식을 나누는 것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라면 온라인이(때로는 오프라인과 결합할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적인 대면을 여전히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일수록 외부에 의해서 배치되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모임에 대해서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선호할 것이다. 따라서 5~6인 이하의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마이크로 소그룹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내가 적정 소모임의 규모를 6인 이하로 구상하는 것은 경험적 근거도 있지만, 일반적인 독서 소모임에서 상호 교류의 역동성을 위해서는 6인 이하가 적합하다는 진술에 기인한다).


교회는 모임의 주제와 구성원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보다 여러 다양한 소모임들이 생겨나도록 리더들을 양성하고. 모임을 장려하며 후원하는 역할을 맡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게 좋을 듯싶다. 정리하면, 교육이나 양육중심의 소그룹은 온라인 중심의 사회적 공간으로 전환하고, 기도와 나눔 중심의 소그룹은 규모를 더욱 줄여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발적이고, 가족적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의 정기적 소그룹 모임이 10명 내외였다면 여기서는 5명 내외, 혹은 그 이하로 줄여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소그룹 사역을 활발하게 해왔던 어느 교회에서는 다시 3~4명의 단위로 체제를 개편하고 있다고도 한다.


어느 목회자의 경험에 의하면, 교회에서 소그룹 사역 체제를 만들지 않아도 (사실 그 전에 시도를 해봤지만) 교인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소모임들이 형성되고 자기들끼리 교류한다고 한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소그룹 사역의 예비적 단계일 수도 있다. 그동안 교회가 공동체의 결성을 도맡아하는 프로그래머의 기능에 몰두했다면, 코로나시대에는 다양한 공동체 공간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소모임의 구심점이 될 평신도 리더들을 양성하고, 각 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관찰하고 후원하는 섬세한 환경조성자(environmentalist)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의 상황은 교회들로 하여금 그간 익숙했던 대면 중심의 사역 방식에 혼란과 당혹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교회 소그룹과 공동체 사역을 다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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