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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자리잡은 찬양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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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돈영 /  작성일 20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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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C코리아 제공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의 전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다른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찬양의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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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 가지


아무도 없는 예배당, 문 여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진다. 또각또각 울리는 발소리가 예배당으로 향하는 존재를 알리는 듯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 앞에 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신경이 쓰인다. 자꾸만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기에 더욱 집중된다. 이윽고 아주 작은 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뭐라고 말하는데 소리가 너무 작다. “나 주 일 광……거 주 해 주”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규칙적으로 들리고, 반복해서 읊조리는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젠 호기심이 생긴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고 말겠다는 괜한 오기가 발동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듣는다. 시간은 흐른다. 소리에 적응하니 제법 귀에 들어온다. 그제야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송가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첫마디에 힘이 들어가다 보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 가사가 ‘나주일광’이라고 들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이 아니라 ‘잃’이 맞는 것이다. 가사는 있는데 음을 들을 수가 없다. 도무지 어떤 멜로디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음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따라 부를 수 없는 완전한 ‘프리스타일’이다. 노래가 아닌 것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


나이 많은 집사님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면 누구라도 웃을 것이다.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물이 나온다. 웃음 대신 눈물이 나오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참는다.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온다. ‘읍읍’ 소리를 내면서까지 참아본다. 어금니를 악물고 안간힘을 쓰며 참고 버틴다.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계치에 다다랐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숨을 결국 내쉬고 말았다. ‘읍~크허헉’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그냥 포기하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분명히 웃긴 상황인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반주도 없고, 좋은 음향도 없는 노래, 악보에 충실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구도 따라서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듣고 왜 눈물이 난 것일까? 그 노래에는 무언가 있다. 평소에 부르던 노래에는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진심이다. 작곡자와 작사가의 노래가 아니다. 연주자의 노래도 아니다. 부르는 이가 자신의 말로 고백하는 자신의 노래다. 진실한 고백이다. 믿음의 고백이었다.


진심으로 부르는 노래, 나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고 말하는 노래, 찬양이다.


찬양하는가?


애굽을 떠나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눈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고 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다. 기적을 보이셨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환호한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기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며 기뻐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한다. 추상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적으로 하나님을 그려내지 않는다. 단순하고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 전에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찬양하는 것이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무엇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의 전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다른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찬양의 내용인 것이다.


믿음으로 부르는 노래, 진심으로 부르는 노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수없이 많이 부른 노래, 가사를 외울 정도로 익숙한 노래다. 그런데 진심인가? 가사대로 고백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긴 첫 사람의 죄, 그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고, 적용하며 사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정하려고 했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그것이 죄다. 쉽게 말하면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창조주의 자리를 넘본 것이다. 사극에서 말하는 왕의 자리를 탐한 죄, 바로 역모이자 반역죄인 것이다. 죽어야 하는 죄인 것이다.


죄인에게 형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대신 감당하셨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대신 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온전히 율법에 순종하신 의를 죄인에게 넘겨주셨다. 대신 받으신 형벌과 넘겨주신 의를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죽을 처지에서 살아난 것이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받은 것이다. 거저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을 믿는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진심으로 찬양한다면 삶은 변해야 한다. 진심이라면, 믿는다면 입으로 말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삶에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노래하는 자리에서, 일하는 자리에서, 운동하고,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서, 심지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살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삶은 터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이다. 곧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삶에서 찬양하는 것이다. 모든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노래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가능한 것이다. 믿어야 온전하게 찬양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거기서’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거기서’를 너무나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막연하게 언젠가 갈 곳이라는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와 관계있는 것 같은데 아직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별로 와 닿지 않는가? 그곳으로 가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감해야 한다.


신앙의 선배들은 거기, 곧 우리의 육체가 죽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있게 되는 날을 기대한 것이다. 비록 육체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야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뵙는 그 순간을 참으로 기다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이자 기쁨의 순간일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하고 소망한 것이다.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우리는 다른 모습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믿는 가장 좋은 곳, 영원한 기쁨과 안식이 있는 곳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소풍을 앞둔 아이의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영원한 시간을 생각하며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믿는 것이고, 소망하는 것이며,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현실의 도피가 아니다. 현실이 어렵기에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아무리 나빠도, 현실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을 대면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에 소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과는 상관없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며, 가슴 뛰게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3)고 말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만 했던 것이 아니다. 메신저 이전에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신자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진심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진심인가 하는 것 말이다. “나는 믿는가”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메신저로 활동할 수 있다. 얼마든지 좋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믿는 신자인가, 내가 전하는 것을 나는 믿는가’하는 것을 말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하고 책망하셨던 예수님의 그 말씀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너희’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 찬양의 자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중략]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멜로디를 따라 가사를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가?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구원의 사실과 감격을 깨닫는가? 우리는 가사를 읽으며 이러한 사실이 머릿속에 그려져야 한다. 그 내용이 떠올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며 진심으로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기적을 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죄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신 사실을 믿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백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입술에서는 진정한 찬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노래가 아닌 찬양 말이다.


비록 음정도 없고 박자도 없으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멜로디로 노래하더라도, 진심으로 믿고 부르는 것이 찬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진심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깨달으며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힘들고 변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녹록하지 않은 하루하루지만 그곳에서 감사와 소망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말이다.


찬양은 멜로디와 음정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며 진심으로 부르는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으로 부르는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자리가 찬양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찬양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잃어버린 진심을 회복하자.
믿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삶에 넘치게 하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노래하는 자리에서, 일하는 자리에서, 운동하고,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서, 심지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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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돈영

김돈영 목사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CTS라디오조이 ‘찬양의자리’ 진행자와 BASE성경교육원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직장선교아카데미’와 ‘군세움프로젝트’를 통해 성경을 강의하며, 다양한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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