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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태어남과 결혼, 죽음 그리고 설교
by 고상섭2020-11-05

본문 안에서 발견한 성경적 명령을, 인간은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주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패턴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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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변증적 설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변증적 설교의 예를 (10월 13일 변증적 설교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살펴보았고, 이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팀 켈러 목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단순히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 안에서 발견한 성경적 명령을, 인간은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주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패턴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한다. 그의 최근 저서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어떻게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고 적용하는지를 예를 살펴보자.


1. 태어남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현대인들은 자녀를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희생하고 싶지 않은 오늘날의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양육하는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5)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양육하는 기쁨이 있지만 또한 마음에 칼이 찔리는 듯한 아픔도 경험한다는 말이다. 부모가 마음의 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녀의 새 생명으로 세상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생명을 양육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희생의 모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실제로 못과 가시에 찔리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르셨다. 이것이 기독교가 부모들에게 주는 위대한 자원이다(‘태어남에 관하여’ 44쪽).


결국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은 복음의 은혜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부모마저도 자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를 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 안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희생하지 않은 문화 속에서, 복음은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 은혜로 내 삶의 정체성을 삼고, 그 은혜로 사람들에게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2.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오늘날 결혼에 대한 두 가지 오해는 결혼자체를 자신의 구원으로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과 결혼을 통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큰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멸이다. 순진무구한 연애 감정에 젖어서 배우자를 맹목적으로 받들어 모셔도 안되지만, 한편으로 너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고역이라고 분노해서도 안된다. 배우자를 우상으로 삼는 것도 위험하고, 배우자를 환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은 결혼관이다.


이 두 가지 오해를 피하려면 복음으로 결혼을 재조정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묘사한다. 배우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인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또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소유하고 있던 남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 오시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부정한 배우자를 사랑하기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는 최악의 배우자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대속적 희생을 통해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악의 문제를 대신지시고 해결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너는 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왔지만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까다로운 배우자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는 최고의 배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계속 나를 덮어 주시며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받은 사랑이 족하기에 나도 당신에게 똑같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배신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인을 은혜로 품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이 우상이 되는 것을 막는 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배우자임을 인식하는 것이고 또한  불행한 결혼생활의 해답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결혼에 관하여’ 69~75쪽)


3. 죽음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경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고 말한다. 즉 소망가운데 슬퍼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잘못된 침입자임을 말해준다.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인데 인간의 타락이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자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만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죽은 소녀에게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얘야, 일어날 시간이다.”라고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이다.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를 깨우는 어머니의 음성과 같다. 예수님은 죽음 저편에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손을 잡으면, 네가 믿음 안에서 나를 알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도 간밤에 단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내 손을 붙들고 있다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그러니 안심하라”


죽음 앞에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실수는 너무 죽음을 크게 생각해서 슬퍼하기만 하거나, 죽음을 너무 작게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유익하지 않다. 성경은 소망 가운데 슬퍼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이다.


조지 허버트의 말처럼 “죽음은 한 때 사형집행인이었으나 복음 앞에서 한낱 정원사로 전락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모든 눈물을 다 씻어질 것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일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의 해답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죽음에 관하여’ 54~58쪽). 

조지 허버트의 말처럼 “죽음은 한 때 사형집행인이었으나 복음 앞에서 한낱 정원사로 전락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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