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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 분노, 살인: 결코 작은 죄는 없다
by 이춘성2020-11-27

살인과 분노에는 그 행위에 앞서는 더 복잡한 근원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6계명을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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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윤리(마 5:21-22)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인류는 폭력을 다양한 형태로 확장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안에 있는 잔인한 폭력의 실체를 십자가를 통해 고발하였고, 이러한 신의 죽음은 인간 폭력의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르네 지라르의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전통 교리와는 결이 다르지만,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제거해야할 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교묘하게 포장된 자기중심성의 폭력이다. 이제부터 제6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통해 은폐된 자기중심성의 폭력에 대해서 파헤쳐 보고자 한다.


1. 제6계명의 원 뜻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다(마 5:21). 이는 십계명의 제6계명이다. 제6계명은 단순한 사고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일어난 살인보다는 의도적인 살인에 적용되는 계명이다. 악의를 품고 죽이는 행위가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에 해당하는 죄이다.


구약성경은 살인이, 첫째는 분노, 둘째는 시기와 미움, 셋째는 정의, 공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이 세 요소는 인간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이었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창 5).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 때문에 분노하였다. 그리고 그 탓을 동생 아벨에게 돌리며, 아벨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결국 동생 아벨을 죽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의롭지 않고 불공정하게 대했다는 자기 합리화가 있었다. 이러한 분노의 성격에 대해서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분노는 단지 감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고도의 이성적인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가인이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는 이유를 수용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면,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살인과 분노에는 그 행위에 앞서는 더 복잡한 근원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6계명을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6계명은 단지 단죄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법이란 처벌 보다는 죄와 고통을 막기 위한 경고의 차원이 선행한다. 하나님도 6계명을 사람들에게 주셨을 때, 살인자를 처벌하기 위한 단순한 의도보다는 살인을 막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상대의 생명과 존재를 보존하고 귀하게 여기길 원하셨다. 6계명은 살인을 일으키는 악한 의도인 분노, 미움, 불공정과 같은 사람 속에 은폐된 살인의 씨앗, 그 악한 의도를 제거하는 것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2. 악한 의도

예수님은 산상설교(21-22절)에서 살인의 세 가지 악한 의도를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헬라어 원문의 순서에 따라 번역해 보았다. 이를 보면 시의 운율처럼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선조들에게 한 말을 들었다. “살인하지 마라”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살인한 사람은 
법정에서 유죄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의 형제에게 분노하는 모든 사람은 
법정에서 유죄다.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그의 형제에게 말하면, ‘라카’
산헤드린에서 유죄다.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말하면, ‘모레’
불의 지옥에서 유죄다.


본문의 배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유죄”라는 공식적인 판결을 각각의 조건문 뒤에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예수님은 ‘살인’, ‘분노’, ‘라카’, ‘모레’, 모두 십계명의 제6계명을 어기는 중대한 죄로 가르치셨다.


3. 탐정 예수님


위의 각각의 죄목과 판결을 하나의 사건에 대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배열과 접근은 마치 형사나 탐정이 살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추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살인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노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은 누군가 어떤 사람을 향해 ‘라카’라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 또 다른 원인은 어떤 사람을 향해 ‘모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보’, ‘미련한 놈’ 등의 뜻의 ‘라카’, ‘모레’라는 욕을 들은 사람이 화가 나서 살인을 했다는 뜻일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답이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면, 답은 달라진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살인자’, ‘분노자’, ‘라카라고 말한 자’, ‘모레라고 말한 자’가 모두 재판정에서 유죄로 판결을 받았다. 이들이 동일 인물이라면 살인자는 욕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욕을 한 사람이 된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살인 동기들의 순서를 거꾸로 배열해서 살인을 재구성해 보자. 먼저 살인자가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한 말들을 보면, 살인자는 평소에 피해자에게 ‘라카’, ‘모레’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라카’(רֵיקָא)는 ‘속이 빈’, ‘머리에든 것이 없는’, ‘무가치한’, ‘바보’ 등의 뜻이다. 특별히 이 단어의 시리아어 기원을 보면, 라카는 노예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라카는 주인이 종을 인간 이하의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면서 “거기, 너 바보 같은 놈” 혹은 “이 쓸모없는 놈”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모레’는 우리말로 하면 ‘천치’에 가깝다. 신체보다는 정신적 장애를 지닌 장애인들을 빚대어 사용하는 모욕적인 욕설이 ‘모레’였다. 당시에 그리스에서는 장애를 지닌 자녀가 태어나면 들에 버리도록 법으로 정하였고, 고대 시대에 장애인은 사탄의 하수인 등으로 취급받았다. 이러니 이 같은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은 사람이 얼마나 격분하고 원통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유죄로 판결받은 사람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면, 분노하고 살인한 사람이 욕설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욕설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4. 자기중심성의 폭력


일제 강점기 동안 일어난 항일 투쟁과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다루었던 “암살”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중반부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급하게 길을 건너다 일본군 장교와 부딪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장교는 사과하는 여자아이를 향해 감히 너같이 하찮은 존재가 고귀한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있느냐는 표정과 분노를 발산하면서 아이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적 상상력과 극적 효과를 위한 의도였겠지만, 이 장면은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의 잔인한 폭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예로든 살인자는 어린아이를 죽인 장교처럼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욕하며, 살인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인의 실행이 없었을 지라도, 살인에 필요한 조건은 모두 충족된 상태였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자리하고 있다.


5. 생명의 주관자


더하여, 죽여도 된다는 최종 판단은 단지 감정에 따른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분노한 살인자의 말하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살인자, 분노자는 상대에게 자신이 신적 권위가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였다. 그 이유는 앞의 21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말하다εἶπον’와 이후에 살인자와 분노자가 형제에게 라가와 모레라고 말하는 것(εἶπον)이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eipon(εἶπον)이란 이름을 지어주거나 권위자가 선언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단어를 하나님이 십계명을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실 때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로 21절에서 사용하셨다. 그런데 분노자이자 살인자가 형제에게 ‘라카’, ‘모레’라고 욕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을 창조자 하나님처럼 여기거나,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하는 정당한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말씀하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선언과 정반대이다. 이들은 사람을 향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제각기 규정하고 판단한다. 이들은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면서 인간 이하의 표현과 욕설을 사용하고, 분노를 서슴없이 표현하며, 이런 분노와 욕을 얻어먹는 것은 저들의 행실로 볼 때, 정당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의 폭력은 스스로 자신을 거짓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향해, 하물며 자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인간에게도 ‘너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죽게 하셨다.


6.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마지막으로 살인이라는 행위와 분노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분노하는 것과 남을 나보다 더 열등하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말을 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일까? 많은 사람은 그래도 살인이 더 큰 죄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예수님은 살인과 그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지방의 심판관에게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카’라고 말하는 자는 대법원이라 할 수 있는 최고 판결 기관인 산헤드린 법정에서 유죄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모레’라 말하는 자는 불의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형벌이 더 강해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는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사람을 차별하고 미워하는 태도와 말들, 그리고 사람을 무가치란 존재로 규정하는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말들이 살인 죄 만큼이나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 전, 네이버에서는 스포츠 기사에 댓글을 잠정적으로 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연예인들의 기사에 댓글을 달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한 여자 배구 선수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 한 사건 때문이었다. 또한, 이전에 걸 그룹의 한 여자 멤버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와 막말이 이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특정한 살인자는 없을지라도, 이는 분명히 살인이다. 또한 우리도 이런 종류의 은밀한 살인에 참여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규정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악한 습관이 이들의 행동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런 죄를 살인보다 결코 작다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 윤리는 작은 것을 작게 여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향해, 하물며 자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인간에게도 ‘너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죽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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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기독교 공동체 운동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지금은 광교산울교회 협동목사와 고신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 겸임교수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