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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와 ‘공개’를 통해 살피는 복음생태학
by 김돈영2020-12-19

누군가는 나로 인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와 함께 했기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혀 의도 하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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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확인하는 숫자가 심상치 않다. 요 며칠 언론에서는 연일 집단 감염 사례를 언급하며 확진자 수가 심상치 않음을 보도한다. 정부에서는 더 크게 확산하지 않도록 철저한 마스크 착용과 모임 자제 등 방역을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다. 상황에 따라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를 격상하는 등 강제적인 조치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저 지금 검사받고 왔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마디, ‘검사’라는 짧은 단어에서 전해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뭔가를 물어볼 여유도 없다. 머릿속은 멍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냥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무실 직원 한 명이 확진 판정을 받는 바람에 후배도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나 또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후배는 엊그제 일 때문에 간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다. 물론 마스크를 썼고 별다른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손을 맞댄 것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고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별일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쉽게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며 여러 상황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배가 음성으로 판정받는다면 당장 눈앞에 있는 고민은 사라진다. 하지만 양성의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감염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상황이 머리에 그려진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며칠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다. 내 상황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와 함께 했기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혀 의도 하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실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 누가 사람을 만나러 다니겠는가, 누가 감염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전파하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염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전파자일 것이다.


‘전파자’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특히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 목회자의 직분을 감당하기에 더욱 그렇다.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등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전달하는 시간이 좀 더 많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과 신학적인 지식, 삶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 등 다른 이의 신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전달하는 것이 바른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바른 것을 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애쓰고 노력할 뿐 완전하지는 않다. 아니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언제나 바르지 않은 것, 복음에서 벗어난 것을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바이러스 전파자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바른 신앙에 서 있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크건 작건 사람은 누구나 주변에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에서부터 자주 다니는 마트와 커피숍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전파하는 것이다. 곧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 바른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수시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일 말이다.


내게 있는 것이 전파된다


신앙의 점검은 언제나 성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한다. 다른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갈 1:7)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그 무게중심을 그리스도가 아닌 곳으로 슬쩍 옮기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인 양, 숨겨진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이 호들갑 떤다. 지금껏 없었던 것이라고 방법을 제시한다. 세련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옮긴 정도가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다. 단 0.001만큼이라도 옮겼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일 것이다. 올바른 복음은 순도 100%,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바른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한 ‘다른 복음’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다른 모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끝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을 뿐이다. 무증상 감염자일 뿐이지 감염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구별할 수 없는 것, 무게중심이 그리스도에게서 살짝 옮겨진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살필 수밖에는 없다. 나를 확인하고, 주위를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유명한 누군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온라인과 유튜브에 쏟아지는 정보와 설교자들의 설교를 무턱대고 믿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매 주일 듣는 설교에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교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누구라도 바른 복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들은 말씀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바울의 말이 정말로 맞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행 17;11)는 태도가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바른 복음 앞에 서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가?


로마서 3장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난 것을 하나씩 개혁하는 것이다. 죄인의 생활을 정리하고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돌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시간, 그 유효기간이 너무도 짧다는 사실이다. 머지않아 또 집을 나가는 불량한 자녀라는 것이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한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죄인을 살리신 이의 법은 ‘오직 믿음의 법’(롬 3:27)이며,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롬 3:28)하고 의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흐려지지 않도록 ‘틈을 주지 말라’(엡 4:27)고 바울은 말한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도록,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로서 말이다. 바른 것을 가지고 바른 영향을 끼치는 선한 전파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동선이 공개된다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은 내가 ‘어딜 갔었더라’ 하는 것이다. 동선이 공개되는 것이다. 감염자는 그의 동선을 파악한다. 동선을 파악하여 다른 감염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역하는 것이다. 동선이 밝혀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고 큰일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감추었던 비밀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남에게 보여주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 있다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분에 맞게 행동했는지, 거짓으로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행적을 감추거나 다르게 말하는 또 다른 불법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느 곳을 다녀야 하는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스스로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동선이 매일 같이 공개된다면 어떻겠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가? 아니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지금껏 다녔던 곳의 발걸음을 끊고, 그 흔적을 서둘러 지울 것인가?


누군가 보고 있기에, 동선이 드러나기에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면 스스로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어떤 다스림을 받는가?


동선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식하는 것인가? 사람들의 이목, 그동안 만들어 온 이미지, 체면 등 주변을 의식하는 것이다. 공개하는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세상의 눈에 통치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면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건을 사거나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혹은 어떤 목적을 위해 다녔든지 모든 행적이 투명한 유리보다 더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실내에 있든지 실외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혼자서 있든지 말이다. 시간과 장소의 제한이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오픈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숨길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마음의 생각까지도 낱낱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에 나만의 비밀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오래전 보았던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의 주인공 트루먼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은 생중계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일상이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기에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행동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든 행동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겠는가. 혼자 있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사에 보는 눈을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고, 나만 아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트루먼 쇼의 주인공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완전히 공개된 공간, 드러난 동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선포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있어야 한다. 날마다 매 순간 계속되어야 한다. 내 입술의 선포로, 내 믿음의 고백으로 말이다. 그럴 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하며 나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결단했던 요셉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동선이 공개되어 돌아올 비난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날의 심판을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만 한다.


날마다 발버둥을 치다


감사하게도 음성으로 판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가 되지 않았고, 숨기고 싶은 ‘동선 공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상황을 인식하고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언제라도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동선이 공개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코로나19의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파자’가 되는 것과 ‘동선 공개’는 그 시한이 없다. 이 땅에서 숨을 쉬는 순간까지는 날마다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파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남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한 삶이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어진 마땅한 일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말씀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 날마다 발버둥을 치자!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도록,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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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돈영

김돈영 목사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CTS라디오조이 ‘찬양의자리’ 진행자와 BASE성경교육원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직장선교아카데미’와 ‘군세움프로젝트’를 통해 성경을 강의하며, 다양한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