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남자를 진짜 남자로 만든다
by Marshall Segal2021-09-18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랑할 때 지고 있는 짐은, 진짜 무겁지만 이상하게도 가볍게 느껴진다(마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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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되는 역사든 아니면 지나간 과거의 역사이든, 가장 놀라움을 주는 남자는 어김없이 끈질기게 사랑하는 남자이다. 전 세계 다양한 남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존심, 돈, 명성과 명예, 권력 등 그 많은 것을 성취하며 살아간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희생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몇몇 이상한 남자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런 남자들 또한 열심히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하지만 다른 남자들의 이익, 특히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친다. 


사도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봉사의 직무와 관련해서 제자로 삼았을 때, 그는 이렇게 명령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이 구절 속 여러 자질들이 젊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그 자질들이 특히 하나님의 더 나은 남자가 되기 위한 단순하지만 도전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울 사도가 그의 제자에게 이 짧은 목록을 읽어주는 것을 우리가 옆에서 들었다면, 그가 사랑에 대한 부분에 이르러서 말하는 속도를 늦추고 특별히 그 부분을 강조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없어서는 안 되는 야망


왜 그렇게 생각할까? 바울이 편지를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전적으로 당신이 사랑의 남자가 되고 다른 남자들을 그 사랑으로 더 나아가게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가 정의한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넘치고 확장되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기쁘게 충족시키는 것”(The Dangerous Duty of Delight)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디모데야, 하나님 안에서 너희가 자라가고 넘치고 필요한 것을 채우는 기쁨으로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여라. 당신의 삶으로 그들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라.’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벧전 4:8).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사랑은 한 남자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고, 구속하셨고, 준비시키고, 변화시키고,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자에게서 흔히 보는 모습은 이기심, 성적 부도덕, 더러움, 우상 숭배, 시기, 분냄, 다툼, 분열, 분열, 시기, 술취함이다(갈 5:19-21).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남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정면으로 대면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이처럼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의 남자로 구별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을 추구하는 남자라면 없어서는 안 되는 야망이다. 


진짜 사랑이 하는 것


진정으로 사랑해 본 사람은 사랑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바울은 인간관계에서 사랑이 얼마나 쉽게 시들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 속에서도 보고 느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다루지만 아마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결핍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사랑 장”으로 흔히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결혼 생활을 기대하며 즐기는 신혼부부를 위해 쓰여진 게 아니다. 이기심과 분열에 깊이 오염된 교회, 즉 사랑은 식었지만 자신은 성숙했다고 착각하는 기독교인을 향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상상하는 자기 아첨에 불과한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그리고 7절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하는 하나의 테스트를 제공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모든 것을 참는 남자


사랑의 남자는 관계에서 책임을 포기하거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들은 참으며 기쁨으로 사랑한다. 사랑의 남자는 다른 이의 짐을 기꺼이 지고 그들이 나를 실망시키거나 상처를 주거나 기분을 상하게 할 때조차도 그들의 짐을 함께 짊어진다. 


하나님의 남자는 칭찬이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을 감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 즉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게 보일 수 있는 일까지도 감당한다. 그럼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얻기 때문일까? 더 놀랍게도, 그는 성급하지 않을 뿐 더러 인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필요와 불쾌감까지도 지속적으로 참는다.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게, 그리고 친절하게 대한다(고전 13:4-5).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랑할 때 지고 있는 짐은, 진짜 무겁지만 이상하게도 가볍게 느껴진다(마 11:30). 그는 대부분의 다른 남자들 보다 더 많은 은혜로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짐을 져야 할까? 당신이 결혼했다면 그 짐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아내와 자녀의 일상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요구 사항에 얼마나 민감한가? 그러한 요구를 짊어지는 데 있어서 요구받는 이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가족의 특정한 약점과 죄를 얼마나 잘 견디고 있는가? 그렇게 가정에서 충분한 공급을 마친 후 거기서 끝나지 않고 교회와 이웃,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두신 다른 모든 곳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당신 자신 속에 있는 기쁨과 가정을 통해 넘치는 그 기쁨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짊어져야 할 짐이 비교적 적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라. 우리 모두는 다 필요에 둘러싸여 있다. 독신은 종종 우리가 결혼한 남자들보다 더 집중력을 가지고 짐을 져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전 7:32-35).


믿는 남자


사랑은 또한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믿는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순진하고 나아가서 무모하고 무책임하게까지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남자는 세상 남자들과 달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확실히 알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할 때, 사랑이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을 다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도 그렇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 가장 최선의 면을 믿는다. 달리 말해서, 다른 이들의 생각과 욕망 그리고 동기가 불분명할 때, 사랑은 최악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경멸하면서 종종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죄는 무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냉소주의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전혀 지혜롭지 않다. 그것은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심각한 형태의 사랑 결핍이다. 물론 사랑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그러나 사랑에 분별력만 필요한 게 아니다. 경건한 분별력이 자라고 연단될수록 사랑은 줄어들고 쪼그라드는 게 아니라 도리어 점점 더 풍성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력은 신중하고 깊이 생각할 뿐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깊이 느끼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죄와 맞설 준비까지 되어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바른 분별력은 결코 다른 사람 속에서 악을 찾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최선의 모습으로 믿기 위해 가장 애를 쓰는 대상이 누구인가? 배우자나 룸메이트, 자녀나 부모, 동료, 학우, 또는 이웃 중, 누가 은혜를 베풀기에 가장 꺼려지는가? 하나님의 남자는 진리를 기뻐하고(고전 13:6), 진리가 불확실할 때에 조차도 모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의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할 때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싸우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한다”(벧전 4:19). 


소망하는 남자


하나님의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보고 믿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소망한다. 이런 복스러운 소망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와 같이 수직적인 소망뿐 아니라 동시에 크고 행복한 소망에 뿌리를 둔 끊임없는 수평적 소망이기도 하다. 선한 남자는 다른 사람의 실패나 불행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은 시기심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성공하고 열매를 맺고 번성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특히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라면, 그 기쁨은 배가가 된다. 


바울은 이 수평적 희망에 대해 그리 자주 이야기하지 않지만 고린도후서 1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질”(고후 1:8) 정도의 상황에까지 처했지만,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에 있는 형제들이 잘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처한 현재가 점점 더 나빠질수록, 바울은 다른 형제들의 미래가 더 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 큰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남자는 바울처럼 생각하고 소망한다. 


따라서 모든 관계에서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라. 최고를 위해 기도하라. 다른 사람의 삶과 미래를 개선하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 남이 잘될 때 탄식하는 이기심과 경쟁심을 버리고,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은사를 사용하고 높이시는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하라.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남자는 기뻐할 이유가 워낙 많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행복한 남자다. 그런 남자가 누리는 기쁨은 자신의 성공, 성취, 기회에 국한되지 않고, 도리어 다른 사람의 기쁨에 의해 촉진되고 강화된다.


인내하는 남자


이런 남자들의 사랑은 짐을 그냥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계속 진다.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느끼며 떠나고 난 뒤에도 사랑의 남자는 남아서 견딘다. 


거짓된 사랑은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이 빨리 시들고 금방 사라진다(막 4:17).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저항을 만났을 때 단지 인내를 나타낼 뿐 아니라 실제로 더 큰 인내를 만들어낸다(롬 5:3). 이런 남자는 특정 관계에서는 필요할 때 분명한 경계를 정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참는다. 그들은 다르게 사랑하고 오래도록 사랑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이런 사랑의 질과 관련해서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렇게 썼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힘차게 환난을 이겨내는 것은 바로 군인의 인내심이다. 사랑은 압도되지 않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자답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린도전서 주석).


많은 남자가 자신을 “어떤 어려움”이라도 견뎌내는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또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서 상상하고 싶겠지만(마 26:35),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처럼 한낱 여종 앞에서 조차도 굴복하는 나약한 존재이다(마 26:69-70). 우리는 길에 놓인 어떤 특정한 어려움 앞에서는 항상 투덜거리고 포기하며, 또한 사랑이 요구하는 사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편리한 변명을 하곤 한다. 너무 피곤해서, 너무 바빠서, 나도 할 일이 있는 남자인데, 이미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니야? 등등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렇다면 당신으로 하여금 떠나도록 유혹하는 것은 무엇인가? 죄인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남자는 누구나 다 포기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모든 이유를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처럼 용감하고 희생이 따르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서 또는 친구 관계와 교회 생활 그리고 전도의 사명에서 인내와 기쁨을 가지고 짐을 지려는 마음이 약해졌을 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를 버려도 되는 이유가 얼마나 많았었는가 하는 점이다(히 13:5, 8).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한, 결코 그 어떤 남자도 떠나거나 포기하는 남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 


죽는 남자


자기 자신에 대한 죽음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명시적으로 나열되지는 않았지만 5절에서 우리는 최소한 이러한 종류의 희생을 엿볼 수 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종종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자신의 필요, 자신의 욕망, 때로는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좋고 가장 현명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도 죽는 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를 올려다보고 사랑 장 너머로까지 시선을 넓힐 때, 무엇보다도 남자가 되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남자다움(loving manhood)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놀랍고 남성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남겼다.


견디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편안함과 편리함을 포기해야 한다. 믿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 소망하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야망이 사라져야 한다. 지속되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죽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남자는 항상 죽는 남자며, 죽기를 행복해 하는 남자다. 그들은 죽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히 12: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남자는 사랑하고 참 기쁨을 위해서 기꺼이 죽는다. 




원제: Love Makes a Man a Man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그렇기에 사랑하는 남자는 항상 죽는 남자며, 죽기를 행복해 하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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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