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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결혼식을 넘어 왜 칭의는 거룩함을 향해 가는가?
by Marshall Segal2021-11-03

칭의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희망도, 생명도 그리고 미래도 없다. 그러나 단지 칭의 하나가 우리의 생명은 아니다. 칭의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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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하는 날, 나는 꽤 오랜 시간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려서 기다림이 아픔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그렇게까지 결혼식을 미룰 필요가 없었다.


마침내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결혼식을 올리던 날, 그 날은 다른 어떤 날보다도 훨씬 더 밝고 찬란하며 강렬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해서 불안한 마음마저 느끼게 하는 일출처럼 말이다. 굳이 그날의 사진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결혼식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기억이 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복도에 서 있던 열 살 소년, 남보다 먼저 찬송가 첫 소절을 불러버린 성경 봉독자, 강대상 앞에 서서 신부를 기다리던 순간의 느낌 그리고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등 모든 것이 생생하다. 만일 예고에 없었던 비가 내려서 모든 참석자를 적시고 결혼식 장식을 다 망쳐 놓았다고 해도, 그런 비조차 우리에게는 결혼식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결혼식은 평생 함께 춰야 할 행복한 춤을 어색하게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결혼 생활에는 결혼식과 같이 찬란한 날은 없다. 처음 얼마 동안과 같은 신혼의 즐거움도 거의 없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기쁨이 단지 그날 하루의 기억으로 국한된다면 그 얼마나 비극적인가? 아내와 내가 결혼식 사진을 볼 때만 행복을 느낀다면, 결혼 생활 내내 사진 속의 행복만을 되새기며 평생을 보낸다면 그건 어떤 결혼일까? 부부가 결혼식의 아름다움을 넘어 실제 결혼 생활의 꾸밈없고 짜릿한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토록 오랜 시간 결혼을 기다렸는데 단지 아름답게 치른 결혼식에만 만족하고 산다면 그건 과연 올바른 결혼 생활일까?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십자가와 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지 궁금하다. 


결혼식을 넘어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분,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죄가 있던 자리를 완전한 의로 채우신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런데 마치 죄를 씻음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해주는 전부인 양, 그 칭의를 되뇌는 데만 열중하며 여생을 보내기도 한다. 착각하지 마라. 십자가는 우리에게 결혼식(altar)이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는 중심이자 결정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이며, 사탄과 그의 모든 군대에 치명타를 가한 역사의 타오르는 절정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결혼식이지 결코 결혼 생활이 아니다. 


칭의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희망도, 생명도 그리고 미래도 없다. 그러나 단지 칭의 하나가 우리의 생명은 아니다. 칭의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 훨씬 더 많은 영광으로 가는 관문, 그리고 점점 더 넓어지는 은혜의 초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작점이다. 하늘나라 반대편에 있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보물 중 하나는 우리가 더욱더 그분을 닮아가도록 만드시는 일, 곧 하나님이 이끄시는 변화의 역사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깊고도 놀라운 일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사는 기회, 즉 점점 더 거룩해지는 그 성화의 기회를 지금 누리고 있는가? 


이 거룩함은 필수적이다. 그 누구도 성화됨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히 12:14). 이 거룩함은 가장 수준 높은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는 즐거움을 품고 있기도 하다. J.C. 라일(J.C. Ryle)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해도, 거룩함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확신하며 느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도 또한 빼앗을 수도 없는 견고한 위안이 있다.”


대신 값을 치르신 은혜


칭의(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실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야 하는 죄인이 죽음 대신 은혜의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남김없이 받아야 하는 죄인이 분노 대신 끊임없이 계속되는 평화를 맛보게 되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들어감(접근, access)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자. 많은 사람이 정보에 접근하고, 자원에 접근하고, 서로에게 접근하는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경이로운 특권의 중요성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작고 보잘것없으며, 또한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죄를 짓고, 거기에 더해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스스로 그 전쟁을 감당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지옥 불 못에 던지지 않으시고 대신 당신의 아들을 지옥 불 속에 보내어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삼아 주셨다. 


갈보리에 선 텐트


이런 평화가 주는 영광,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접근과 칭의의 영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단지 십자가라는 시작점을 떠나지 않은 채 그 순간만을 복음의 유일한 영광으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갈보리에 텐트를 치고 살라고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다.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과 또한 앞으로 만날 새로운 세상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룩함으로 채우기 위해서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불타 죽지 않고 기쁨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며 영원토록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 따라서 칭의의 영광은 끝없이 계속되는 성화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복음의 영광 중에서 성화는 가장 쉽게 간과될 수 있다.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강조하며 칭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행위 또는 공로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라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칭의를 옹호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은 진정한 성화를 기뻐하고 촉구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칭의와 평화 그리고 접근이라는 밝은 별이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에 떠 있는 유일한 별이 아니다. 그는 칭의(결혼식, 제단, 선언)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가 더 원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보고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 때, 그는 우리를 계속해서 더 깊은 결혼 생활로 이끄신다. 


다만 이뿐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1-4). 다만 이뿐 아니라, 이 말이 이 구절에서 부담이 되는 부분이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은 용서뿐만 아니라 성품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다. 칭의뿐 아니라 성화이다. 용서뿐 아니라 변화이다. 결혼식뿐 아니라 결혼 생활이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단지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제한하지 말라. 


우리는 이 칭의와 성화의 별들이 디도서 3장에서 다시 정렬되는 것을 본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우리가 이룬 그 어떤 공로도 하나님의 관심이나 개입을 얻어낼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의 크신 자비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그러니까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지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행위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인한 것이니 우리는 더더욱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서 바울은 이렇게도 썼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 의롭게 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 성화가 아니라 단지 칭의만 강조하는(celebrate) 것은 복음을, 십자가를, 은혜를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반쪽으로 만드는 일이다. 역사상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전파하고 보존하기 위해 싸웠지만, 그에겐 단지 칭의가 목적이 아니었다. 칭의는 그를 다른 어딘가로 몰아갔다. 바울은 자신의 죄를 없애는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된 자신이 더 큰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했다.


사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이 피로 사신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충만한 거룩함을 소중히 여겼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매 맞을 때도 기뻐할 수 있었다. 강도를 당하고 굶주림과 궁핍 속에서도, 더불어 배신당할 때도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 역경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하나로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난이 믿음을 만날 때, 고난의 불이 경건의 풍성함을 낳고 그를 연단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은 결혼식을 아름답게 한다


칭의는 이처럼 우리를 성화의 영광으로 이끈다. 동시에 영광스러운 성화의 체험은 우리를 더 깊은 칭의의 영광으로 인도한다. 로마서 5장에서 이 순서가 어떻게 끝나는지 주목하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소망은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께 속해 있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더 깊고 더 강한 확신이다. 


그리스도 닮아가기를 추구하고, 그리스도와의 닮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칭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성숙해지는 경건함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이 실제로 내 안에 거하신다는 또 다른 간증이기도 하다. 거룩함은 소망에서 흘러나올 뿐만 아니라 실제로 더 큰 소망을 낳기도 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행복한 결혼은 결혼식을 더욱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결혼식을 잊으면 안 된다. 결혼 생활 자체도 놓쳐서는 안 된다. 용서와 평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접근이라는 이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원제: Don’t Miss the Marriage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 의롭게 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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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