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

참음,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
by 김형익2021-11-12

참음의 아비투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말 보다, 삶과 삶의 방식으로써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표가 되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우리는 승리주의적 사고 체계로 기독교와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기가 너무 쉽다. 승리주의적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표는 성공하는 것이고 1등이 되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사고 체계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부합하지 않으며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는 무엇일까?


초기 교회의 아비투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허용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의 초기 교회는 무엇을 그리스도인의 표로 여겼을까? 앨런 크라이더(Alan Kreider)는 그의 책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에서 끈기 있는 인내(참음)의 발효가 초기 교회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 참음의 덕은 복음 증거라는 대전제 아래서 전략적으로 행해진 수단이 아니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았던 세상 앞에 보여준 기독교 고유의 경이로운 삶의 특징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따라 행하고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는 참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적대적 불신 세상 앞에 참음의 덕 즉 ‘아비투스’를 보여주었다.


아비투스(habitus)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사회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했다. 이 용어는 후천적인 배움을 통해서 무의식 중에 또는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되면, 아비투스는 바깥 세계에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된다. 


참음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번영신학의 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역설을 보여준다. 초기 교회는 신약성경이 많은 곳에서 참음(인내)을 믿음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마 10:22; 24:13; 막 13:13; 눅 8:15; 21:19; 롬 8:25; 딤후 2:12; 히 10:36; 12:1; 계 13:10; 14:12 등). 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초기 기독교는 참음 곧 인내를 믿음의 본질이라고 이해했다. 256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가 쓴 글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의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를 우리의 옷이 아닌 진리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덕을 그것에 대한 (말의) 자랑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알아본다. 우리는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살아낸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과 예배자로서 영적 경의를 지니고 우리가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인내를 보여 주자. 그 덕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공통점을 갖는다.” 실제로, 참음의 아비투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말 보다, 삶과 삶의 방식으로써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표가 되었다.


고대 로마 사회가 대개 참음에 대해 싫어도 참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하층민들이나 희생자들의 태도라고 인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초기 기독교가 참음을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로 여겼다는 점은 마케팅의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참음의 아비투스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게다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세례를 주기 전까지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가 형성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아비투스의 교육에는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세례를 받기까지는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음의 아비투스를 배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아비투스였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됨의 아비투스


바울은 1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행 18:1-12). 하지만 슬프게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이 들이닥쳤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바울은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고생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바울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참 사도라면 저렇게 고생하며 살 수 있겠는가?” 바울은 자신이 거짓 교사들에 비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말함으로써, 자기가 보기와는 달리 매우 훌륭한 사람의 외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의 참됨을 입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는 너희가 보는 대로, 여전히 가는 곳마다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내가 전한 복음은 유일한 진짜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참음’으로 이 고난의 삶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표적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참음’을 말했다는 것은 참을성이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의아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이 구절에서 ‘모든 참음’이 사도의 표적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모든 참음’의 태도로 사도의 표적들을 행했다는 뜻인지는 논란이 있다. 나는 ‘모든 참음’이 바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도됨의 표적이었다는 칼빈의 해석에 동의한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 행함이야 누구나 당연하게 예상하고 동의할 수 있는 사도의 외적 표적들일 수 있었기에, 사도는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외적 표적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기서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도의 표적은 ‘모든 참음’이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주는 모욕을 견뎠다. 그는 또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을 참았다(고후 4:8-9).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4-10절)과 11장(23-29절)에서 자신이 참고 견뎌야 했던 일들의 목록을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연민의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도리어 복음의 역설을 통해 복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바울의 방식을 보여준다. 바울은 단지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영적 자녀들이 복음의 본질을 알고 그 본질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참음’을 사도의 표라고 말한 것이다. 1세기 고린도교회에 가만히 들어왔던 거짓 교사들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었다(고후 5:12). 고린도 사람들에게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외적 조건들은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이 참된 복음이라고 믿게 하는 설득력 있는 조건들이 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메시지)의 영광스러운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복음을 담지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의 별 볼일 없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려는 사도의 아비투스는 모든 참음이었던 것이다.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


우리는 참을성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튜브를 1.5배속 또는 2배속으로 돌려보는 시대이다.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근대선교역사만 보더라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같은 선교사들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원하기만 하면 초고속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대를 경험하고 살아간다. 목사들은 경쟁 사회에서 더 빠른 속도로 성장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1970년대 교회성장의 물결을 타고 메가처치들이 등장하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내세우면서, 한국 기독교에서 참음의 아비투스는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인됨을 바깥 세상에게 경이롭게 보여주고 있는가? 성공과 1등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인됨을 증명하려는 유아적 승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아비투스인 참음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참음’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초기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인 참음, 즉 인내의 발효가 초기 기독교의 성장 동력이었다는 앨런 크라이더의 말을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참을성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튜브를 1.5배속 또는 2배속으로 돌려보는 시대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