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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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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aclyn S. Parrish /  작성일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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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abella James

‘듄’은 우주를 (정치적, 경제적, 영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이나 그 우주에서 살아가는 개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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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걸작이다.” “압도적이다.” 영화 홍보에 남용되기 일쑤인 이 단어들이 드뉘 빌뇌브의 영화 ‘듄’(Dune)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은 “부드러운” SF와 복잡하고 난해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낸 걸작이다. 그리고  빌뇌브는 놀랍게도 이러한 원본 소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원작 소설과 비교해서 떨어지기 마련인 디테일을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촬영시와 상연시의 화면 비율 조정 기법]로 보완한다. 그리고 허버트가 그린 세계의 미세한 부분 중 일부가 지나치게 넓은 획으로 그려졌다면, 빌뇌브는 스토리의 방대한 규모를 아름답게 포착함으로 그 부분을 해결했다. 


인류 미래의 수천 년을 배경으로 한 ‘듄’은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삭)과 아내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의 외아들인 젊은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의 이야기이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파디샤 제국과 이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복잡한 행성간 봉건 체제 속에서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이다. 이 때문에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표적이 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에게서 위협을 느낀 파디샤 제국의 황제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천적인 하코넨 가문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다. 결국 폴은 이 배반의 잿더미를 뚫고 빠져나와야 한다. 


허버트가 그린 세계는 인상적인 인물과 배경으로 가득 차 있지만, ‘듄’은 우주를 (정치적, 경제적, 영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이나 그 우주에서 살아가는 개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을 따라가라


‘듄’을 움직이는, 마치 돈과 같은 힘은 스파이스에서 나온다. 인류에게 가장 귀중한 상품인 스파이스는 사막 행성 아라키스에서만 나온다. 스파이스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더 많은 먹으면 어느 정도의 예지력까지 생기게 해준다. 스파이스가 없으면, 성간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그러면 결국 그렇게 우주를 지배하는 제국도 붕괴될 것이다. 스파이스 거래를 서로 나눠 쥐고 있기 때문에, 성간항행길드(Spacing Guild)는 성간 여행을 독점하고 , 파디샤 제국 황제 샤담 4세는 봉건제의 최상위 지위를 유지하고, 하코넨 가문 일족들은 듄(아라키스)의 군주로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금권의 발판을 유지하고, 수많은 유력자들은 막대한 돈을 번다.


허버트의 의도는 거의 확실하다. 그는 듄의 스파이스 거래를 화석 연료에 대한 서구의 착취 무역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으며, 이 비유가 드러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수천 년이 흐른 미래에도, 우리의 본거지인 이 지구가 오래 전에 시간과 재앙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난 뒤에도, 인류는 여전히 이 지루한 게임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유럽의 왕과 교황은 정치적 경쟁을 성전(holy war)으로 위장했다. 18세기에 미국 남부의 번영은 노예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21세기에 사람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노출된 채 일하는 저임금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만든 값싼 서양식 옷을 입고 산다. 수천 년 후에 파디샤 제국도 사막 행성 하나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바뀌는 건 없다. 


신화와 조작


‘듄’을 움직이는 금권의 역학은 상당히 단순하지만, 사실 더 미묘하고 교활한 다른 세력이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 착취로 금권을 장악하는 세력에게 가하는 허버트의 비판이 예리하다면, 교묘한 종교에 취하는 그의 태도는 신랄하다. 


‘베네 게세리트’는 기나긴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인류의 정치를 움직이고 있는 여성들로만 이뤄진 유사 종교 집단이다. 신중하게 계획된 혼인, 유전자 조작, 때로는 전략적 유혹을 통해, 이 집단은 가장 유력한 가계의 혈통을 조작하여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 ‘퀴사츠 헤더락’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렇게 선택적 번식을 통해 태어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메시아는 시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을 소유할 것이며,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에도 인류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할 것이다.  


이 집단은 심지어 수 세대에 걸쳐 퀴사츠 헤더락이 도래할 것이라는 소식을 온 우주에 퍼트렸고, 그 메시아 강림의 예언을 수많은 사회의 문화적 기억 깊숙한 곳에 심었다. 사막 행성 아라키스의 모래 언덕(듄)에서, 폴은 이 행성의 선주민 프레멘 부족이 자신을 ‘리산 알 가이브’라고 부르며 메시아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라키스 부족은 리산 알 가이브가 자신들을 압제자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고, 더 나아가 아라키스 사막을 파라다이스로 바꿀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폴은 자신의 태생에 환멸을 느낀다. 


“이 사람들은 보도록 세뇌된 것만 볼 뿐이에요” 프레멘 순례자들이 자신에게 모여 들자, 폴은 어미니 레이디 제시카에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신화의 불행한 운반자이다. 폴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젊은 아트레이데스에게는 누군가의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적들에게 쫓기고, 사막에 버려진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트레이데스 동맹군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탈주한 상태에서 폴과 그의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고는 프레멘 부족뿐이다. 그리고 이 젊은 아트레이데스 공작이 이 유목민으로 군대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리산 알 가이브가 필요하다. 


폴이 프레멘 부족에게 합류할 수 있게 된 결투에서, 이 젊은 공작은 이미 자신의 미래에 놓인 끔찍한 목적을 감지한다. 결투가 시작되자 폴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퀴사츠 헤더락이 일어나려면 폴 아트레이데스가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다. 


젊은 아트레이데스는 위대할 것이고, 실수 같은 것은 하지 않겠지만, 베네 게세리트가 그를 위해 고안한 역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의 인간성 중 상당 부분은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두려워하고 심지어 끔찍해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영화 ‘듄’의 개별 캐릭터들은 그들의 문화, 유전 또는 상속된 종교에 의해 정해진 궤도에서 제대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엄청난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는 힘의 존재까지 충분히 알고 있는 폴조차도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한다. 


빌뇌브가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빌뇌브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주인공 루이스 뱅크(에이미 아담스)는 외계인 종족과의 만남을 통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만나 키스를 나눈다. 뱅크는 자신의 어떤 (영광과 비극이 모두 있는) 미래를 보고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렇지만 영화 ‘듄’에서는 사람들이 인간 종족의 주기적이고 진부한 패턴 안에 갇혀 있다. 


익숙한 세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우리 시대의 공동의 죄와 조직적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감사하기는 쉬울 것이다. 폴, 제시카, 레토,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자연주의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그런 자유를 선택할까? 


허버트의 우주를 진정한 구원자가 없는 세계에 대한 황량하고 우울한 묘사에 불과한 것으로 특징짓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버트가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악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십자군은 이교도가 아닌 사제들이 주도했다. 남북전쟁 전 노예제를 지지한 남쪽은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내 옷장을 뒤져 보면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Made in Bangladesh) 태그가 적어도 두 개 이상은 있을 것이다. 


커리큘럼, 정치, 인프라, 교단, 그리고 공급망을 탐욕과 권력 남용이라는 영원한 죄에서 풀어 내는 과정은 쉽지도 또 간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정도로 내가 그 속에 숨어 있는 역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속에 심각한 질병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를 향한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이것만은 자신 있게 주장하고 싶다. 


허버트의 이야기는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고, 또 그가 그리는 세계가 대단히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 세계는 아름답고, 고통스러우며, 도저히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원제: ‘Dune’ Is About All of 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착취로 금권을 장악하는 세력에게 가하는 허버트의 비판이 예리하다면, 교묘한 종교에 대해 취하는 그의 태도는 신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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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aclyn S. Parrish

재클린 패리쉬는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마케팅 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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