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목회

네 존재를 증명하려 들지 마라!
by 정갑신2021-11-29

닥쳐올 위기를 감지하기에는 내 앞엔 여전히 할 일도, 계획도 너무 많았다.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상황을 반추할 겨를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인생을 바꾸어 지속적인 지침으로 삼게 된 구절이라기에는 다소 괴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어떤 격려와 위로의 말씀보다 강력히, 삶의 목적과 추구의 향방을 바꾼 말씀인 게 분명하니 어쩌랴. 


기대 없이 펼친 성경, 비수처럼 꽂힌 말씀


28년 전 신학대학원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 참으로 진지한 표정을 한 동료에게서 들은 한마디. 그때 그는, 준비가 거의 끝나 가던 유학길과 대형 교회 부교역자 임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에게 말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건지, 하나님의 필요에 답하려는 건지 깊이 물어 보세요.” 


그의 표정만큼이나 말 또한 선지자적이었다. 내가 공부와 교육에 소명을 받았다기보다 박사와 교수라는 타이틀을 탐하는 건 아닐까, 막연히 자문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목회와 복음전도와 양육에 삶을 던지기보다는 대형 교회에 속하여 안전과 명분을 확보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바르고 합당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속히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어간에 옆집에 거주하던 중국 선교회 간사로부터 전임간사직을 제안받았다. 나는 그것을 나의 야심에서 힘을 빼시려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4년간의 사역을 시작했다. 석박사 과정이나 대형 교회에서도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겠으나, 이 시기에 배운 지혜와 맺은 관계는 선교행정 현장에서만 익힐 수 있는 각별한 것이었다. 또한 그 모든 지혜와 관계는 이후 나의 목회 여정에 폭넓고도 확연하게 스며들어 적절하게 작동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6년 1월, 부교역자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C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꽤 많은 동료 선후배가 부러워했을 법한 중견 교회 담임목사 자리가, 버려진 신발 한 짝같이 가련한 존재의 자리로 탈바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년간 고요하던 일흔 살 교회 저수지에 무언가 의미 있는 돌을 던진 것 같았던 자부심이, 실패를 받아들이며 죽음을 희구하는 절망으로 뒤바뀌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항우울제 및 항불안제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처절한 무기력으로 버티는 동안, 희망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을 길이 없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인내도 완전한 한계에 이르렀다. 그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설교 준비를 위해 아무런 기대 없이 펼친 말씀이, 비상한 깊이로 나를 깨웠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처음엔, 오래전부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 게 분명한, 나만 몰랐던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은밀한 간음의 현장 문이 활짝 열리며 내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알몸으로 받아 내는 듯한,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이 소름 돋듯 일어났다. 그 후에는 마지못해 자수한 자에게도 송구스레 주어지는 보상, 자유와 평안이 나를 온전히 감쌌다. 그러고는 다시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복잡하게 얽힌 내면의 실체를 통찰하고 반추하도록 자극하고 독려했다.

 

말씀을 온전히 먹고 체화하기 위한 묵상과 함께, 운동장을 걷고 뛰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고, 드디어 더 이상 병원을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울러 현실적 안전을 보장해 주는 환경을 떠날 용기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하여 ‘목회 성공의 가능성’보다는 ‘복음적 필요’가 더 분명하게 보이는 지역으로, 교회 개척을 위해 떠날 수 있었다. 이렇게 누가복음 6장 26절은 겹겹이 엉켜 복잡했던 내면을 예리하고 잔인한 거룩으로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어, 수술과 회복의 시간을 거쳐 새길로 향하게 한 인생의 말씀이 되었다. 


야망과 주님 뜻 사이


돌아보면, 인생의 말씀은 이런 과정으로 주어졌다. 2005년 5월, 당시 안산동산교회 담임 김인중 목사는 과분한 지원이 보장된 분립개척을 내게 제안하였다. 마음이 다소 흔들렸으나 이미 그해를 끝으로 서울 지역으로 떠나기로 아내와 약속한 터라 결과적으로 그분의 마음을 크게 서운하게 했다. 정해진 사역지가 없었음에도, 그해 연말까지만 사역하는 것으로 말씀드리자고 아내와 얘기한 터였다.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안정적인 개척에 대한 미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던 중, 서울 서초구의 C교회로부터 세 분의 청빙위원 장로들이 찾아왔다. 담임목사 후보자군에 이미 10여 명의 목회자를 추려 놓은 상태지만, 두세 교회를 대상으로 몇 사람을 더 추천받은 후 선발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김인중 목사는 즉시 나를 호출했고, ‘선발되지 않으면 분립개척한다’는 조건으로 나를 추천하겠다고 했다. 나는, 배부른 선택의 기회와 손해 볼 것 없는 현실에 기대어 급하게 서류를 준비했다. 그리고 담임목사가 되었다. C교회 부임 후 확인한 결과, 대부분이 박사, 교수, 담임목사인 다른 후보들에 비해 객관적 조건이 상당히 뒤처지는데도 내가 청빙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시적 ‘간택’을 받은 것인지, 어떤 중대한 사태에 휘말리게 된 것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빨리 흥분했고, 낙관적인 꿈만 꾸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부임 직후, 18명의 시무장로들이 원로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소수의 무리(‘원무리’)와 원로목사를 최대한 배제하려는 다수의 무리(‘배무리’)로 갈라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적으로는 우세한 15명의 배무리를 통해 청빙된 나로서는, 이미 시작부터 몇몇 예상되는 위험을 감지해야만 했다. 


원무리는 기본적으로 나에 대해 호의적일 수 없었다.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기 전의 상황도 그랬지만, 나의 온몸에 배어 있는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도 그들에게는 경박하게 느껴졌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배무리 중에서도 소소한 목회적 갈등을 빌미로 원무리에 합류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 갔다. 어떤 이는 복음송과 드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어떤 이는 새 담임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 힘들다는 뒷말로, 다른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임이 부당하다는 불평으로, 또 다른 이는 정서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묵인으로 하나둘 원무리 쪽으로 돌아서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사이 나는 “다음세대와 젊은이세대의 부흥을 위해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마음껏 사역하라”는 배무리 최초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서, 열정을 다해 행동에 옮기는 ‘순진하고 천진하고 미련한’ 초짜 담임목사 역할을 힘껏 감당하는 중이었다.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 ‘마음껏 사역하라’는 주문에 충실하고자, 고리타분한 교회의 상징처럼 보이던 장로석을 없앴고, 강단 뒤 묵직하고 어두운 휘장을 단숨에 치워 버렸다. 그와 함께 이웃에게 경계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해 보이던 높고 답답한 붉은 벽돌 담장을, 제직회 여론몰이를 통해 하루아침에 허물었다. 더 나아가 30대 부부공동체를 세우고, 청년부를 전담할 전임사역자를 선발하고, 대대적인 전도집회를 기획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였는지 부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확연히 늘어 주일마다 예배당은 북적거렸고, 늘어난 성도들은 다수가 30-40대 젊은 층이었다. 그런데 ‘어떤 장로가 우리 교회를 남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노골적으로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배무리 중 일부도 서서히 냉랭해지고 있음을 어느 정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10여 명 되는 장로들과의 연대감에 의지해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보잘것없는 성과로 들뜬 마음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고도 남을 ‘강력한 태풍’이 시시각각 형태를 갖추어 가는 중이었다. 닥쳐올 위기를 감지하기에는 내 앞엔 여전히 할 일도, 계획도 너무 많았다.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상황을 반추할 겨를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죽음의 터널에 갇혀 지낸 나날


그 시기를 돌아보면, 유쾌하지 않다. 아니, 유쾌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 심히 불쾌해진다. 노골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는 강력한 잽과 스트레이트가 의식의 수면 위아래에서 나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던 사실에 너무 무지하였던 걸, 다시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 장로는 여러 불만과 충고를 뒤섞어, 결국에는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 했던 게 분명한, 여러 장의 경고성 쪽지를 보냈다. 몇 주간 그 쪽지를 묵상(?)하며 분노와 조소를 오가던 중, 기억에서 씻어 버리고자 폐기처분했지만, 외려 뇌리에 더 깊이 박혔다. 드럼과 복음송에 극단적 거부감이 있던 한 장로는 식당에서 여러 성도를 모아 놓고 “정 목사의 신학이 의심된다”고 크게 떠벌리며 웃었다. 다른 장로는, 타 교회 설교 테이프를 건네주며 “우리 목사님도 이 목사님처럼 이렇게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는 말로 염장을 질렀다.

 

그들도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을 상실할까 두려워 그리했던 것을 모른 채, 감정처리에 능숙하지 못했던 나는 직접적인 ‘치리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지만 분란만 일으켰을 뿐 그저 무기력하고 지혜롭지 못한 몸부림만 중첩시키는 중이었다. 나는 막연한 자신감 위에 살짝 얹어 놓은 친절과, 정서적 공감에 호소하는 설교로 버텨 보려 했다. 하지만 겨우 지탱하던 불안한 마음의 터전에서는 이미 붕괴의 지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부임 후 11개월여가 지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두어 시간씩 뒤척이는 밤이 시작되었다. 숙면은 옛말이 되었고, 서너 시간 잠을 자는 것도 무척 어려워졌다.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 기분 나쁜 기운이 서서히 전 존재를 거머쥐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불안과 우울은 어느새 나의 하루 24시간 전부를 지배하는 강력한 족쇄가 되었다. 견딜 수 없어서 병원을 찾았지만, 처방약의 효력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약으로는 불안과 우울을 잠재우는 게 불가능해진 시점에 나는 당회원들에게 연락하여 입원을 요청했다.

 

병원에서는 강한 수면제로 거의 일주일을 재웠고, 퇴원하는 날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동시 처방했다. 신경정신과를 정기적으로 찾는 날들이 계속되는 중에도, 도무지 가시지 않는 불안과 우울, 손발 저림과 강력한 무기력증에 사로잡힌 나는, 끝없는 죽음의 터널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다. 10개월 넘도록 이어지던 그 시기, 자살 충동은 일상이 되었고, 아내는 ‘정신질환’ 남편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보살펴야 했다.


사랑의 환대가 만든 영혼의 여백


평소 나는 사교적인 관계망을 넓게 펼쳐 많은 이들의 전화번호를 확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고통의 심연에 이르러서야 내가 얼마나 ‘진실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회피해 온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피상적 관계에 익숙해진 존재의 실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간, 내가 꽤 괜찮은 존재라는 걸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에 주로 유능함을 발휘했던 거였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고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내 고통을 나눌 만한 친구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내 심연의 문제에 관해 대화하기 위해 찾아온, 가까이 지내 온 형님 목사 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진실과 정직한 나눔을 공유하는 작은 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필요가 느껴졌다. 아울러 내 형편을 듣게 된 대학 동창 두 명이 비교적 자주,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 자신들의 일정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그들은, 움직이기 어렵다고 스스로 단정 짓고 옴짝달싹하지 않으려는 나를 설득하여 우면산 정상까지 천천히 함께 올라 주었고, 식사 교제를 통해 자신들도 지극히 연약했던 지난 시간을 펼쳐 놓음으로 내 문제를 상대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그런 기회를 반복적으로 만들었는데, 아내는 내가 그 시기에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기억할수록 고맙고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더불어 C교회 성도 중에도 내가 겉으로 드러내기도 전에, 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먼저 직감한 부부가 있었다. 이강우 집사 부부는 설교하는 내 모습에서 어떤 이상증세를 발견했다며 목양실을 찾아와 몸 상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구체적인 진단을 해 주었다. 그에 더해 내 몸의 분비물을 미국으로 보내어 호르몬 검사 결과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바닥난 감정조절 호르몬을 보충해 주는 약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던 나의 자기중심적 분주함과 부주의 탓에 오랜 시간 기억하지 못했던 그들의 이름과 고마운 마음,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들의 환대로 인해 지독하게 좁아져 있던 내 영혼에 틈새와 여백이 생길 수 있었고, 그 틈으로 생명의 말씀이 가늘지만 선명하고 날카로운 섬광처럼 파고 들어왔다.


인생의 말씀이 일깨운 진실


내면의 질서와 인생의 향방을 바꾼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매우 의아하지만, 2007년 5월 어느 날이었던 건 분명하다. 사랑의 환대로 인해 형성된 여백이 분명 큰 도움을 주었다. 도무지 펼쳐지지 않는 말씀,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말씀을 억지로 내 안으로 욱여넣기 위해 소리 내어 읽었던 시편 말씀도 그랬던 것 같다. 진이 빠지고 근육이 사라져 걸을 수 없었던 두 다리로 이를 악문 채 힘주어 걷고 조금씩 뛰기 시작한 사투의 날들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게다. 하지만 우울과 불안 사이를 널뛰듯 오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증상은 동일했고,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갈망은 여전히 강력했다. 만에 하나 이 고통의 여정이 멈추면 누가복음을 설교하리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하루에 서너 구절씩 읽어 내려가던 어느 날, 그 말씀이 예리하고 깊고 무겁게 내 눈과 가슴을 파고들었다. 매우 충격적이었고, 몹시 아팠고, 한없이 따뜻했지만, 또다시 통렬하게 내 온 영혼을 사로잡았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누가복음 6:26). 


무엇보다 이 말씀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가짜’였음을 고발했다. 내가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부터였고, 분노로 잠을 못 이룬 것은 나를 분노케 한 자들의 무례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진정한 문제가 그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그것을 헤아리거나 견뎌낼 수 없었던 나의 ‘자기 존재 증명 욕구’였다는 걸 선명하게 알려 주었다. 


마음이 거기에 이르니 그간 일어났던 모든 현상이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꿰어졌다. 모든 성도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박수받는 목사가 되려는 존재 증명의 욕구로 인해 나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던 거였다. 그로 인해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사용’하려는 모든 자 앞에 넓고 깊게 펼쳐진 함정에 빠졌던 거였다. 


나는, 도를 넘어 감당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멸시와 수치와 사람들의 잔혹한 뒷담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향해 곧게 걸으셨던 주님보다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하고 누리려 한 목회자였던 거다. 수개월을 이어 가는 격한 회개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나 같은 존재가 대체 뭐라고 주님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자 했던 걸까? 주님은 단지 내 존재를 증명해 주어야 하는 도구였다는 말인가? 나는 주님의 목회, 주님의 나라가 아니라, 내 목회를 통해 나의 나라를 건설하려 한 또 다른 니므롯이 아니었던가? 영광을 향한 열망 뒤의 지독한 초라함을 좇아가는 미련함에 너무 오래 방치되었던 게 아닌가?

 

결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는 그 말씀은 스스로 화를 자처하는 길을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진실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자기 존재감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였다는 걸 고백하는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졌고,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 확연한 회복이 이뤄졌다. 마침내 나는 약을 버려도 될 정도까지 회복될 수 있었다.


회복과 새날


말씀 앞에 엎드리고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힘을 쓰는 날들이 지속되면서, 우울과 불안은 확연히 가라앉았다. 동시에, 과거에 나를 채우고 있던 ‘존재 증명을 위한 자신감’은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누리는 자유의 맛을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내가 아무리 확연한 변화를 이룬다 해도, 이후에 다가오는 시간들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자가 못 된다는 사실도 실감 나게 깨달았다. 


그에 따라, 이미 주변 교회들 사이에서 떠도는 상대적 비교와 거부할 수 없는 경쟁적 분위기에 익숙해진 현실에서, 성장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진 분위기에서, 전통에 대한 계승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대립하고 각을 세우는 문화 속에서, 여전히 자기중심성으로 신속히 돌아갈 가능성이 현저한 내가 이 교회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분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여기서 계속 자리를 지키려면, 철옹성 같은 자기 확신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면서 독재적 목회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든지, 아니면 철저하게 침묵하고 견디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다는 빌미로 흐르는 세월에 의탁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또다시 작은 성취에 존재 증명의 욕망을 걸게 될 미천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주님의 뜻을 묻던 중 나는 기쁨과 희열 속에서 ‘개척’의 소명을 받았고, 아내의 적극적인 동의를 통해 그것이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인 것을 확인했다.

 

내가 추구하는 목회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고발하고, ‘나’라는 존재가 별것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인정하게 해 준 누가복음 6장 26절 말씀은, 주님의 이끄심과 주권적 은혜를 더 깊이 신뢰하는 담대함을 선물해 주었다. 그에 따라 아내와 더불어, 교회에는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말고 소박하게 사임하는 게 옳다는 결정을 했다. 그저 퇴직금이면 족했다. 퇴직금에 전세대출을 합쳐서 어디가 되었든 전세아파트에서 교회를 시작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쁨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끝까지 배무리로 남은 10여 명의 장로들은 나의 사임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리고 내가 교회에서 계속 시무하는 조건으로 여러 건의 환상적인 제안을 해 왔다. 그 제안을 위해 오랜 시간 토론하고 의논했을 모습이 눈에 그려지고 그 제안에 담긴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 미안함과 뭉클함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이게 네 사직서다’라는 깨달음을 주셨다. ‘그 조건을 따라 시무를 계속한다면, 그 순간부터 너는 성도들이 절대 존경할 수 없는, 조건을 따라 눌러앉은 목사가 되는 거다’라는 각성이었다.

 

그리하여 한 구절 말씀을 통해 ‘존재 증명 욕구’의 수위가 큰 폭으로 낮아진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마무리가 필요한지를 찬찬히 생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C교회에 부임해야 했던 ‘나를 위한 이유’는 확실해졌다. 내 실체가 고발되는 것, 그에 따라 내 중심이 자기 존재 증명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착각 속에서 외려 그분을 사용하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증명하려는 갈망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나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C교회에 부임해야 했던 ‘C교회를 위한 이유’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수주를 고민하던 중, 후임 목회자와 남은 성도들을 위해 당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 그 이유임을 깨닫게 되었고, 배무리 장로들도 내 생각에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결국, 담임목사와 더불어 원무리와 배무리 양편에서 다섯 명의 장로가 동시 사임하는 것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당회와 성도들은 사임한 담임목사를 교회 개척을 위해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과분한 지원으로 파송식을 열어 주었다. 


결국 누가복음 6장 26절은 내 안으로 파고들어 존재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고 한 목회자의 향방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한 전통 교회가 새 교회를 낳는 헌신을 불러일으켜, ‘살인의 추억’ 화성시의 한 마을에 예수향남교회를 세우는 ‘창조주의 말씀’이었던 셈이다. 



이 글은 ‘내 인생의 한 구절’(잉클링즈, 2021)에 실린 정갑신 목사의 글 “세우시는 창조주의 말씀”을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모든 성도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박수받는 목사가 되려는 존재 증명의 욕구로 인해 나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던 거였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정갑신

정갑신 목사는 예수향남교회의 담임목사로 총신대 신학과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원,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9년 8월 예수향남교회를 개척한 후 예수향남기독학교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으며, (사)복음과도시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대답하는 공동체’, ‘사람을 사람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