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차매
by David Holwerda2021-12-03

쇼핑과 파티와 이런저런 특별 행사로 분주한 나머지 그리스도 강림의 목적을 잊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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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설렘과 기쁨이 넘친다. 분주함까지 더해진다. 상인은 더 많아 팔아야 하고 쇼핑하는 이들은 즐거워야 하니, 또 그래야 경제도 잘 돌아갈 것이니, 상점은 더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연장한다. 그리고 이 주간에 교회는 4주간의 그리스도 강림(Advent) 절기에 들어간다. 이 절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억하고 또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시간이다. 쇼핑과 파티와 이런저런 특별 행사로 분주한 나머지 그리스도 강림의 목적을 잊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강림은  우리가 때가 됐다고 결정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을 기억하는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때를 준비하셨는지 되새겨야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크리스마스는 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이 때가 찼음을 알려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때가 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그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계보 둘이 우리를 아담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시작에 이르게도 하고(눅 3:23-37), 아브라함과 다윗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스라엘 시작에 닿게도 한다(마 1:1-17).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아들이 태어나시기 수세기 전부터 그 길을 예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 길을 어떻게 예비하셨는가?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이 열방의 역사를 주관하셨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그 역사에는 이스라엘에, 예수님에게, 그리고 초기교회의 복음전파에 영향을 끼친 로마제국의 지배도 포함된다. 이러한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방의 역사를 사용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때가 찼다”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때가 참”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 곧 미래의 축복과 평화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찬 약속들에 의해 정해진다. 하나님은 그 약속들이 성취될 때를 이미 정해 두셨지만(합 2:3), 그 때를 누구에게도, 심지어 선지자들에게도 나타내지 않으셨다(벧전 1:10-12). 하나님은 당신의 달력에 따라 일하시고 우리와 달리 시간을 측정하시기 때문에(“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수 세기의 인내가 필요했다. 


천사들이 평화의 소식과 함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렸을 때(눅 2:14),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고 선언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때가 참’을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약속받은 유업을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 때로 해석한다. 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녀로서 약속된 기업에 대한 온전한 권리를 받았다는 것이다(갈 4:1-7).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같은 선언을 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때가 차서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수세기 전에 하나님이 하신 준비를 엿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계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 다윗 왕부터 바벨론 유배까지, 바벨론 유배에서 예수님의 탄생까지, 세 시기로 나눈다(마 1:2-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곧 하나님께서 때가 찼다고 알려 주시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데, 이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마침내 성취된 것이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뿐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1-3). 하나님의 언약의 복은 아브라함과 그 육신의 후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 온 세상까지 받게 될 복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하시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55:11).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언제 일어난다는 것일까?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마태의 간략한 계보 조사는 그 일이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렇기는커녕,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순종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으로 택하시고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사 42: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다른 민족들과 나누기보다는 움켜쥐고 있으려 했다(요나의 교훈). 그게 다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빈번히 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했고, 억눌린 사람들을 공의로 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으로 사는 데 실패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에게 유배라는 심판을 내리셨다. 참으로 비참한 결과였다.


그러나 유배는 하나님의 최종 응답이 아니었다. 마태의 계보는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패역과 유배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열방이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참 후손(씨)으로 오신다. 이제 때가 차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약속받은 복에 참여하게 된다(갈 3:16, 26-29).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다”(마 8:11). 예수님을 통해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찼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도 때가 찬 예수님의 탄생을 이해하는 데 똑같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바빌론으로 유배되기 전까지였다. 그 후로 그 왕들이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임무에 실패했기에 다윗 왕조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다윗의 왕국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삼하 7:11-16). 유배 생활에서 예수님의 탄생까지 5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기다렸다. 이제 때가 차매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약속된 목자요 왕으로 태어나셨다(미 5:2, 마 2:6). 다윗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그 영존하는 보좌를 세우시는 영원한 왕이시다.


마태의 예수님 계보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언약의 교훈이 담겨 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던진 경고를 들어 보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하나님이 돌로도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면, 결코 장자권이나 족보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참 이스라엘은 단순히 순수한 유전자 또는 흠잡을 데 없는 가계도로 만들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마태가 그리는 예수님의 계보에 주목하자. 특별히 “거룩하지 않은” 외국인 여자 네 명이 이 계보에 들어 있다. 다말과 가나안 사람 라합, 모압 사람 룻, 그리고 헷 사람의 아내 밧세바이다. 적어도 마태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 단순히 아브라함과의 유전적 연결에 근거하여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참 이스라엘은 인종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 대신에 하나님은 누가 이스라엘에 속할지를 택하셔서 이방인을 이스라엘에, 심지어 이스라엘 소망의 근거가 되는 왕의 혈통에까지 편입시키신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 모든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도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택하심에 그 기원뿐 아니라 존속까지 달려 있다.


우리는 특히 예수님의 계보에 있는 “거룩한 불규칙성”에서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다. 요셉이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이지만, 예수님은 요셉의 씨가 아닌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셨다(마 1:18, 20). 이것은 예수님의 계보에 현저한 불연속성을 만들어 낸다. 비록 예수님이 그 백성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아브라함과 다윗과의 연결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역사와 가능성을 초월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조상이 생산할 수 있는 후손 그 이상이시다. 이스라엘은 결코 그들의 구주를 생산할 수 없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성령의 창조 활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세계 열방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모여 그 백성이 된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지평은 과거로 깊숙이 닿아 있으며 미래로 멀리 뻗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를 조사했다. 그러면 미래는 어떨까? 마태는 약속된 새로운 출애굽에 관한 호세아 11장의 예언을 인용한다. 유배 생활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최종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시는 대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속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첫 번째 해방과 같이 완전하고 최종적인 회복과 구속을 주는 두 번째 해방 사건이 있을 것이다. 마태는 이 새로운 해방의 시작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집트에서 부르실 때 발생했다고 선언한다(마 3:15). 구속과 해방의 이 새로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구속과 자유의 복은 하나님께서 세계 열방에서 당신의 백성을 계속 모으고 계시는 지금도 온 열방 위에 부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때가 찬 시간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때를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온전히 성취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나님은 당신의 달력을 가지고 계시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으시니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가 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확신과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증언하고 기다릴 뿐이다.


원제: In the Fullness of Time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무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가 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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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Holwerda

데이비드 홀워다는 미국 미시간 주 Calvin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학 명예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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