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에서 보물로: 기쁨이 바꾸어 놓은 내 신앙
by Steven Lee2021-12-27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기쁨, 예배 속의 기쁨,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이번에 좀 더 천천히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문장 속 단어를 하나하나 다 이해했지만, 전체 의미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지?” “나의 만족이 하나님의 영광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지?” 이 문장은 너무나 생소해서, 마치 아랍어나 아이슬란드어로 쓰인 글 같았다. 


이 한 문장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기쁨,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씨름하도록 자극했다.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기쁨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기쁨을 발전시키고 최대화하고 또 자극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나는 성경을 통해 이런 사실에 관한 내용을 계속해서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항상 성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한 문장은 내 삶을 말 그대로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이십 년 전 나는 성인으로서 독립을 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집에서 500마일 떨어진 대학에 도착했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과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는 교회에서 성장한 내게 기독교의 본질은 의무와 규칙이었다. 적어도 열일곱 살 당시 내게는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뿐 아니라 부도덕하기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지만, 십대의 마음은 규칙과 금지 사항에 집중되어 있었다. 교회 출석, 기도하기, 성경 읽기, 혼전 성관계 금지, 술과 담배와 마약 금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건 집안일이나 숙제처럼 의무였을 뿐 결코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고전 10:31),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대학 1학년 때 기독교 동아리에서 소그룹 리더가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하나님 갈망하기’(Desiring God)를 내게 건넸을 당시, 나는 기독교 서적을 별로 읽은 게 없는 상태였다. 첫 번째 장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끝없는 혼란에 빠졌다. 저자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반복해서 말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라는 명령은 고사하고, 나는 한 번도 내 행복이 하나님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식의 가르침과 함께 자라지 않았다.


예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또 행동으로 그분을 공경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고통의 길로 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행실을 버리고 또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의무(labor)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했지만, 은혜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인용했지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까지 연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는 말은 마치 다리가 다섯 개 달린 개나 마른 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진리이다. 그래서 나는 순종한다. 그러니까 순종만 하면 되지, 순종하는 내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으로 이런 접근 방식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속에는 좋은 성적, 근면, 의지, 규율, 인내가 심어졌다. 내가 자란 문화적 환경에서 시험에서 A 마이너스를 받으면 다음에 A 또는 A 플러스를 받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라고 배웠다. 내가 좋든 싫든, 그건 상관없었다. 주어진 일은 무조건 잘해야 했다. 


그러나 주로 거래 관계로 규정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예수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성경을 읽었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죄를 피했다. 그리고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내 세상은 그냥 허물어지곤 했다. 내가 방탕한 죄인인데,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하시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나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밭에 감추인 보배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축소시켰다. 그것은 순종에 대한 강력한 동기가 되지 못했다. 내용 자체가 부족했다. 서서히,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기쁨, 예배 속의 기쁨,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했다. 나의 기쁨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단지 기쁨을 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영혼의 만족을 찾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내가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위해 싸운다. 


이런 생각이 성경 지면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시편 1:2). 주의 명령은 무거운 게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다(요일 5:3).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고 그의 우편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다(시 16:11). 예수님은 천국이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판다고 말씀하셨다(마 13:4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당신의 직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혼부부에게 “당신의 직업은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휴가지에 도착한 사람이 “이제부터 당신의 직업은 긴장을 풀고 즐기는 것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계명은 그분을 기뻐하라는 계명이고, 그분을 기뻐하라는 계명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계명이다. 이 둘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갈 뿐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성한다. 


더 나은 곳은 없다


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를 요약한 이 한 문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서 놀라운 것으로 바뀌었다. 내 인생은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목사로서 성경을 전할 때, 내 목표는 순종을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인들에게 수치감과 죄책감을 줌으로 예수님을 따르거나 희생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위협이 있는 곳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더 큰 즐거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의 미소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예수님이 더 낫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 각종 오락이 주는 작은 즐거움보다 낫다. 예수님은 소셜 미디어의 늪을 끝없이 스크롤하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불법적인 쾌락, 화학적으로 유도된 쾌락, 그리고 이 세상이 죽음의 접시에 담고 있는 재물보다 낫다. 예수님께 순종하고, 교회에 참여하고, 그리고 주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일시적인 칭찬과 인정보다 낫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이 점점 커져갈 때, 그에 비해 세상이 주는 작은 기쁨은 점점 더 시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큰 경이로움은 그런 기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에 뿌리를 둔 영원한 기쁨을 만난다. 우리는 영원한 희망, 영원한 고향, 썩지 않을 왕국, 더 나은 기쁨,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약속받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현실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찾기 위해 창조되었고 설계되었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이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가 그를 기뻐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원제: From Chore to Treasure: How Joy Transformed My Christianity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불법적인 쾌락, 화학적으로 유도된 쾌락, 그리고 이 세상이 죽음의 접시에 담고 있는 재물보다 낫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Steven Lee

스티븐 리는 베들레헴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니애폴리스 베들레헴 침례교회 노스캠퍼스의 설교 담당 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