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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나를 비로소 엄마 되게 한 시편
by Harriet Connor2022-01-11

나는 단지 내 몸 안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다. 나는 영혼일 뿐 아니라 나라는 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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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 평등이라는 가치에 푹 빠져서 자랐다. 유치원 시절, 색칠 놀이 테이블에서 있었던 열띤 대화를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여자 색과 남자 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며 논쟁하던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여고에서는 “남학생을 이겨라”라는 무언의 구호가 있었다. 우리는 남자 못지않은 과학자, 변호사,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큰 꿈을 꾸라는 격려 속에서 공부했다. 교직이나 간호사 같은 전통적인 여자의 직업을 말하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고, 학교에서 “모성”(motherhood)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내가 성장할 당시 경험한 이런 페미니즘을 아비게일 파베일(Abigail Favale)은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설명한다. 


고전적인 페미니스트 주장은 성 역할의 유동성, 곧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여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의 본질에 관련해서 남자와 다른, 그 어떤 차이도 없다고 전제된다. 대신, 여자와 남자는 본질적으로 상호교환이 가능하고 동일하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주어진 일은 다 할 수 있기에, 여자는 여자라는 것 때문에 특별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그 결과, 나는 내 속의 여성성과 매우 단절되어 자랐다.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분홍색 옷을 입지 않았다. 화장을 한 적도, 머리를 한 적도 없다. 치마와 젖가슴, 생리 기간은 “남자들을 이기기” 위해 극복해야 할 사소한 불편에 불과했다.


부모 역할: 평등을 위한 투쟁


젊은 성인이 된 내게 적합한 파트너를 찾는다는 것은 나와 똑같은 가치와 신념뿐 아니라 같은 관심사와 취향, 같은 유머 감각과 의사소통 방식까지 공유하는 사람, 곧 나와 똑같은 사람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대한 것은 목표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상호교환 가능하게 일하는 파트너십이었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나서야 나는 여자로서 내 몸을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복잡하게 설계된 어떤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를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역할 면에서 남편과 나를 구별하는 유일한 것은 수유 정도라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아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나와 남편이 다르지 않다고, 곧 “부모 역할”에서는 피차 평등하고 동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생각만큼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의 자녀 양육 방식은 나와 근본부터 달랐다. 때때로 아들이 우리에게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는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더 많은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연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내가 너무 유하다고 생각했고, 나는 반대로 남편이 너무 엄하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 때문에 우리 가족의 삶은 투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각자가 타고난 경향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만 향하는 건지, “평등”은 도달이 힘든 애매한 목표처럼만 보였다. 


모성: 즐거운 재회


젊었을 때 나는 시편 139편을 수없이 읽었다. 외롭거나, 오해를 받거나, 또는 길을 잃을 때마다 139편을 찾았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하신다는 진리, 곧 하나님은 나를 너무 잘 아시며, 또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진리에서 위안을 찾곤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는 시편 139편에서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 시편 139편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진리뿐 아니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인류에 대한 심오한 진리까지 인식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시편 139편은 이제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완전한 전환, 일종의 “회심”을 상징하는 말씀이 되었다.


나는 내 몸이다


나는 내가 물려받은 세계관이 여자의 몸에서 인격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몸이란 단지 진정한 자신, 곧 성격, 신념, 욕망을 담는 무작위로 걸린 그릇에 불과하다는 신념을 갖고 자랐다. 따라서 애초부터 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네 몸을 사랑하라’(Love Thy Body)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몸과 영혼을 동전의 양면으로 취급한다. 영혼의 내적 생명은 육체의 외적 생명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녀는 좀 더 자세히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경의 윤리는 성육신의 윤리다. 우리는 마음과 몸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여기에는 그 어떤 분열도, 소외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육화된 존재다. 

이 점은 시편 139:1-4을 보면 명백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 시구에서 사람의 마음과 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하나님은 나를 아실 때 내 생각과 말뿐 아니라 내 몸의 행실까지도 다 아신다. 나는 단지 내 몸 안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다. 나는 영혼뿐 아니라 나라는 몸이기도 하다. 성경에 따르면, 몸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고 반영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수단이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다


시편 139편에서 시인은 어떤 목적을 갖고 몸과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 구절은 여성이라는 나의 성이 나를 위해 하나님이 가진 좋은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신시킨다. 하나님이 여자의 몸을 만드신 게 나를 위해서라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은 어떤 형태를 가지기 마련이다. 피어시는 이렇게 지적한다. “신체의 물리적 구조는 우리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를 드러낸다.…기독교 윤리는 자연과 몸의 목적론(내재된 목적)을 존중한다.”


나는 엄마다


앞에서 말한 “회심”이 내게 가능했던 건,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내가 도무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경 전체를 읽었고, 부모가 되는 것에 관한 모든 내용을 기록했다. 심지어 나는 그 주제로 까지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 성별 차이가 가지는 질문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성경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또는 무엇을 가르치지 않는지) 너무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 속 이미지와 상징이 창조로부터 추정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름 성경은 부지런히 팠지만, 나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것은 등한시했다. 


나는 파벨(Favale)이 말한 것처럼 실재를 제대로 포착하는 데에 실패했다. 


우리 몸에는 어떤 주어진 것(givenness)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변덕에 의해 결정되거나 구성되지 않는, 신성한 의미에 의해서 새겨진 것이다. 몸은 우리의 허가 여부에 관계없이 상징의 언어를 말한다. 

예를 들어, 시편 139편은 어머니의 태를 창조 장소로, “땅의 깊은 곳”과 평행하게 설정한다. 첫 사람은 하나님이 땅의 흙을 빚으시고 생기를 주실 때(창 2:7) 땅의 “태”에서 형성되었다. 지금도 매일 지구는 땅(또는 여자)에 심어진 씨앗이 초목으로 싹을 틔우면서 계속해서 “낳는” 활동을 반복하고 있다. 몸 안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여자는 땅과 같다.


임신한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내 태 속에서 사람을 만드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다. 기적과도 같이 방금 내 몸에서 나온 진짜 인간 아기를 경외심에 쳐다보던, 어머니가 된 첫 날 밤의 초현실적인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고 고백한 첫 어머니 하와의 감정을 느꼈다. 


나는 ‘부모’ 중 한쪽 이상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차이는 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신했을 때, 나는 우리 아이들의 첫 번째 집이었다. 태어날 때 아이들은 내 몸에서 나왔다. 육아를 할 때 나는 아이들에게 영양과 위안의 첫 번째 원천이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은 남편에게서도 왔고 나만큼이나 남편에게도 똑같이 속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훨씬 더 큰 물리적 거리에서 시작되며, 이 거리는 아버지가 개인적인 헌신으로 연결해야 한다. 


창세기 1-2장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기원도 다르다. 아담은 땅에서 나왔고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 알라스테어 로버츠(Alastair Robert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자와 여자는 따로따로 그리고 다르게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본성과 목적 사이에는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는 땅을 경작하고 땅을 섬기고 또 다스리도록 땅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다. 반면에 여자는 결합을 통해 생명과 친교를 가져오기 위해 남자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어머니로서 나는 남편과 다른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한다. 육체를 떠나 성별의 구분이 없는 “육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자녀와 연결된 진짜 어머니와 진짜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여자인 내가 계속해서 “내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전혀 놀랍지 않다. 곧, 내 속에는 언제나 “가정 만들기”, 음식 준비,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위안과 안식처를 제공하려는 경향이 피어오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내 속에서 잉태되었던 순간부터 내 몸이 해 온 일이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출산을 통해 엄마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양어머니와 계모라도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고 호르몬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가 돌보는 아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서 모성을 끌어내기도 한다. 


반면에 남편은 외부 세계에 대한 눈으로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남편은 자녀를 대표할 뿐 아니라 보호하고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세상을 직면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힘을 갖추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로서의 육체적 관계도 처음부터 그런 경향을 띄고 있었다. 


이런 모든 깨달음은 자아 이해와 자녀 양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더 이상 남편과 상호교환이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기쁨으로 나는 여자라는 내 몸과 재결합했고, 나는 이제 여자라는 사실로 살 뿐 아니라 여자로서 내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나는 육아에 대한 나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진 남편을 나의 완벽하고 필요한 보완으로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애써서 “육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날이 배워가고 있다. 



원제: How Psalm 139 Made Me a Mother (Not Just a Paren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육체를 떠나 성별의 구분이 없는 ‘육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자녀와 연결된 진짜 어머니와 진짜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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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Harriet Connor

헤리엇 코너는 Sydney Missionary and Bible College에서 언어학과 신학을 전공했으며, 대표 저서로 'Big Picture Parents: Ancient Wisdom for Modern Lif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