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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의 시편
by Ken Montgomery2022-01-08

아삽의 영성은 결코 일반적인 영성이 아니다. 아삽의 영성은 결코 공허한 하늘 곧 추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아삽의 영성은 구체적인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순간과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장소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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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7편에서 아삽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시 77:4).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아삽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을 살펴보기 전에, 시편 77편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77편은 [총 5권으로 되어 있는] 시편의 제3권(시편 73-89편)에 들어 있는 아삽이 노래한 시다. 제3권에 펼쳐져 있는 시편의 풍경에서 이 시는 “어두운 골짜기”에 해당한다.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데, 악인(바벨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을 시인은 목도한다(시 73:3).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어 버렸고(시 74:7), 다윗 왕가는 사라졌으며. 그 왕관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시 89:39). 한때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72편) 번창했던, 솔로몬의 치세와 그의 왕국이 그 찬란한 빛을 비추었던 곳에 지금은 무거운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시편 73-83편을 쓴 합창단장 아삽은 우울한 노래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삽의 시들을 지배하는 음조는 단조다. (적어도 오늘날의 문화 상황에서는) 단조는 긴장과 방향감각의 상실 및 그 해결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 합창단 지휘를 위해 지휘봉을 든 아삽은 슬픔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나는 아삽이 다른 건 몰라도 동기부여 강사로는 생계유지가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왜? 동기부여 강사가 가져야 하는 핵심 마인드는 당신 앞에 있는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올바른 접근방식과 “닥치고 해결”이라는 정신으로 무장하면 언제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삽은 (남겨진 사람들과 함께 겪고 있는) 자신의 곤경이 너무 깊고 가혹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를 시편 77:7-9의 질문으로 이끈다. 이 시구를 풀어 보면 이렇다. (우리에게 “밝은 얼굴로 대하시겠다”고 아론의 축복[민 6:24-26] 속에서 약속하셨던)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는 것일까?” “나는 지금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처음 시작된 길) 하나님이 약속한 길이 끝나버린 곳에 서 있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아삽은 자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은혜의 약속을 잊으신 것일까?”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모세를 바위 틈에 들어가라 하시고[출 33:21-23]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나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출 34:6-7]이 아니셨던가?) 한밤중 아삽의 생각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 아삽의 머리 위에서는 불길한 구름이 뭉게뭉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에서 같은 말을 한다. “심오한 자기성찰이 내 영혼의 저 신비로운 심연으로부터 내 모든 비참함을 함께 끌어내어 내 마음의 눈앞에 쌓아 두었을 때, 엄청난 눈물의 폭우를 동반한 강력한 폭풍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시편 제3권 전반부의 시들이 노래하는 슬픔이 이제 77편에서는 훨씬 더 극심해진다. 명백한 불의를 목도하면서 아삽이 느낀 복잡한 심정(시 73편)과 폐허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도성을 걷는 트라우마(시 74편)보다, 77편의 슬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제 아삽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등지시는 게 아닌지 두려워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 77:3). 아삽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적하실까 두려워한다. 시편 77편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욥의 부르짖음을 느낄 수 있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욥 30:21-22).


아삽은 이제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천로역정’에서 ‘절망의 늪’(Slough of Despon)에 사로잡힌 주인공 ‘크리스천’(Christian)이 ‘전도자’(Evangelist)에게 어떻게 하면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묻는다. 전도자는 대답한다. “길을 만든 사람이 적어 놓은 안내를 보면 수렁 사이에 분명히 안전하고 튼튼한 계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계단이 어떤 때는 보이는데 또 어떤 때에는 보이지가 않아요. 또 때때로 그 계단에서 현기증을 느낀 사람들이 그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삽은 어떻게 해야 딛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하고 튼튼한 계단”을 찾을 수 있을까? 10절이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아삽은 현재의 경험에 자신이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삽은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가 ‘오직 체험’(Sola Experientia)이라고 부른 개념, 곧 개인의 본능과 인식이 지식의 최종 표준이자 권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삽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없으며, 개인의 주관을 넘어 상소할 수 있는 고등법원이 있음을 이해했다. 낙담한 상태에서 마치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아삽은 한때 단지 망막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따라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로 앞에 있는 것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아삽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눈가리개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아삽은 결연한 마음으로 외친다.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시 77:11). 찬송이 흐른다. “어둠이 그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릴 때, 나는 그의 변함없는 은혜에 의지합니다. 높고 거센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나의 닻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시편 77편의 후반부가 시작되면서 아삽은 “언약 고고학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성공의 확신도 없이 몇 달, 몇 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발굴에 투자해야 하는 다른 고고학자들과 달리, 아삽이 캐고 있는 것은 과거의 보물,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11절)이다. 그렇기에 그가 금을 캐는 것은 보장된 사실이다. 어디선가 “시내 광야와 가나안 땅을 깊이 파다 보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말한 이의 발자취를 찾을 것이다”라는 말을 본 기억이 난다. 그게 바로 아삽이 잡은 방향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뒤로 나아갔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헤세드(Hesed)의 역사(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역사)가 이제 아삽에게 현재 상황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위안과 격려의 근원이 된다.


시편 77:16-20은 사실상 모세의 노래인 출애굽기 15장을 노래로 주석한 내용인 동시에 묵상의 기록이다. 친숙한 찬송의 가사가 전면에 나오고, 이제 그는 노래하기 시작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아삽의 영성은 결코 일반적인 영성이 아니다. 아삽의 영성은 결코 공허한 하늘 곧 추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아삽의 영성은 구체적인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순간과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장소에 근거한다. 밀려오는 바다가 갈라졌다. 유월절(Passover) 밤에 당신의 백성을 “뛰어 넘은”(passed over; 踰越) 하나님은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 신발에 단 한 방울의 물도 떨어지지 않고도 바다를 “지나가는(passing through)” 백성이 되게 하셨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순간이며, 갈라진 물을 건넌 것은 언약 민족으로 태어나고 세례를 받는 사건이었다(참조, 고전10:1-2).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라는 반석은 지금 불어오는 그 어떤 바람에도 무너질 수 없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그 길에 있을 때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시 77:19)라는 아삽의 말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이집트를 탈출하던 당시에도 하나님은 유일하고 주권적인 능력으로 분명히 행동하고 계셨다. 갈대 바다 기슭 바로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은 명령은 이것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이처럼 주님이 놀라운 일을 계시하셨을 때에도 주님의 임재에는 어떤 숨겨진 차원이 있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어떤 차원에서 보자면, 아삽과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포로로 잡혀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거나 접근할 수 없는 분은 아니셨다. 오히려, 충만한 믿음으로 옛 기억을 떠올릴 때, 하나님의 임재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 77:1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막연한 원칙이나 이상주의적 의미의 “절대적 진리”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려주신 대로, 그리고 때가 차는 것에 따라서(참조, 갈 4:4) 행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홍해의 구속 사건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라는 마지막 출애굽의 준비 작업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궁극적 “파라오”인 사탄을 멸하셨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무덤에서 나오신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피로 사신 양 떼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히 13:20).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옛날의 경이로움”이다. 


‘리멤버’(remember; 기억하다)는 말 그대로 ‘멤버들을 하나로 합친다’는 뜻이다. 그럼 ‘리멤버’의 반대말은? ‘멤버에서 탈퇴시키다’(dis-member)이다. 잊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산산조각내고, 개별적으로 분해하고, 전체적으로는 샅샅이 흩는다는 것이다. (험피덤피(Humpty-Dumpty, 동요에 나오는 알 모양 인물)는 한번 부서지면 결코 다시 원대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교회는 함께 나누고 있는 거룩한 기억을 통해 다시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친교 공동체(communion)의 지체들이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5-6).


하나님은 우리가 걷는 순례의 길에 기념비와 더불어 에벤에셀(기억의 돌; 기념 표석)을 두어 우리를 안심시키시고, 또한 우리가 방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이제 시작된 새로운 창조 둘 다의 이정표를 나타내는 “기억의 돌”이다. 안식 후 첫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물을 물리치시고 무덤에서 이겨 부활하신 것을 기억한다. 이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볼테르는 언젠가 “기독교를 파괴하려면 안식일을 파괴해야 한다”고 썼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집단 기억을 행사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빼앗으라. 그러면 교회는 오래지 않아 희망의 근원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히브리서 10:23의 이 명령에 순종한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안식일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대한 미래의 희망이 현재로 옮겨진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기억한다. 


성례전(세례와 성찬)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가시적인 기념이다.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 홍해 바다를 가르신 장소를 “표시”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증언한다. 세례의 물은 결코 고요한 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음성이 전달되는 것을 듣고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과 합하는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묶는 인장이 되며, 주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할 때, 결국 그리스도의 모든 일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었다(롬 6:3-4).


성찬은 눈으로 만질 수 있는 기억의 식탁이다. 정통장로교회 예배 지침(The Directory for Public Worship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은 이렇게 말한다. “성찬은 그리스도를 다시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단번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수단이다. 그는 성령과 믿음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죄와 싸우고 거룩하게 그분을 섬기려는 모든 노력을 하는 우리를 강하게 붙드신다.”


시편 77편에서 아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불면이 망각보다 훨씬 낫다. 한밤중에 깨어서 주님과 주님의 놀라운 일을 기억하도록 하는 불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원제: Sleeplessness and Forgetfulness in Psalm 77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무제

불면이 망각보다 훨씬 낫다. 한밤중에 깨어서 주님과 주님의 놀라운 일을 기억하도록 하는 불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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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en Montgomery

켄 몽고메리는 조지아주 매리에타에 있는 Christ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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