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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누군가 내 고통을 아신다
by Tim Shorey2021-12-26

‘임마누엘’ 하나님은 그냥 전문의가 아니시다. 그는 공감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결코 그냥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신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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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두통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냉동 참치에 정말 진심인 의사였다. 그런데 그 의사는 만성 두통을 방치했다면서 내게는 호통을 쳐댔다. 의사라는 사람 앞에서 20년간(지금은 30년) 두통을 달고 살았다고, 많은 의사를 만났고, 수많은 검사에 MRI 촬영, 약물치료, 식이 요법, 운동, 비타민 섭취, 영양 섭취, 침술, 도수치료 다 해봤다고 말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래 봐야 의사에게서 돌아오는 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핀잔뿐이다. 


어찌됐건 그 전문의는 나를 고치려고 노력했으니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환자로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머리를 쿡쿡 쑤시는 만성 통증에 시달리는,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나는 정말 간절하게 그 이상을 바랐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


하나님은 그 이상이 되신다. 성자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은 그냥 전문의가 아니시다. 그는 공감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결코 그냥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신다. 그리고 우리를 돌보신다. 이는 특별히 약하거나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위한 복음의 진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육신은 모든 믿는 자에게 깊은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고 그는 말한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2:14-18; 4:15-16)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우리가 겪는 슬픔의 골짜기를 앞서 지나셨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성육신(영원히 지속될 것이다)은 우리 구주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가 지니신 상처가 이 성육신을 증명한다.


이러하시기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른 종교의 신과는 확연히 다른 분이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냉담하거나 무정하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무심하게 계시는 분이 아니다. 결코 냉정하게 계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말이다. 당신이 지으신 세상에 왜 고통을 허용하시냐며 하나님의 면전에 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어 대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부르짖는다. 이러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고통이 있는 곳에 항상 계셨고, 지금도 계신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비통을 위로하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의 슬픔에 함께하시고 대신 슬퍼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겪는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그 고통을 온전히 겪어 내셨다. 그리하셔서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 


나는 33년 째 두통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적합하다며 허락하신 다른 극심한 고통들도 함께. 그리고 이러한 나의 나날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위로의 소망이 되신다. 나와는 다르더라도, 당신에게도 여러 가지 아픔이 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 달리 겪고 있는 고통도 있을 터이나, 우리가 비슷하게 겪는 것들도 있다. 상실, 고통, 슬픔, 불의 같은 것이 그렇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공통의 희망도 있다.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처럼 고난을 겪으셨다. 


아무도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신다


이 영가의 원곡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새찬송가 372장] 그런데 다행히 누군가 마지막 단어를 약간 수정하면서 더 나은 노래가 됐다.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누군가 내 고통을 아신다. 예수님이 아신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니) 고통도 아시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이 고통을 아시는 것은 그가 몸소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신의 이름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나는 내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안다.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이 (그리고 자녀들이) 겪는 고통을 아신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외로움과 배신의 쓴맛을 본 적이 있다. 임마누엘께서도 그러셨다. 우리 모두 우리가 지극히 사랑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 경험이 있다. 예수님도 그런 자리에 계셨다. 우리 모두 주렸고, 목말랐고, 유혹을 받았고, 맞아서 쓰러졌고, 두려워했던 적이 있다. 간고를 겪어 질고를 아는 이(Man of Sorrows)도 그러셨다. 


우리 모두 정죄 받고 오해 받은 적이 있다. 예수님을 악령이라 부른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모두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를 실망시킨 사람들이 있다.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해 보라(마 26:37-40). 우리 모두 괴로울 때 아버지께 부르짖는다. 십자가 위에서 구주께서도 똑같이 부르짖으셨다(마 27:46).


이러한 진실들에서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언제나 계신다. 이는 정말 경이로운 진리다. 그러나 성육신하셔서,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창조주께서 육신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그리고 계속 그 육신 가운데 계시겠다고 작정하셨다는) 사실은 이 경이로운 진리를 또한 우리를 위로하는 진리 되게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을 비교할 때 거기에는 위로가 있을 수 없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나 문제들에 집중할 때 거기에는 위로가 있을 수 없다. 위로는 이 사실에 있다. 정말 진짜 아시는 누군가 계시다는 사실에 있다.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원제: Some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염영란

이 영가의 원곡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그런데 다행히 누군가 마지막 단어를 약간 수정하면서 더 나은 노래가 됐다.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누군가 내 고통을 아신다. 예수님이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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