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
by Kai SoltauㆍMatthew Short2022-01-09

우리가 교회(the church)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 교회도 거기에 포함해서 그렇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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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척한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교회는 예배드릴 때 이렇게 니케아신경을 낭송한다. 이런 옛 신앙고백들을 암송하는 전통이 낯설거나 아니면 구식으로 보이는 복음주의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신조들과 신앙고백들과 교리문답들(신앙고백들로 통칭하겠다)을 낭송한다. 


탈교회, 탈기독교 현상이 뚜렷한 이 유럽 국가에서, 이처럼 신앙고백이 교회생활의 중심 리듬이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는 몇 가지 입장에 따라 그 의미하는 바에 차이가 있으며,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전통의 가르치는 그 원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성경이 공예배(corporate worship)에서 지켜야 하는 요소들을 규정한다고 확신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요소들이 취하는 형식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보통 우리는 매주 같은 예배모범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송축하고, 우리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공급하심을 찬양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숙고한다. 우리는 신앙고백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성경을 잘 요약한 이러한 내용들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교회(the church)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 교회도 거기에 포함해서 그렇게 고백한다. 우리 교회는 ‘거룩하다.’ 곧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보다 큰, 보편 교회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사도적이다.’ 곧 우리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렇게 신앙고백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성도들이 신앙고백에 따라 생각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 역사적 신앙고백들이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기도한다. 


거룩한 교회_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복음주의자들은 거룩함(holiness)을 점진적 성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거룩함은 교회의 구별된 특징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세상과는 다르다는 의미다. 보편 교회로서의 교회도 지역 교회로서의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을 떠난 시대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교회

그리스도인은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나그네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시어 우상숭배의 삶을 버리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라 하셨다(벧전 1:13-21; 살전 1:9-10). 


이곳 유럽에서 기독교의 원칙과 덕목은 더 이상 규범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것을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한다. 현대 유럽 문화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멍청함의 극치요,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현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마다 더욱 더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한다. 신앙고백들은 세상이 비정상 취급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시공을 초월하여 고백하고 증언하는 기독교의 자기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예배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 편에 서 있다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세상은 우리의 고백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고백에서 어떤 매력도 알아본다. 


거짓의 시대에 진리를 확신하는 교회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에 “모든 인간은 그들이 행세하는 대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썼다. 칭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그 가면과 우리 얼굴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중에서도 동료압력(peer pressure)이 가장 거물급 유혹 책략이다. 


그렇다면 근본 진리들을 다함께 고백함으로써 어떻게 우리는 세상의 악이 우리 마음속에서 정상으로 탈바꿈하지 못하도록 더 잘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나갈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영원히 살 것이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죄의 책임이 없다는 거짓 교리에 오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10명, 20명, 50명, 또는 500명의 성도들 앞에 서서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 다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세상의 교리를 물리치는 증언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그냥 그런 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분열에 맞서 다함께 하나 되는 교회 

세상에서 사람들은 코로나19나 정치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두고 의견과 입장이 분열되어 있지만, 우리는 힘써 하나됨을 유지한다는 교회 언약(church covenant)에 서약했다. 주일마다 우리의 신앙을 한목소리로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이 하나됨을 우리 마음에 뚜렷이 새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들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반기독교 문화가 득세하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독특성을 되새긴다.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구별됨을 보여 주며,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자비와 하나됨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따른다. ‘우리 교회 밖, 다른 교회의 그리스도인과도 “하나” 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보편 교회_하나님 백성들이 함께하는 교회 


신앙고백들은 또한 우리 모두가 보편교회의 구성원이라고, 곧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로서 우리는 하나라고 가르친다. 


“보편 교회”(catholic church), 이 용어는 약 주후 107년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 용어는 점점 그 인기를 잃었다. 우리는 ‘가톨릭’이라는 용어 대신에 “유니버설”(universal)이라는 용어를 선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우리를 로마가톨릭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타협은 다소 유감스럽다. 원래 “가톨릭”이 사용된 역사를 보자면, 이 용어는 ‘보편’을 뜻하기도 하지만 전체(wholeness), 함께함(togetherness)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중요한 사안들에서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전체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도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구원받은 모든 무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있다. 


겸손히 헌신하는 교회 

우리가 신앙의 근본들을 정기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힘써 낮추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빈 같은 국제도시에서, 우리 교회는 새로운 신자가 교회를 찾을 때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참된 교회는 아니다. 우리가 이 도시의 유일한 개척교회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목회자들과 교회개척자들도 알고 있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정해 두고서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예를 들어,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는 것은 곧 복음 안에서 그들과 하나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참된 교회라고 믿는다면, 교회생활의 매우 많은 것들이 쉬워질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아니라면 그런 세례는 다 무효일 것이니,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세례를 어디서 받았는지 물어 볼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모두 거짓 교회일 터이니, 다른 교회를 굳이 분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은, 특히 탈기독교 상황에서, 그들보다 앞서 사역한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해야 한다. 주님이 모세를 감추셨다면, 주님의 목적들은 단지 한 사람 또는 한 교회보다 클 뿐이다. 


역사에 뿌리 내린 교회 

보편 교회의 일부로서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형성하는 2000년 교회 역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역사가 맺은 많은 열매가 신앙고백들 안에 표현되어 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보편 교회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있는 교회들에서 교리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복음을 수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갈 1:8-9). 간단히 말해서, 교회가 성도들을 교리로 교육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오래된 이단들, 포장을 바꾼 새로운 이단들에 넘어가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고백들에는 내주하는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의 지혜의 정수(精髓)가 들어 있다. 아타나시우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토머스 크랜머,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 앤드류 풀러, 존 브로더스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들이다. 21세기 신자세례파(Credobaptist[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성인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파로 유아 세례에 반대한다])라면 이 지혜의 사람들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성경적 진리들을 고백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기독교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신용을 쌓는다. 빈에 터를 잡은 신생 개척교회로써 우리는 전 세계 형제자매들이 갖지 못했을 수도 있는 엄청난 자유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누리는 만큼의 종교자유와 정교분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떤 종교단체가 컬트(cults; ‘사교집단’)나 섹트(sects; ‘폐쇄적 종파’)로 규정되면 불법 단체가 된다. 이것은 신생 종교단체(church innovations)에 대한 문화적 반감이 이 나라에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 교회(state church)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자유 교회들이 최근(2003년)에 종교 단체로 인정받았지만, 오스트리아 국민 다수는 이러한 종교 모임들을 여전히 신생 종교단체 아니면 사교집단 비슷한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17세기까지 올라가는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를 어떻게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스트리아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1689년 제2차 런던 신앙고백(1689 Baptist Confession of Faith)을  공포하고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용기를 얻는 교회 

주일마다 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교회는 많지 않는 성도들의 무리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성경을 믿지 않고 고백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시간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함께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 중에 신앙고백을 낭송하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전 세계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교회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신앙고백을 시작함으로써 큰 용기를 얻는다. 


사도 교회_성경에 기초한 교회  


역사적 신앙고백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낭송하며 교리문답을 배우는 것은 곧 신약과 구약의 진리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세대를 가르치라고 명한다(신 6:4-9). 신약에서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했다”(행 2:42).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우리의 교회생활에 통합함으로써, 우리는 교회(the church)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님께서 그리고 주의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받고, 지키고, 물려주어야 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한다. 


진리를 물려주라는 명령을 따르는 교회 

역사적 전통들을 통해 내려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마음을 다하고”(신 6:5), 하나님의 진리를 “자녀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7), 그럼으로써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에 몰두하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4:11-14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각 교회의 “목자-교사들”에게는 신령한 진리를 교인들, 곧 그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기본 진리들 안에서 제자로 훈련받는 교회 

“똑같은 옛 신앙고백”을 계속 고백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기계적인 고백이 되고 말 것이라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일마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긴다는 것은 곧 축복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거야, 그렇지?”하고 자신을 점검할 수도 있고, “내가 정말 이것을 믿고 있을까? 내 삶과 행동은 내가 바로 전에 함께 고백한 것을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을까?”하고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도전을 줄 수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가! 이 진리를 얼마나 더 고백해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까? 또 사도신경의 두 번째 행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 고백을 할 때면 나는 ‘이번 주에 나는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모하고 또 얼마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교회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사역자의 권위” 곧 초대 교회가 “신앙 규칙”이라고 불렀던 것을 대부분 잊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권위는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위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독점한다는] 성경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는 대조된다, 사역자의 권위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이나 요약, 해석의 열쇠를 마련해 준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성경 자체에서 비롯되지만, 모든 신학은 결국 성경의 진리를 체계화하고 종합하기 위한 범주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함축하는] 위격의 연합(hypostatic union), [첫 창조에서 인류의 머리인 아담과 새 창조에서 구속받은 인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함축하는] 언약의 대표성(federal headship) 같은 신학 개념들을 우리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신앙고백들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나타내는 신앙고백들에는 권위가 있다. 이 사실은 신앙고백들은 성경에 불필요한 것들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없애 준다. 오히려, 많은 신앙고백들은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성경적 깊이를 가진다. 


진리 안에서 강해지는 교회 

주일 설교에서 가르칠 만한 아주 간결한 진리의 공식 같은 것을 찾으려 할 때가 있다. 이번 주일에 에베소서 4장 11-16을 설교하려 한다고 치자. 설교자는 성도가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 안에서 세워 나가도록” 부름 받았는지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가르침을 거의 300년이나 된 이 교리문답으로 보충하여 설명할 것이다. “가시적 교회가 무엇입니까?” “가시적 교회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있고, 참된 복음이 설교되고, 세례와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는 모임입니다.” (1693년 발표된 벤자민 키치 교리문답 제105 문답니다.) 


결론 


모든 지역 교회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도성이 되어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터를 잡아야 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 신조들, 그리고 교리문답들은 우리가 정체불명의 신앙고백들, 편협한 성경주의, 연표에 기댄 속물근성(chronological snobbery[이전 시대의 사상이나 학문보다 현 시대의 것이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 준다. 역사적 신앙고백들, 신조들, 그리고 교리문답들은 교회가 그 신앙고백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편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핵심이 되는 방편이라고 확신한다. 



원제: Confessing the Faith: The Place of Confessions in Church Life

출처: www.9marks.org

번역: 서은성

모든 지역 교회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도성이 되어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터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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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ai SoltauㆍMatthew Short

케리 솔타우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Christus Gemeinde Wien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Evangelium 21과 Langham에서 이사로 섬기고 있다. 매튜 숏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Christus Gemeinde Wien 교회에서 부목회자로 섬기고 있으며, 향후 목회 활동을 위해 후원을 모금하고 있다.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학위과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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