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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예수님을: 새해를 위한 ‘맥시멀리즘 기독교’
by David Mathis2022-01-01

예수님은 빈약한 영성, 미니멀리즘 신앙에 안주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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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침체되어 있을 때도 약해져 있을 때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손을 능히 잡아 주신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한 채 겨우 버티고 있는 우리 영혼을 온유와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신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꺾어 버리지 않으신다. 꺼져가는 우리 영혼의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 그리고 은혜로우신 예수님은 우리가 ‘적당히’의 상태(그럭저럭 적당히 믿고, 적당히 소망하고, 적당히 사랑하기)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메말라 가는 우리 영혼의 저장고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빈약한 영성, 미니멀리즘 신앙에 안주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요구하시고, 더 많이 약속하시고, 더 많이 힘주신다. 


성숙하고 건강한 기독교는 맥시멀리즘을 추구한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사모한다. 덜 사모하지 않는다. 거듭한 사람들은 최소한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리길 원한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믿고, 더 많이 소망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한다.


때가 이르면, 성령이 내주하시는 마음은 곤궁과 결핍에서 더욱, 더욱, 더욱 회복되어, 예수님을 더욱 분명히 보고, 더욱 깊이 사랑하고, 더욱 가까이 따르게 된다. 


묵은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밝아오는 지금, 우리는 최소한으로 성경 읽고, 최소한으로 기도하고, 최소한으로 교제하려고 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새해에 예수님을 더욱 원한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존귀


맥시멀리즘의 열망이 빌립보서 1:22-26 만큼 빛나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갇혀 있던 곳이 어디였든 바울은 해방의 날이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이 서신에 담아낸다. 곧 판결이 내려질 것이고, 그러면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아니면 죽음을 통해 이 땅의 삶에서 풀려날 것이었다. 바울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란 곧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는 죽는 것이 “훨씬 나았다”(빌 1:23). 


그의 가장 큰 바람이요 그가 개인적으로 원한 것은 가능하다면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했다(빌 1:21).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원한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쳤다. 바울은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시려는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삶의 여정과 본을 따르는 것조차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종종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남겨 두었다. 바울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현재로서는 자신의 소명이라고 확신했다(빌 1:24-25).

 

그러면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의 새로운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고”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이 새롭게 펼쳐질 그의 삶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밝아 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은 빌립보서 1:22-26에 나오는 바울의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기독교’(Maximalist Christianity) 비전을 연마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일 것이다.


열매 맺는 수고


먼저, 바울은 열매 맺기에 힘쓰기를 강조한다.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빌 1:22).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한껏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성령의 능력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삶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명령으로 여겼던 것이다. 특별히 사도로 살아가는 삶이 그러해야 했지만, 이는 또한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은 젊은 목사요 자신이 후견하는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그는 열매 맺는 사도들을 기대하면서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온 교회가 열매 맺는 일꾼 되기를 바랐다. 


열매 맺는 수고는 마법 같은 것은 아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부르시고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그것을 행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신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진정으로 신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또한 그 열매가 우리가 원할 때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뚝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울 수는 있다. 진정한 수고는 배움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다. 진정한 수고는 힘써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한다. 우리의 에너지와 노력을 투입한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게 한 걸음씩 밟아 나가고 점차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과 행동에 헌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으로 우리의 수고에 힘을 실어 주시고, 당신의 때에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진보와 기쁨


바울은 더 나아가 “이 유익한 수고”는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라고 25절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뻔뻔하게 자기를 홍보하는 우리 시대에 특별히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울의 열망 가운데 있는 타자성이다. 이것이 참으로 상쾌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의 열망, 특히 미국인의 열망이 우리 영혼에 슬며시 스며들어 겉보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열망처럼 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다르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다른 사람들을 위함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바울은 삶은,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증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바쳐진 삶이다. 바울은 그럭저럭 살지 않는다. 그는 영적으로 최소한의 것만 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계획은 한두 가지의 말이나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가 도모하는 것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고후 9:8).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한 수많은 행동과 말로 넘쳐흐르기를 소망한다. 그를 움직이는 열망은 최선을 다하려는 열망이요 타인을 지향하는 열망이다. 


최고의 자랑거리


마지막으로, 우리는 26절에서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을 발견한다.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이 땅에서 지금은 계속 살아갈 것인데,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석방되면 빌립보를 다시 방문할 예정인데, 그의 계획은 명백히 맥시멀리즘을 지향한다. 그의 계획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셔서 그가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여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살아갈 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하려 함”이었다. 말 그대로 “풍성한 자랑”이다. 그가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 “그들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럭저럭 자랑거리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다. 자랑이 넘쳐나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자랑이 될 만큼만 최소한의 노력과 에너지만 들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최대한의 수고와 에너지를 쏟겠다는 뜻이다. 


최소한을 택하든, 최대한을 택하든, 우리는 새해에 선택한 만큼의 소망과 꿈을 갖게 될 것이고, 그만큼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영혼이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면, 낚싯줄을 던져 넣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도 박탈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랑거리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깎아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염력이 강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에 주목해 보자.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되고, 우리의 남은 삶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바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이유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풍성한 이유가 된다.


기쁨의 촉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과 나의 기쁨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기쁨의 촉매가 되어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한다. 또한 그리하여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며, 이로써 더욱 풍성해진 우리 삶의 향유를 그리스도께 부어 드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새해는 우리가 바울처럼 마음을 다질 기회가 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늘 해 오던 그런 새해 결심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풍성한 기쁨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극대화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에게 베푸실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많다.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번성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 은혜 말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바칠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러한 맥시멀리즘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를 미니멀리즘의 눈으로 볼 때는 매력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원제: More of Jesus: ‘Maximalist Christianity’ for a New Year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정은심

최소한을 택하든, 최대한을 택하든, 우리는 새해에 선택한 만큼의 소망과 꿈을 갖게 될 것이고, 그만큼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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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vid Mathis

데이비드 마티스는 desiringGod.org의 주필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Cities Church의 목사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