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그네로
by 김형익2022-01-15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우리는 기독교의 성장 시대를 뒤로하고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닌 거류민과 나그네로, 다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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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기독교가 주류가 된 시대, 소위 크리스텐덤이라고 불리는 세상을 살아온 기독교가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는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벧전 2:11-12). 1970년대 이후 급성장하기 시작한 한국 교회가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 보여 준 모습을 돌아보자. 어느 새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가 싶더니 성시화운동의 기치를 내거는 정치권과 교계 인사들이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 1970년대 이전의 한국 교회는 불신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를 많이 말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지나면서 한국 기독교는 사회의 주류가 되어 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땅의 불신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과 관심과 가르침을 점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눈치를 보던 마이너리티 시절은 지나갔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은 의도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우리는 기독교의 성장 시대를 뒤로하고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닌 거류민과 나그네로, 다시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옛 시대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거나 현 시대를 한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맞닥뜨린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선교적 소명을 감당한다는 점에서 볼 때, 과거 1970-80년대 보다 더 어려운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구 기독교가 크리스텐덤의 시대를 지나 탈기독교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우리의 선교적 소명을 감당하는 데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지금 들어선 이 세상은 우리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짜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아닐까?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로서 나그네와 거류민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아닐까? 


거류민과 나그네


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정체성은 분명히 그리고 언제나 거류민과 나그네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밝혔다(벧전 1:1). “나그네”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지만, 이 표현은 하늘에 본향을 두고 잠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의 정체성을 염두에 둔 영적,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이너리티로 존재해야 하는 지금 이 시대에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성경을 오독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직면하고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거류민과 나그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담지한 표현이다. 베드로전서의 일차 독자인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은 사도가 말하는 나그네로서의 신자의 영적인 정체성을 오해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고 사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거류민’(파로이코스)은 자기 집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인데, ‘더부살이를 한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리스도인의 집은 하늘 본향에 있기에, 우리가 잠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거류민일 수밖에 없다. ‘나그네’(파레피데모스)는 외국에 머무는 임시 거류자를 지칭한다. 사실, 사도 베드로가 세상 속의 신자를 가리켜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한 것은 그만의 독특한 관점은 아니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여기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등을 가리킨다. “외국인”(크세노스)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다. 주인이 아닌 손님, 낯선 곳, 낯선 문화, 낯선 언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외국인이다. ‘나그네’(파레피네모스)는 사도 베드로 가 말한 나그네, 곧 임시 거류자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을 쓸 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헷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히 11:9) 이들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보여 주는 거주 방식이었다. 윌리암 레인(William Lane)은 히브리서 주석에서 “(장막에 거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문화 속에서 영구적인 정착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은 자신의 영원한 본향,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면서 드러내는 가시적 삶의 방식, 곧 장막에 거주한 삶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일종의 ‘증거’였다는 것이다. 나그네 됨은 신자들의 정체성이라면, 장막 생활은 그 정체성에 대한 증거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복음 증거를 말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잃어버린 증거 방식이다. 사도 베드로나 히브리서 기자의 논지는 나그네의 정체성은 신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세상 앞에 증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나그네의 삶의 현실을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수자로 살아야 했던 초기 교회의 성도들과 달리,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에게는 직면하기 불편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당신과 나에게도 말이다.

 

긴장: 시민이면서 외국인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일은 무엇보다 불편한 삶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불편함을 전제하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편안해지는 것과 나그네가 되는 것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제럴드 싯처는 ‘회복력 있는 신앙’에서 초기 교회 신자들의 삶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산다.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외국 땅이 이들의 조국이지만, 모든 조국이 이들에게는 외국 땅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세상은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우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선한 행실, 그리고 삶의 방식의 증언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의 방식이 육체의 정욕(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면(엡 2:3),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신자들은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벧전 2:11). 악행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는 세상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도록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불편함을 신자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유수자로 하나님의 은혜 증언하기


신자는 거류민과 나그네이자 동시에 모범 시민으로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미 탈기독교 시대에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1989년에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을 공저하면서, 신자는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나그네 된 거류민이라고 말했다. 월터 브루그만이 구약 시대에 바벨론에서 살아가던 유대인과 같이, 이 세상의 신자들은 “유수자”(exiles)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이 주제에 접근하고 신학을 하는 일에서 선교사들과 선교학자들은 유리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접근하기에 최적화된 사람들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의 방식을 적대적인 세상 앞에 보여 주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신자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의 신학을 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조국 땅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던 우리의 역사적 경험, 슬픈 우리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 살게 된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삶의 역사는 우리가 나그네의 신학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시대가 어렵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우리가 나그네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복음 안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이 세상 앞에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신자는 거류민과 나그네이자 동시에 모범 시민으로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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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