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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고통스럽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
by Marshall Segal2022-02-18

인내해야 하는 쪽을 우리가 좋아서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가 필요한 상황을 선택하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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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patience)는 우리가 칭송하는 덕목, 심지어 갈망하는 덕목이다. 멀찍이 있을 때는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내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이것 때문에 우리 스케줄이, 우리 계획이, 우리 일상이 망가질 것 같으면―인내는 이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인내는 우리 삶이 혼란스럽고, 계획이 지연되고, 실망스러운 일이 생길 때 비로소 그 존재의 필요성이 드러난다. 인내는 치열한 삶의 전투 현장에서 길러진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내를 배우기 어렵다. 그리고 대부분 인내가 필요한 상황은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보통 편리하고,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좋아한다. 인내해야 하는 쪽을 우리가 좋아서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가 필요한 상황을 선택하실 때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신다.


조급함(Impatience)은 우리 삶을 위하여 정해 두신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우리 태도에서 생겨난다. 조급함은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쟁이다. 반면에, 인내는 전혀 다른 토양에서 자란다. 우리가 이해하고 주도할 수 없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자란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깊고 변함없는 신뢰에서 자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서 자란다. 


다시 말하면, 가장 깊은 인내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겸손히 바랄 때 자란다. 이는 곧 진정한 인내는 단순히 불편하고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러한 인내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는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에서만 가능하다(갈 5:22-23).


인내의 여러 면


우리 삶에서 진정한 인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실제로 어떤 것일까? 성경 어디에서 진정한 인내의 색깔과 질감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아래의 말씀이 나를 겸손하게 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인내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다.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게으른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

이런저런 부류의 사람들―게으른 사람들, 마음이 약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명령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을 오래 참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힘이 없는 사람을 도우라

힘이 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이들에게 우리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움이 필요한 약한 사람들, 어린이나 노인, 병든 사람이나,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곧바로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 경험해 봤겠지만, 사실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힘이 약한 사람들은 오랜 기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오랜 기간의 도움은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바울은 교회에게 힘이 약한 사람들을 훈계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도우라고 했다. 여기서 ‘돕는다’라는 말은 ‘붙잡다’ 또는 ‘헌신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약한 사람들을 도울 때에는 끈질기게 돕는 헌신이 필요하다. 수개월 또는 수년의 불편과 희생이 있을지라도 약한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 세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 5:6). 이 말씀을 깨달을 때 바로 그 인내가 나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약할 때에 그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7). 하나님께서 약한 우리를 택하셨다. 


하나님을 떠나면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는지 진실로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약함을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와서 백 번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약한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을 기쁨으로 신뢰하며 순종한다.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라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낙심하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 중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사람들이 있었다(살전 4:13-5:11). 절망 때문에 영적인 힘과 의지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들 역시 슬픔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의 도움이 더 필요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섬기는 일을 할 때 힘과 끈기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을 때도 많다. 그들은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절망하고,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도 버거워할 때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짊어져야 할 각자의 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정서적 또한 영적 필요를 돌보는 것은 시간이 지속될수록 버겁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역은 비범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함께 가는 사람들은 험난한 역경을 통과하면서 초월적 인내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돌보고 있는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 40:29-30)

누구든지 이 놀라운 새 힘을 경험한 사람은 마음이 약해진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동일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누군가에게 새 힘을 주시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사실 살다 보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낙심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서로의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고통을 견디고, 유혹을 이기며, 사랑으로 희생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되어 사역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인내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게으른 사람을 훈계하라 

게으른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살후 2:1-2; 3:6).


게으른 사람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일할 수 있고, 더 도울 수 있고, 더 분명히 기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는 누군가 그들을 대신하여 더 수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우리가 게으른 사람들 때문에 더 수고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이를 참아내기란 정말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게으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인내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그는 게으른 사람들을 책망했다. 그들에게 경고했고, 질책했고, 그리고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때로는 그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고(살후 3:10-11), 그들을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바울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라고 가르쳤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엄한 말을 하거나, 아픔이 될 수도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에는 인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이 때에도 인내하라고 가르쳤다. 


왜 인내해야 하는가?

우리가 게으른 사람들을 훈계할 때에도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죄인이기에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게으름―또는 다른 사람들의 탐욕, 또는 다른 사람들의 정욕, 또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 또는 다른 사람들의 허영―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악해질 수도 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자비를 베푸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을 향하여 인내하지 않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들을 훈계하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딤전 1:15-16). 

우리는 누군가를 책망할 때에도 반드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들과 동일한 죄인일 수 있다는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인내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책망해야 할 사람들에게까지 우리는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가? 첫째, 좋은 책망은 그 자체로 인내의 증거이다. 사실 죄인들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길이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실로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며 오래 참으면서 부드럽게 책망하고 꾸짖는 것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 책망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희망도 담겨 있다. 


책망하며 인내하는 것은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성화는 매우 고통스럽고, 때로는 극도로 천천히 이루어진다. 우리는 게으른 사람이 순식간에 부지런해지고, 교만한 사람이 즉시 겸손해지며, 화를 잘 내는 사람이 곧바로 온유해지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즉각 순수해질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우리는 죄의 습관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들의 죄에 대해서 가볍게 지나쳐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찾아가고, 경고하고, 간청하고, 필요하다면 날카롭게 꾸짖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화는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꽃을 피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씨앗을 심는다.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참아 주시는 하나님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을 책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우리는 반기겠지만, 오래 참으면서 책망해야 한다면 그때도 반길 수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죄인을, 아니 나와 같은 죄인을 오래 참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렇게 드러내셨다.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출 34:6).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하실 만한 모든 이유와 권리를 가지고 계시지만, 노하기를 더디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고 계신다. 베드로후서 3:9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풍성한 인내를 보여주신 후에 우리에게도 인내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렇다고 인내가 쉽다는 말이 아니다. 인내는 분명히 어려운 것이다. 출퇴근길 교통정체나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는 불안한 시기를 보낼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인내는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희생과 굴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인내는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하나님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오래 참으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인내의 고통 속에는 사실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목적이 있다. 바로 이 인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의 은혜와 능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원제: Patience Will Be Painful: How to Love the Hard-to-Love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박광영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하고 풍성한 인내를 보여주신 후에 우리에게도 인내를 요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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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