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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밍 러틀리지의 ‘십자가 처형’을 읽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by Andrew Wilson2022-04-11

신학적으로 깊고 아름답게 쓰였을 뿐 아니라, 목회적이고 학술적이며 또한 에큐메니칼적이고 복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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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밍 러틀리지의 ‘십자가 처형’(The Crucifixion: Understanding the Death of Jesus Christ)은 특별한 책이다. 신학적으로 깊고 아름답게 쓰였을 뿐 아니라, 목회적이고 학술적이며 또한 에큐메니칼적이고 복음적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성공회 신학을 담고 있지만, 당신이 아는 것과는 다르다. 이 책은 스티븐 웨스터홀름(Stephen Westerholm),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 케이트 손더레거(Kate Sonderegger),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 그리고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처럼, 이와 비슷한 종류의 책을 거의 지지하지 않는 학자들의 추천까지 받았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잇는다. 그럼에도 스토트의 이 책과는 전혀 다른 책이다. 풍부함뿐 아니라 회복을 모두 아우르는 무언가를 십자가로부터 찾고 싶은 독자라면, 톰 라이트가 ‘혁명이 시작된 날: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에서 제안한 것을 잊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할 다음 열 가지 이유는 특별한 순서에 따라서 구성된 게 아니다. 


1. 아름다운 연구와 학문적 아름다움


이런 수준에 다다른 책은 거의 없다. 설교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쓴 러틀리지는 이미지와 파토스, 생생한 묘사 및 현대적 적용으로 내용을 가득 채웠다. 근본적 악이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해 서술할 때, 우리는 수학 문제를 푸는 누군가를 느긋하게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보다는(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기는 하지만), 중차대한 일의 성패가 걸린 상황이 주는 깊이와 강도가 온몸을 감싸는 극적인 국면에 몰입된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저자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놀랍도록 폭넓은 이차 문헌을 다루며, 이 중 대부분에서 러틀리지는 복잡한 토론을 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 책의 집필에 거의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는 저자의 고백이 그래서 그리 놀랍게 들리지 않는다. 


2. 논증의 중요성


러틀리지의 중심 논증은 옳고 매우 중요하지만, 종종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되거나 완전히 거부되기도 한다. 두 문장으로 하면 다음과 같다. 


유월절 어린양, 광야로 쫓겨난 염소, 몸값, 대속물, 전장의 승자, 대표자, 이 모든 것은 다 각각일 때뿐 아니라 또한 합쳤을 때에도 나름의 자리를 갖고 있으며, 그 중 하나라도 빠지는 경우에 십자가의 의미는 줄어든다. 우리는 이 모든 성경적 이미지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러틀리지는 불경건한 자의 칭의(또는 “교정”)야말로 십자가를 상징하는 여러 이미지를 관통하는 십자가의 근본적인 주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모든 이미지에 적절한 무게를 부여해야 한다는, 무려 수백 장에 걸친 내용을 서술한 이후에야 이 주장을 펼친다. 


3. 성경적 이미지와 모티프에 둔 중점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가진 다양한 성경적 이미지와 모티프를 확장해서 다루는 내용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결과 그 이미지와 모티프를 더 생생하게 만들고 또한 비판이나 왜곡으로부터 보호한다. 그렇게 하는 중에 러틀리지는 반복적으로 파(party)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녀의 주장은 때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 어떤 때는 고도의 자유주의자, 그리고 가끔은 전통주의자처럼 들린다. 


러틀리지가 주로 초점을 맞춘 여덟 가지 주제는 유월절과 출애굽, 피의 희생, 대속(ransom)과 구속, 대 심판(The Great Assize), 승리자 그리스도, 지옥으로의 하강, 대속, 그리고 요약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로 광대하게 속죄 이미(러틀리지는 “이론”이라는 단어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를 자세하게 다룬 다른 책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이다. 이 여덟 가지의 주제를 다룬 각각의 장은 하나같이 설명의 수준을 넘어선다. 모든 장이 해당 주제를 성경적 주해, 역사적 분석, 현대 세계 및 설교적 감각과 어우러져 생생하게 빛을 발하도록 한다. 


4. 필요하다고 느낄 때 자신의 전통까지도 기꺼이 찌르려는 저자의 의지


각주에는 페미니즘, 절대적 비폭력, 르네 지라르 또는 재세례파의 성경 해석, 이머징 교회, 결혼의 재정의 등등 러틀리지가 일반적으로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종류의 경향과 유행에 대한 날카롭고 종종 재미있는 비평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죄의 심각함, 하나님의 공의, 형벌과 같이 오히려 성공회 신자들이 항상 소중히 여기지 않는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또한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 신학자를 칭찬한다. 안셀름 방어에 한 장을 전부 다 할애했을 정도이다. 그녀는 또한 다니(R. L. Dabney)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이 저자가 장 칼뱅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다. 거기에 더해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다룰 때, 저자는 마르틴 루터를 강조했고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더 잘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이 예언자적 에큐메니즘은 두 가지 단계에서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러틀리지가 자신이 속한 전통뿐 아니라 다른 기독교의 전통이 가진 장단점을 모두 다 제대로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보다 더 도전적으로, 개혁주의 개신교도를 포함하여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주장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모델을 제공한다. 다른 전통에 도전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전통에 도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5. ‘십자가의 비종교성’에 관한 2장


2장 하나만으로도 책값을 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장은 매력적이고 감동적이며 감정적으로 독자의 모든 에너지를 몰입시키는, 말 그대로 역작이다. 교회 역사의 처음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정확한 의미보다 십자가의 추문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고 러틀리지는 지적한다. 십자가 처형을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의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살펴본 그녀는 십자가가 왜 진리인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나는 이 책보다 십자가 속에 담긴 수치와 야만성과 순전한 비종교성을 더 잘 전달한 그 어떤 책도 읽은 기억이 없다. 


6. 그녀가 다루는 십자가 처형은 철저하게 삼위일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러틀리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뻔한 사건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이고 놀라운 내용으로 그 대목을 결론짓는다. 


측량할 수 없는 흑암 중에서 허덕이는 이 세상의 죄를 지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오셨을 때 그를 대신할 자는 없었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양이었다.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바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물이 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 소위 말하는 아케다(Akedah)와 십자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단지 그의 아들만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단번에” 완전한 번제가 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한 뜻이 되어 함께 제정하셨다.


7. 성경과 교부에 비춰볼 때 저자가 다루는 대속 주제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서평을 읽는 대부분은 아마도 그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지만, 안셀름 또는 찰스 호지(Charles Hodge)가 주장하는 대속 주제에 관해 여전히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러틀리지는 불충분한 삼위일체론과 불충분한 서사적 접근을 견지하는, 보다 보수적인 전통을 향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안셀름과 호지가 주장하는 대속론에 대한 몇 가지 설득력 있는 폭로까지도 적절하게 관리한다. 


서사 형식으로 제시될 때 대속이라는 주제는 비할 데 없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러틀리지는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이기라도 한 것처럼, 캐트니스 에버딘(Katniss Everdeen)를 해당 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결론을 피하기는 어렵다. 대속이라는 주제에 대한 반대의 상당 부분은 죄의 지배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근본적인 인식을 향한 혐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8. 바울의 ‘묵시적’ 메시지에 관한 설명


복음 이해에 필요한 바울의 묵시적 메시지에 대한 러틀리지의 설명과 함의는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명확한 주장 중 하나이다. 물론 러틀리지는 나보다는 루이스 마틴(Louis Martyn)과 그와 비슷한 신학자로부터 더 설득된 게 분명하지만, 이 책이 전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내용이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왜 중요한지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탓하기는 어렵다. (곧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부분에 관한 그녀의 설명이 내 눈에는 부적절하게 보인다.) 바르트-케제만-베커-마틴(Barth-Kӓsemann-Beker-Martyn) 모두의 패러다임을 모두 다 수용하는 복음 설교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독자라면, 승리자 예수에 관한 9장부터 읽는 게 좋다. 


9. 신정론과 악에 관한 부분


지옥 강하(10장)에 대한 흥미로운 장에 포함된 이 섹션은 이 주제가 나올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용의자들(욥, 볼테르, 도스토예프스키, JL 매키(JL Mackie), 프리모 레비(Primo Levi),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 모두를 다 통합하는 수준 높은 에세이를 담고 있다. 그 결과 러틀리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쉬운 답변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장을 던진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스스로 가진 생각과는 달리 앨빈 플랜팅가 또는 팀 켈러와 그다지 멀지 않다. 아무튼 이 부분은 이 책에서도 특히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10.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보호막 밖에 있는 기독교 서적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훌륭한 주석을 언급하는 각주를 읽을 때 이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언(Aune), 빌(Beale), 마운스(Mounce)를 인용하는 대신 쉬슬러-피오렌자(Schussler-Fiorenza), 부삭(Boesak), 만지나(Mangina)를 언급한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건 사실 대단한 일이다. 한 번은 어느 성공회 목사가 내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존 파이퍼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목사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요? 풍경 예술가요?”)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풍성함과 깨달음을 준다. 그녀는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한 예시를 위해 현대 철학을 사용한다. 인용된 예시의 범위는 내게 익숙한 기독교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종종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속죄는 일반적으로 (백인) 복음주의 신학의 경우보다 훨씬 더 인종 관계 및 시민권과 관련이 있다. 각주는 데스몬드 투투와 달라이 라마의 서로 다른 웃음을 대조할 뿐 아니라, 고통의 신학에 대한 의미를 강조한다. 


러틀리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볼 수 없는 많은 것을 보는 그녀의 능력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가치 있게 만든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독자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흠이 있는, 그러나 여전히 탁월한


러틀리지의 ‘십자가 처형’은 완벽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책은 거의 없다. “죄들”(sins)과 “죄”(Sin)의 구분을 과장하는 바람에 러틀리지는 전자가 바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이미 사이먼 게더콜(Simon Gathercole)의 최근 작업에 의해서 명확하게 비판받았다. 그녀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마치 우리 각자가 “선과 악이 섞인 상태”인 것처럼 이해한다. 이게 신학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을지 몰라도 주석적으로 볼 때에는 무리한 해석이다. 톰 라이트와 연관된 부분에서는 너무도 편향적이어서 저자가 라이트의 책이 아니라 라이트 작품에 대한 비평서만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이다. 고먼(Gorman), 존슨(Johnson), 라이트(Wright), 캠벨(Campbell) 및 다른 많은 학자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에베소서가 바울이 쓴 게 아니라는 주장을 너무 쉽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골로새서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 결과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주제를 이차적인 것(second-order)으로 격하시킨다. 그녀는 고린도전서 5장이 말하는, 사람이 “사탄에게 넘겨졌다”라는 부분을 지옥이라고 꽤나 그럴듯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지옥은 이제 끝에서 두 번째이자 일시적인 장소가 된다. 그녀는 또한 앨빈 플랜팅가가 펼치는 변론(defense)과 신정론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놓쳤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약 속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종말과 심판에 관해서는 제대로 (어쩌면 전혀) 다루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결론이 보편구원론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그렇다고 명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는 마지막 장이 러틀리지의 주장을 크게 손상시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깊이, 통찰력, 심오함, 그리고 시적 아름다움까지 담고 있다. 


보편구원론의 문제뿐 아니라 내가 이 책과 관련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에도 불구하고, 플레밍 러틀리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깊은 차원에서 풍부하게 탐구했다. 그녀는 이 주제에 관한 훌륭한 책을 썼다. 당신도 이 책을 읽어야한다. 



원제: 10 Reasons You Should Read Fleming Rutledge’s ‘The Crucifix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마지막 장이 러틀리지의 주장을 크게 손상시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깊이, 통찰력, 심오함, 그리고 시적 아름다움까지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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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ndrew Wilson

엔드류 윌슨은 영국 런던에 위치한 King’s Church의 교육목사이다. 'Echoes of Exodus'를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공동으로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