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감정론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Joe Rigney2022-08-25

참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우리 영혼에 새로운 기초를 놓는 성령의 구원 사역의 결과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은 엄청난 책이다. 무엇보다 잠재적으로 파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제기하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를 구별하는 표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라면 피할 수 없다. 내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위선자인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내 믿음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 거짓을 밝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책에 잠재적 파괴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파괴는 좋은 것이다. 내 믿음이 근본적으로 잘못 인도되고 있거나 부족하다면 또는 나아가서 아예 거짓이라면, 마지막 심판에서 예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심판 날 그리스도로부터 거부당해 황폐하게 되는 것보다는 에드워즈의 이 책 때문에 황폐하게 되는 게 훨씬 낫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복구가 가능하다. 회개는 여전히 가능한 선택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라면 회복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나 이 책에는 또 다른 이유로 인해 잠재적 파괴성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앙감정론은 18세기를 목사와 신학자로 산 진정한 천재가 쓴, 당시 분위기를 여실히 풍기는 복잡하고 정교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흥과 종교 체험, 도전받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대로 분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수십 년을 성찰한 신학적 결실이다. 같은 주제를 담은 에드워즈의 네 번째 책인 신앙감정론은 18세기 중반에 유럽과 미국을 휩쓴 첫 번째 대각성운동 직후에 쓰였으면, 그 부흥 운동이 제기한 여러 도전에 대한 그의 가장 성숙한 성찰을 담고 있다. 주제의 복잡성과 저자 특유의 명확한 산문은 이 책이 오해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 오해 때문에 우리는 황폐해질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우리의 신앙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그건 우리 믿음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에드워즈가 말하는 표시를 자신에게 잘못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면서 나는 지금 말한 두 가지 유형의 황폐함 또는 파괴성을 염두에 둔다. 필요하다면 첫 번째는 더 키우고 싶지만, 그럴 수 있다면 두 번째는 피하고 싶다. 이 목표를 위해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열 단계 오리엔테이션을 제안한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열 가지 항목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1. 구조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제를, 그러니까 대부분 경우에 진정한 종교는 거룩한 감정(affections)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감정이 의미를 정의한다. 2부에 들어서 저자는 신뢰할 수 없는 거룩한 감정의 열두 가지 표시(signs)를 서술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신뢰할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열두 가지 표시를 소개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용어의 정의, 신뢰할 수 없는 거룩한 감정의 표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표시, 이것이 이 책의 기본 구조이다. 


2. 감정의 의미


에드워즈에게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몸에는 외부 세계의 인상을 받아들이는 오감이 있다. 우리의 영혼 또는 마음(mind)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faculties) 또는 능력(powers)이 있다. 첫 번째가 이해력이다. 이해력은 우리가 지각하고, 분별하고, 보고, 또 판단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두 번째는 이해력으로 인해 지각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또는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의지력(will)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감정을 살펴야 합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보라색과 금색 유니폼을 입은 팀을 미네소타 바이킹으로, 그리고 녹색과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을 그린베이 패커스로 식별하는 것은 이해를 통해서 이뤄진다. 하지만 바이킹을 향해서는 응원의 함성을 보내지만 패커스에게는 야유를 퍼붓는다면, 그건 다 의지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의 성향이다. 의지가 가진 일부 성향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런 의지는 거의 의식하지 않고 이뤄진다(예를 들어, 오늘 어떤 양말을 신을지 선택하는 것). 그러나 또 다른 성향의 의지는 강하고 끈기 있고 역동적이다(예를 들어, 배우자 선택). 저자는 오로지 후자에 해당하는 의지만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의지를 더욱더 강력하고 분별 있게 활용하는 것이다. 


3. 감정의 중요함


감정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감정은 종종 인간 행동의 원천이 된다. 감정은 세상이 움직이도록 한다.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가 감정 없이 일한다면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행동에 활력을 주는 것은 사랑과 미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슬픔과 기쁨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이 마음의 근본 방향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원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내 감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4. 감정 평가


감정을 평가할 때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감정이 드러내는 즉각적인 강도보다는 습관적 감정이 가지는 고정성과 끈기, 강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에드워즈는 분명히 한다. 명료성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잘못 평가하지 않도록 한다. 번뜩이는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즉각적인 외적 효과((그중 일부는 성격과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로 감정의 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습관적 감정의 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도전을 거치는 내내 우리 마음이 바라보는 방향에 주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만나는 비정상적으로 나쁜 날에 (또는 비정상적으로 좋은 날에) 생기는 순간적 감정이 가져다주는 성급한 결론을 막을 수 있다. 


5. 믿을 수 없는 표시


우리는 에드워즈가 쓴 믿을 수 없는 표시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표시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삶에 믿을 수 없는 신호가 있다는 것은 결코 결함이 있다는 게 아니다. 단지 결론을 내릴 만큼 결정적이지 않다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이건 불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신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강렬한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표시이다. 한편으로는 강한 강도가 좋을 수도 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을 생각해 보라. 반면에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육체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임재를 접한 선지자는 엎드린다. 이것은 좋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정치 집회와 록 콘서트에서 기절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렬한 감정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표현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표시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정한 법칙은 다음과 같다. 불신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표시는 신뢰할 수 없다. 마귀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는 표시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런 표시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6. 믿을 수 있는 표시


열두 가지의 믿을 수 있는 표시에는 뚜렷한 진행 과정이 있으며 또한 몇몇을 모아 묶을 수도 있다. 지난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나는 그것들을 나무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네 가지 표시는 뿌리이다. 그것들은 나무의 기초가 되지만 종종 숨겨져 있고 식별하기 어렵다(특히 다른 사람들 속에서). 참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우리 영혼에 새로운 기초를 놓는 성령의 구원 사역의 결과이다. 이런 새로운 감각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가지는 도덕적 탁월함과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지식을 낳는 하나님의 거룩함 속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꿀이 달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꿀의 단맛을 맛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악마도 그 사실은 안다)과 그의 거룩하심이 주는 달콤함과 기쁨을 맛보아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더 깊고 체험적인 지식이며, 또한 진정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데에 필수적이다. 


뿌리에서 우리는 표시 5에서 7까지 해당하는 줄기로 이동한다. 진정한 종교적 감정은 이러한 표시가 “따라오게” 되어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맛보았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실재하심을 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 속 영원한 죄가 더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죄를 후회하는 게 아니다. 죄가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에 미워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우리의 본성까지도 변화된다. 


줄기에서 나오면 8에서 11까지의 표시로 이동하게 되고, 각각의 표시가 훨씬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은 예수님의 사랑과 온유와 자비를 반영한다.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양심은 남아있는 죄에 민감해진다. 거룩함의 추구는 포괄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남에게 소홀히 하면서 어떤 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모든 열매를 전반적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지금까지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마지막 표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모든 표시가 향하는 곳이 바로 이 표시이다. 가지에 달린 마지막 표시는 바로 거룩한 삶의 열매이다. 우리는 열매를 통해 어떤 나무인지를 안다. 이 경우에 마지막 표시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에 대한 보편적이고 진지하며 끈기 있는 순종이다. 보편적이라는 게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순종과 관련해 금지된 영역이 없으며, 순종의 예외로 두는 그 어떤 죄도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주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맛본 은혜의 열매, 나를 안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은혜의 열매를 드러낸다. 


7. 에드워즈의 통찰을 테스트하기


에드워즈가 특별히 강조한 특정 표시에 관해서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내 경험에 따르면 여섯 번째 표시와 관련해서 겸손에 대한 그의 조언이 항상 도움이 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그가 말하는 기본적인 요점,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법적 굴욕(우리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낌)과 복음주의적 굴욕(우리가 심각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괴로워함)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교만하지 않은지 또는 내가 겸손하다는 사실 때문에 설혹 도리어 교만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평가하라는 에드워즈의 권고는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 자기 성찰이라는 러닝머신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뿐 아니라, 내면만 관찰하다가 지칠 수도 있다. 이건 단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모든 지혜와 성경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 또한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글도 성경으로 검증해야 하며 그가 권유하는 적용 사항도 지혜를 활용해 적절하게 평가해야 한다. 


8. 몸과 환경, 그리고 죄


표시와 관련해 우리의 감정과 확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에드워즈가 몸과 환경, 그리고 죄를 지목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몸의 변화는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과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우울증(에드워즈가 멜랑콜리라고 부르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얼마든지 영향을 주는 신체적 측면이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사탄이 이러한 육체적 약점을 이용하여 지치고 우울한 성도를 공격한다고 말한다. 즉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위한 완전한 처방에는 영적 조언뿐 아니라 육체적 도움이 모두 포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에드워즈가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영적인 차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확실히 육체적 차원이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3부 시작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라.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상황과 죄가 우리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받은 은혜가 적고 깊은 죄에 빠진 사람이라면 구원의 확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전심으로 그분을 찾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은혜가 낮은 자의 눈에는 하나님이 마치 먹구름에 덮여 숨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은혜가 낮은 사람은 영적인 시력마저 흐릿하다. 따라서 먹구름과 흐릿한 눈이 뒤섞일 때 결코 하나님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그 어떤 처방도 그런 경우가 가져다주는 좌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는 없다. 유일한 치료법은 오로지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향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9. 확신을 구함


이제 구원의 확신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에드워즈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진술이 이어진다. 은혜와 확신이 부족해서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의심되고 두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이 책을 읽고 황폐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에드워즈가 이 책에서 한 다음 말을 기억하라.


각 사람이 죄악됨을 멸하고 은혜가 자라가며, 그 은혜를 활발하게 행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 성찰이라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고 중요한 의무이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의무이지만, 그것은 결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얻은 구원으로 만족하게 하는 주된 수단이 아닙니다. 확신은 자기 성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얻어져야 합니다다(신앙감정론, 195).


확신이 자라는 길은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다. 확신은 내면을 들여다봄으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감으로 생기는 것이다. 


10. 겸손한 자세


이 마지막 항목은 책에 관해서가 아니라 목회적 조언에 가깝다. 겸손하게 이 책을 읽으라. 다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려는 마음으로 읽지 말라. 사실 에드워즈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진정성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판단할 수 있겠지만, 타인의 진정한 거듭남 여부를 확실하게 아는 길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다. 결국 주님만이 당신의 양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진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책은 우리의 시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함으로써 그러한 확신에 이바지한다. 


이 책을 겸손하게 주의 깊고 또 현명하게 읽는다면,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혜로운 목회자 또는 상담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읽는다면, 이 책은 단지 파괴적인 것 이상이 될 수 있다.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선물을 진정으로 깨닫고 소중히 여기도록 인도하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원제: Religious Affection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확신은 내면을 들여다봄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감으로 생기는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Joe Rigney

조 리그니는 Bethlehem College & Seminary 의 학장이다. 지은 책으로는 ‘전투 이상: 정욕에서 벗어나 어떻게 승리와 자유 그리고 치료를 경험하는가(More Than a Battle: How to Experience Victory, Freedom, and Healing from Lust)’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