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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 하신 자리
by 정갑신2022-05-01

교회는 각 가정을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온전히 세워, 그 가정들이 세상을 제대로 만나 ‘있게 하신 자리에 서게 하는’ 허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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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주제: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삶과 역사의 모든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너를 불신하는 나를 믿느냐, 너의 생각도 옳을 수 있지만 내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느냐, 내 생각보다 너의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느냐, ‘나’를 믿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절망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믿음의 강도는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가 결정하고, 그 믿음이 어떤 강도냐에 따라 무엇이든지 시도하거나 참을 수도 있고, 반대로 매사를 불안하게 느끼며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믿음의 근본이 중요한데, 그것은 믿음의 대상에 관한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믿느냐(나 혹은 너 혹은 현실의 어떤 것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나’를 믿느냐) 하나님을 믿느냐로 갈라집니다. 사람들은 대개 ‘나’만 믿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나’를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 쉽게 좌절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나’만 믿습니다. 따라서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가 과연 각자의 ‘나’를 믿으며 사는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실제로 보다 근원적으로 파고들면, 우리는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에 대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나’를 못 믿으니, ‘너’도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결국 우리 삶에서는, ‘너’도 ‘나’도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어떤 작은 실제적인 행동이라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어떤 ‘막연한 우연’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방치된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연’에는 어떤 목적과 의미와 일관된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와 너, 그리고 현실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목적과 의미와 뜻을 갖지 못하는 ‘우연’에 인생을 맡기는 게 합당치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믿을 만하다고 판단될 때만 믿었던 게 분명한 삶에서 벗어나, 그래서 결국 ‘나’를 믿고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삶에, ‘하나님’을 믿는 삶에 자신을 던져볼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믿음이 우리를 찾아와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이런 이성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려고 시도해 보는 중이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어떤 대상을 믿느냐 하는 믿음’이 모든 선택과 결정을 결정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빚으시는 삶이라는, 새롭고 낯설고 두렵고 영광스런 그림에 자신을 던져 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하시는 말씀과 그의 뜻에 더 압도적인 무게를 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현실과 상황에 대한 나의 모든 판단보다 하나님 말씀의 판단에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이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말씀의 판단을 따른 결과를 두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을 발견하는 신자의 영광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따를 수 없고, 따르지 않으면 여전히 ‘나’의 판단 안에만 갇혀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새로움도 경험하지 못한 채,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신학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소위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를 믿겠다는 신학적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와 너와 세상이 결국 믿음의 대상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신학적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서 삶의 모든 결과물이 나옵니다. 독일이 만든 최초의 히틀러 관련 영화 ‘다운폴’(Downfall)은 히틀러의 마지막 10일의 행적과 심리를 다룹니다. 소련이 베를린을 침공하여 드디어 독일의 몰락이 임박한 순간,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은 베를린 시민들을 대피시키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때 히틀러의 신학적 판단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베를린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장렬하게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독일 국민의 명예와 안전과 영광에 열변을 토하던 그의 중심이 처음부터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신봉하고 괴테와 바그너와 니체에 심취하면서 우월한 종족의 보존 열망에 심취하는 동안, 자기 안에서 심각한 신학적 왜곡을 일으킵니다. 그에 따라 탁월성을 지니지 못하는 모든 종족은 소멸해도 괜찮다는 사이비적 환상에 사로잡혀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을 이유 없이 희생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히틀러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였습니다. 당대 교회가 시대와 시대정신을 복음적으로 제대로 해석하고 선포하지 못한 것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과 삶과 역사에 대한 교회의 복음적 해석과 그것을 좇는 개개인의 신학적 판단이 모든 상황의 희비를 가르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지식이나 경험, 혹은 기질과 습관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서는 나와 하나님 사이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는 신학적 판단이 작동합니다. 그리고 작동하는 신학적 판단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죄와 배제의 정신이 가정과 교회를 지배할 수도 있고, 헤아림과 포용의 영혼이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적인 고집으로 무장된 신학적 판단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느냐 아니면 복음적인 균형이 잡힌 신학적 판단이 내면에 스며들었느냐에 따라, 가정과 교회를 감싸는 분위기와 문제 해결 방식과 이후의 모든 결과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떤 신학적 판단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나누느냐에 따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과 역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적인 신학적 판단을 열망하고 추구하는 교회의 정신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매사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가 말씀에 근거한 건강한 복음적 신학에 기초하여 가정과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의 대유행과 같은 상황도 유사합니다. 그것은 일단 전염병의 문제지만, 전염병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와 전염병의 확산에 대응하는 방식과 태도는 결국 신학의 문제입니다. 자연과 사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어떠하냐에 따라 전염병을 인식하고 다루는 태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건강한 신학적 판단이 부재하거나 어떤 왜곡이 생긴다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안에서도 전염병에 관한 이슈들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작게는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고 상대하는 방식,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곤 하는데, 그 모든 방식 역시 교회가 말씀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선언하는 신학적 해석과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합니다. 교회의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정치나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기대어야 합니다. 권력과 친하려 하면 안 됩니다. 경제 논리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습관과 전통의 논리를 들이대도 안 됩니다. 독재적인 목회자 일인의 목소리나 스스로 주인 행세하려는 소수의 리더십의 독재적 결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몸이라는 기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듣는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예수님의 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신학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가정을 위해서도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 몸이 우리에게 오신 형식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따라서 교회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동행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몸이 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결국 교회에서 사람의 욕망으로부터 독립한 말씀이 건강한 방식으로 흥왕해야만, 그 말씀의 샘물로 가정이 살고, 그 가정이 또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도 그 샘물에 적셔진 성도들의 삶과 시대의 정신을 통해 생명을 얻고, 세상은 또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자원을 교회로 흘려보냅니다. 세상과 가정은 그렇게 교회를 통해 연결됩니다. 교회는 각 가정을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온전히 세워, 그 가정들이 세상을 제대로 만나 ‘있게 하신 자리에 서게 하는’ 허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저희 가정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장로님 한 분이 석류 한 박스를 보내 주셨습니다. 며칠 후 생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려던 차에 아내에게 석류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손에 빨간 물이 드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석류 씨를 일일이 발라 접시를 상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냉정했습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아… 그래? 알겠어….” 순간 실망했지만 내색도 못한 체하며, 고마워하는 칭찬에 대한 기대를 쓸쓸히 접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서운함이 올라왔습니다. 대개, 서운함이 마음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더라도 언행심사에 일정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도 마음을 애매하게 만들고, 주고받는 말에 은근슬쩍 묻어나옵니다. 그리고 적절한 표현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 한, 반드시 폭탄으로 터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즉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동시에 마태복음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사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해석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과 문맥에 따른 해석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이 세대가 아주 냉담해서 아무리 애를 쓰고 말씀을 전해도 반응이 없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이런 해석을 따른다면, 사랑의 섬김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아내를 정죄하고 서운해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정당해집니다. 아내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악한 심령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제대로 따르면 이 말씀은 더 이상 그렇게 해석되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었으면 불었지 꼭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줘야만 하는 건가? 왜 다른 사람이 반드시 내 뜻에 장단을 맞춰야만 한다고 기대하는 것인가! 이러한 해석입니다. 피리를 분다면 그냥 자기가 좋아서 부는 것으로 충분하고, 슬퍼서 운다면 슬픔을 울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충분하지 왜 다른 사람이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어지는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의 금식과 근검한 삶에 대해서는 귀신들려 미쳤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세리들과 어울리며 식사 교제를 나누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부패한 종교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패역하고 부패한 세대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그의 마음과 뜻에 따라 이해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고 기대하는 얄팍하고 고집스럽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바로 타락하고 악한 세대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석류를 깠으면 깠지, 굳이 내가 깐 석류를 아내가 먹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아내를 생각해서 석류를 까서 바친 것만으로 이미 내 마음은 완성된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오히려 묻지도 않고 준비해서 아내에게 먹으라고 요구했던 것이 미안한 일이 되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는 가정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떤 이해로 흐르느냐에 따라 우리 안에 신학이 형성되고, 그 신학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위험한 말을 정직히 한다면, 교회는 종종 가정 파괴의 주범이 되곤 했습니다. 경건과 헌신에 대한 교회의 해석이 성경적 해석 대신 전통적인 문화적 범주에 갇힌 것이었기 때문에, 소위 ‘교회 중심’이라는 이념을 통해 가정을 황폐하게 만들고 교회만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복음을 위해 부모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문맥을 따라 읽는다면 성경은 동시에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라고도 했습니다. 아내를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했고, 남편에게 범사에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들을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만 가정이 성경적인 가정이 되고, 가정이 왜 교회인지를 알게 되고, 그에 따라 가정에서 미움과 서러움과 분노와 원망의 샘이 그치고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샘이 솟을 수 있습니다. 부모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씀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지 미워하라는 말이 아닌 것을 우리 양심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문법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미워하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할 때는 문맥을 따라 읽는 것을 넘어, 성경 전체의 흐름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모든 성경 읽기의 큰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반이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오늘 내가 묵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나의 내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오늘 내가 묵상하는 중 내리게 되는 결정은 나의 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길일 수 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나의 내일에도 ‘인도하실’ 하나님이시다. 인도하신 하나님과 인도하실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가 오늘 나를 끌어가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내 앞에 있는 말씀은 나의 어제와 내일을 연결하여,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동시에 인도하실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는 능력이다. 더불어 내가 오늘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신실하게 인도해 오셨는가 하는 간증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오늘 나는 간증과 약속을 담은 자로 말씀 앞에 선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 앞에 서 있는 나의 자리가 지니는 메시지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내일의 교회’라는 책에는 노르웨이의 감옥 이야기가 나옵니다.[1]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면 그 존재목적을 합당하게 성취해야 한다는 면에서, 노르웨이의 그 감옥은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은 현실적으로 교화 공간이라기보다는 형벌 공간입니다. 그래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복수의 원칙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복수에 근거에 형벌 공간에서는 본질적으로 교화가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는 교도소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에 따라 복수의 원칙을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정치학으로 바꾼 감옥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범으로 운영하게 된 감옥의 공간은 연립주택 같은 생활공간이고, 수감자들은 일상의 생활인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공간적으로만 섬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육지에서 섬으로 연결하는 페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수감자입니다. 이 감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상호신뢰의 회복입니다. 삶의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깨닫게 하고, 이를 위해 서로 환대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교화를 지향하는 겁니다. 이에 따라 그 감옥 수감자들은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분노와 후회로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상호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중 다시 세상으로 복귀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교도소 출소자의 재범 비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교도소 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신뢰의 정서는 이미 1796년 한스 닐센 헤우게(Hans Nielsen Hauge)에 의한 말씀운동 복음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2] 말씀에 대한 한 개인의 진실된 헌신이 결국 결국은 사회구조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까지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대립의 감정과 정치적 야망의 찌꺼기들 대신 맑은 샘물 같은 말씀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흐르는 걸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습니다. 그 샘물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격려를 받을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일어나고, 교회가 얼마나 더 새롭게 될 것인지, 그리고 말씀을 좇는 성도들의 일상을 통해 세상에 어떤 아름다운 정서가 흐를 것인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런 기대 속에서 ‘가정과 교회, 교회와 세상’이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하고, 그 고민의 기반 위에서 우리 각자의 내면과 가정과 교회를 들여다보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우리 각 가정과 성도의 삶을 통해 맑은 샘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세상을 윤택하게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

1. 이 책은 조니 베이커(Jonny Baker)를 비롯해 영국교회선교회(CMS)의 훈련과 리프레시 운동을 이끌고 있는 13명의 저자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찾아가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원제 “Future Present”(현존하는 미래)가 암시하듯이, 이 책은 마땅히 이루어질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상상하고, 그 상상으로 가기 위해 현재 어떤 행동을 필요로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실천적으로 세상에 표현하고 선포하는 동안 비로소 세상이 변화된다는 입장에서, 혁신적인 교회운동과 말씀운동을 전개한다. 조니 베이커 외, 김준철 옮김, 내일의 교회, 성공회 브랜든선교연구소, 2020.


2. 로렌 커닝햄, 제니스 로저스,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The Book That Transforms Nations) 참조.  





대립의 감정과 정치적 야망의 찌꺼기들 대신 맑은 샘물 같은 말씀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흐르는 걸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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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갑신

정갑신 목사는 예수향남교회의 담임목사로 총신대 신학과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원,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9년 8월 예수향남교회를 개척한 후 예수향남기독학교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으며, (사)복음과도시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대답하는 공동체’, ‘사람을 사람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