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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을까?
by 박삼영2022-05-10

유다가 화석화된 게토 공동체의 비극을 겪은 다음 멀리 바벨론의 유배지에서 배제를 내려놓고 용서의 수용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그 순서를 따라 게토화된 배제의 늪을 지나가는 중이다. 교회는 유배지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담금질의 기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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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9:4-7



스카이캐슬


큰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그 주제곡도 매우 인상적이다. 제목이 “우린 다 거짓말을 해”(We All Lie)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 가수가 부른 줄 알지만, 한국의 어느 무명 가수가 불렀다. “우린 모두 거짓말을 하지. 진실을 말하자면, 우린 가끔 웃으며 쉽게 거짓말을 한다는 거다.” 이런 가사다. 원래 드라마는 과장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카이캐슬’은 겉으론 아이들 공부를 줄거리로 삼으면서 막장 끼를 살짝 섞어서 만든 비현실적인 드라마로 평가할 수 있다. 제목 ‘스카이’(sky)는 하늘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선망하는 명문 대학교(서울대-고대-연대)의 약칭을 뜻하고 캐슬(castle)은 부유층이 자녀교육을 성채화하는 상징어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교육이 빅 이슈다. 드라마와 다른 레벨로 과장을 하자면,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는 교육에 있다.


우리나라 연간 사교육비는 35조나 된다고 한다. 사실, 교육이면 교육이지 공교육이 어디 있고 사교육이 어디 있는가? 솔직히 사교육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긴다. 우리나라에만 이런 구분이 있는데 마치 사교육이 비용이 들어간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공교육은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가. 드라마를 비롯해 직접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교육의 문제를 자꾸 사교육으로 몰아가는데, 문제는 너도나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율은 75퍼센트이고,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갈 비율은 35-40퍼센트다. 그러니까 절반 이상은 고생한 보람이 없게 되도록 미리 정해졌다. 그러면서도 정작 모두가 입시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누군가는 진실 되게 더 이상 입시에 매달리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일부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두 쉬쉬하고, 학부모를 비롯해서 대부분은 정말 몰라서 넋 놓고 당하기만 한다. 진실은 사회적으로 아이들에게 누구나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야 했다. 심지어 어릴 적부터 좀 더 뛰어 놀리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시간 사용을 경험하게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라고만 가르쳤다. 온 사회가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다 한 자리씩 출세할 수 있을 거라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얻은 것이라곤 10대 때부터 경험하는 패배의식과 경쟁 심리였고, 막상 세상 물정을 알아갈 20대 중반이 되면 사회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증오심으로 나라를 지옥으로 여기며 떠나니 마니 하게 된다. 모두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도태되는 실정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공부를 포기해도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공부 말고 다른 길을 안내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물론 공부가 아닌 길이라고 어디 쉽기만 하겠는가? 가수나 배우나 셰프가 되는 길도 장난이 아니다. 공부 못지않게 경쟁이 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그들은 유치원 때부터 마냥 공부만 강요당했고, 치맛바람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있도록 하신 자리가 노래나 춤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부르심은 아예 떡잎부터 기회를 박탈당했고, 모두가 획일적인 제복을 입고 살아가도록 강요되었다.


공부가 어려운 게 뭐냐면, 공부의 필요를 전혀 깨닫지 못한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중요성이나 가치를 깨달은 후 공부를 시작하면 이미 늦는다. 그러다 보니,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들 어릴 때부터 같은 목표를 세우고 지지고 볶으며 같은 길을 달려가면서 경쟁 속에 사고가 끊이질 않고 사회적으로도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적어도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이나 교회가 아무런 차이도 없이 모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받아들이고 따라간다. 그리고 그 어떤 다른 대안을 찾으려도 않고 주어진 상황 안에서 몸부림치며 따라가기만 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따라간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의 누우 떼가 계절을 따라 이동할 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냥 줄지어 강을 건너다 악어를 만나고 사자를 만나 먹히고 마는 생존 원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희생을 자연의 원리에 내맡긴 채 잔인한 사회구조를 강화시키며 살아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일의 처방이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크고 한심한 해프닝의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매년 국가적 행사처럼 치르는 수능일이다. 정말 난리도 아니다. 교회는 수능기도회를 하고, 사찰은 수능법회를 한다. 당일 뿐 아니라 거의 1년 내내 고3 패닉에 시달리다 수능일은 그 절정에 이른다. 어떤 그리스도인 엄마는 팔공산 갓 바위로 올라가고, 또 다른 불자는 몰래 교회를 방문해서 수능기도회에 울며 기도한다. 그들은 시험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교회로 절로 돌아간다. 어떤 수험생 아버지는 아들이 수능시험 보는 날 부인에게 영화한편 보고 오자고 했다가 혼쭐이 났다고 한다. “아니, 그냥 낮 시간에 다녀오면 그놈이 엄마아빠가 영화를 보고 왔는지 모르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대들었다가 이혼당할 뻔 했다. 엄마는 시험 보는 아들과 같이 자기도 추운데서 고생해야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심정적 동일체 의식이다. 아이와 같이 고통 받으며 기를 모아서 전달해야 1점이라도 더 받을 거라는 심리적 위안에 기대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는 모든 가정이 교육문제에 다 걸려 있다. 우리가 다 자기중심적이고 어떨 때는 부부나 형제한테도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자기 자식문제에 대해서는 꼬리를 안 내리는 사람이 없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한다. 그게 교육으로 집중된다. 자식만 스카이에 들어간다면 엄마는 파출부가 되어도 좋다는 빗나간 모정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모정은 나중에 자식이 결혼하겠다고 할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한다. 자녀를 키우며 기대와 욕망 못지않게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우리 삶의 문제를 경험하는 거다. 여기서 교회는 자유로워야 하는데, 세속적인 행렬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보다 한술 더 뜬다. 성도들이 교회로 모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확인하며 공동체가 주는 유익과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로 똑같이 힘들어 하고 똑같이 고민하며 똑같이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에서 포로가 된 성도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삶의 조건이나 정체성을 일반 사람들과 특별히 구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똑같이 세상의 공기와 물을 마셔야 하고 햇빛과 비를 맞는다. 그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질서에 젖어 살던 중에 문득 어쩔 수 없이 양다리를 걸치고 산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들은 세상의 도시에서 오히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을 구하며 세상에서의 의무와 권리를 나누고 살면서 단지 일정한 경우와 시간만 구별해서 교회를 다닌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골프나 다른 레저를 즐기는 시간에 교회를 다닐 뿐이다. 신학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성도의 현존은 두 시민권자, 두 도시, 두 세상 소속이지만,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다 우리 자녀의 학교도 대부분 세상이라는 도시에 있고, 아빠엄마의 직장도 도시라는 세상에 있다. 사실을 말하면 과격할 때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교회조차도 세상 속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데, 예레미야서 29장은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운명이고 현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세상에 물들고 휩쓸려 살아가는 것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기증을 느끼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규정한 하나님의 심판의 권면이며 동시에 구원의 약속이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 휩쓸려 살기만 한다면 소망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세상과 크게 구별된 장소나 미션을 살아가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의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특별히 기다리며 듣고 싶었던 말씀을 주신 게 아니다. 포로에서 곧 풀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냥 거기 눌러 살아라!”였다. 비록 바벨론은 대도시였고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제국의 심장이었으나, 그래도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에 돌아오고 싶었다. 거기 정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아예 나올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대로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 그렇게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비록 친절하게 들리지 않는 이런 말씀이 우리가 기도할 때나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참고해야 하는 가르침인 것만큼은 아주 분명하다.


어떤가, 놀랍지 않은가? 유다가 포로로 잡혀갔는데, 1-2년 만에 구해 주겠다고 말하는 하나냐는 거짓예언자로 죽게 되고, 바벨론에서 70년이나 푹 썩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불길한 예언이 하나님의 진짜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술 더 뜨기를 유다에게 아예 포로인 채로 바벨론에서 농사도 짓고, 과수원도 가꾸고, 집도 짓고, 자녀도 결혼시키며, 아주 정착하라고 한다. 제국의 수도 바벨론은 사로잡혀 온 이방 노예에게는 훨씬 폭력적이고 차갑고 비정했다. 더구나 대도시로서 바벨론은 여러 민족이 몰려들어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과 다원화된 종교로 긴장과 갈등도 끊이질 않았다. 그런 만큼 유다백성은 경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오래전 출애굽을 경험했던 조상이 얼마나 본향을 사모하여 노예 살이 하던 이집트를 탈출했는지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새삼스레 그들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다 백성이 얼마나 구별된 삶에 익숙한 민족인가? 그들은 구별된 삶을 위해 울타리를 치고 스스로를 게토화하여 차단된 삶을 살 정도였는데, 그 땅에 주저앉아 섞여 살라는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예언이 틀림없었다. 마치 오늘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어떤 구원의 교리 같은 것을 애지중지하며 붙들고 있는데, 그걸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을 태세로 덤벼드는 경우와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예레미야의 바벨론 정착에 대한 예언이 틀림없다.


유대 백성이 정착한, 아니 더 적극적으로 정착해야 할 바벨론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나 런던이나 파리뿐 아니라, 옛 도시와 새로 개발되어 신도시로 거듭나는 위성도시들과도 비슷하다.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말한 것처럼,[1] 도시는 성경의 가인 이래로 인간이 스스로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착해서 만들었지만, 그 자체의 숙명은 안전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전쟁의 표적이요 경쟁과 투쟁의 현장이다. 한마디로 도시는 그 자체가 거대한 괴물이다. 사람들이 모여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는 욕망의 현장이다. 하지만 오늘 예레미야는 그런 도시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열방을 유린하는 상징적인 제국의 도시 바벨론을 괴물로 보지 말라고 했다. 괴물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필요를 서로 나누며 돕고 기도하는 영적 공동체라 말한다. 유다를 잡아가 볼모로 잡아둔 그 도시의 평화를 마땅히 빌어 주라는 것이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초기 박해 시절을 제외하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교회는 세상에서 포로로 지내기보다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기독교지배국가(Christendom) 또는 더 근대적 십자군 형태의 제국주의적 지배자들로 “코스프레”하며 주로 전쟁의 촉발자로 지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지배를 더 강화시키는 것을 영광스러운 선교적 성취로 여길 때도 많았고, 지난 수십 년의 우리나라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상과 화평을 도모하기보다 검을 던지고 화염을 일으키는 일에 분주해 왔다. 분명한 사실은 소외를 만들고 우울을 퍼트리며 빈부격차와 계층 갈등이 심화되도록 만드는 것은 예레미야의 말씀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다른 면으로 비슷한 언급을 하셨지만, 교회는 세상에 검이나 화염을 줘선 안 된다. 세상과 도시의 번영을 위해, 오히려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공공선을 위해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세상 속에 모범을 보이기 위한 침투와 정착을 명령한 것이지 정복하고 유린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배제와 포용


미국 예일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세르비아의 폭력성을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발칸반도에서 세르비아의 종교적 인종적 말살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크로아티아 출신이기 때문에 마땅히 폭력의 잔인성에 대한 분노가 있었음에도 그렇다고 단지 적개심과 복수에 따른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고민을 기울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고자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크로아티아의 고난에 대한 국수주의적 입장을 취하라고 충성 요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해결책이 진정한 신앙적 해결책이 될지를 찾던 중에 자신의 정체성과 억압하는 타자성 사이에서 십자가의 중심 주제이며 핵심 메시지인 용서에 이른다. 그의 책 ‘배제와 포용’은 그 고민의 결과다. 볼프는 공공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먼저 포용에 나서라고 한다. 평안과 번영을 위해 교회는 용서와 화해와 관용을 제시함으로써 갈등을 풀어 가야 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과 관련되어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하루하루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삶의 갈등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용서할 수 없는 큰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살지만, 나를 억압하고 화나게 하는 대상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때로는 배우자나 이웃을 용서할 수 없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 자신이 괴롭고 힘들 때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온갖 종류의 억압을 피할 수 없다. 교회 역시 세상에 사로잡힌 포로처럼 억압을 경험한다. 반드시 바로의 이집트가 아니더라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유로운 포로의 경험을 할 때가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억압이 연속적으로 교회나 개인을 소외시킬 때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상에서 교회나 개인은 가난의 억압을 경험할 수도 있다. 셋방이나 빚에 허덕이는 교회나 개인이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이웃이 가하는 억압도 만만치 않다. 나나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작정하고 괴롭히는 못된 개인들도 있거니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교회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적개심도 점점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은 교회가 했다. 교회는 스스로에 대한 가십거리의 모든 빌미와 단서를 세상에 제공했다. 교회가 타락한 재정집행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교계 정치에 뇌물과 금권선거, 초대형 교회의 세습으로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깎아내렸다. 교회 지도자의 성적 타락과 추문도 끊이질 않는다. 교회가 땅에 떨어질 만하고,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자성해야 할 죄악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더 이상 저 세상적인 이상향의 꿈과 비전을 현실화할 수 없거니와 메시지조차 던질 수 없다. 그럴 때 세상은 교회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뜬구름 잡는 “관종” 취급을 할 뿐이다. 이미 세상은 교회의 실천적 삶의 모습이나 존재론적 태도에 지친 지 오래다. 유다가 화석화된 게토 공동체의 비극을 겪은 다음 멀리 바벨론의 유배지에서 배제를 내려놓고 용서의 수용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그 순서를 따라 게토화된 배제의 늪을 지나가는 중이다. 교회는 유배지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담금질의 기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때, 예레미야가 약속한 평화와 안전을 보전 받을 수 있다. 교회는 아무런 응답의 메아리를 기대할 수 없어도 허공에 대고 외치듯 평화의 울림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한동안 교회가 세상처럼 똑같은 삶의 방식을 닮아 버린 것을 되돌려야 한다.


교회는 언어를 달리 표현하면서 배제와 호전성을 감추지 않는다. 자기중심적 자존심과 이기성으로 상대를 정해 분노와 화풀이를 거듭하며 자기 성채를 쌓아오곤 했다. 마치 사나운 남정네들이 서로 시비를 걸며 건방지다고 화를 내며 혼내주듯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적이며 혼내줘야 할 대상인 것처럼, 세상에 대해 포용 없는 모습이었다. 오직 배제만이 그들의 삶을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방식은 어떤가? 세속적인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놓여 있고, 다른 종교나 과학과 더불어 맞붙어 경쟁하고 다툴 때, 어떤 방식을 취하는가? 교회가 세상을 수용하고 포용하는가, 아니면 배제와 질시와 경계의 날을 세우는가? 교회는 세상을 위해 평안을 빌어 주며 함께 협력하고 동반자로 지낼 수 있을까? 때때로 교회는 세상의 세속성의 유혹과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그들과 더불어 살며 평안을 나누라는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수용과 포용이다. 이걸 당당히 드러내야 한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대해 그렇게 살 때 비로소 그들의 초월적인 신앙을 보여주듯이,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위기를 대하는 시선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지진이 일어나 무려 10만 명 가까이 죽었다. 도시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고, 리스본이 다시 설계될 정도였다. 그때 지진을 보는 관점은 저마다 달랐다. 이는 요즘 코로나19의 재난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대체로 교회가 어떤 입장인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어떤 극단적인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인과응보 심판으로 보았다. 그들은 죄악에 물든 도시가 심판받았다고 떠들어 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스본의 홍등가는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도덕하고 악당과 같은 심성을 지녔다. 리스본이 죄악에 물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 리스본보다는 파리나 런던이 더 타락했다.


칸트나 루소,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한 엉터리였다. 신앙적인 관점도 주로 이신론적이었다. 소위 자연을 지나치게 혹사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그 부메랑을 맞은 것이라며, 저마다의 문명비판론을 정당화하는 데 급급했다. 땅속 마그마의 폭발이 지상의 문명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오늘날도 비슷하다. 세상이 위기에 처하면 근본주의나 이신론, 아니면 무신론이 활개를 치는 법이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 상황이 도래하자 극단적인 교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하나님의 섭리를 무슨 운명 결정론으로 보려는 부류가 맨 먼저 목청을 높인다.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를  보면, 전염병이 식민개척을 막았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 책은 환경 결정론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고 또 틀린 주장이나 허황된 말이 많아서 문제가 많다. 


16세기 제네바 문명을 이룬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다섯 차례나 전염병이 휩쓸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인 다니엘 하렐(Danial Harrel)은 캘빈이 제네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전염병에 대응하면서 예정 신학을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어쨌든 제네바는 최초의 국제연합의 도시가 되었으니 결과를 만들긴 했다. 그렇지만 복잡한 제네바의 상황에서 신학과 목회를 드라이브하느라 칼뱅은 불면에 만성 소화불량에 위궤양으로 고통 받다가 당시에는 무서운 세균 침투로 결핵에 걸려 죽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칼뱅은 훨씬 전에 그가 전염병과 힘든 목회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26살의 청년 때 쓴 ‘기독교강요’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말했다. “인간의 삶은 마치 무수히 많은 악과 죽음의 위협과 별개로 수천수만의 질병의 용기와 같다.” 그는 그런 실존에서 위안을 얻는 길은 오직 두려움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진정 우리가 동의할 주장이지 않은가! 그는 친절하게도 시편 91, 118, 56, 27, 22편 등을 인용한다.


교회는 개인주의의 자기중심적 이기성도 넘어서야 하고, 세속적인 물질주의도 넘어서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모든 인류를 우리 지체로 삼아야 한다. 유다 백성은 바로 이걸 훈련받고자 바벨론 생활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로로 삼고 박해하는 정복자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시도하고, 종교적 구별의 기준을 가직고 살아가되 타문화권에 대한 배제를 내려놓고 포용을 선보이라고 명령받았다. 그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70년의 포로생활이 필요했을 것이다. 70년은 거의 인생의 한 주기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 자체가 유다의 포로 기간처럼 형벌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비밀인 용서를 깨닫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의 기준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도전하는 특권의 기간이기도 하다. 유다 백성에게 포로는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했던 것처럼 교회 공동체가 세상 한가운데서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는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 대한 가장 많은 통계 자료를 가진 학자로 유명하다. 스타크는 그런 자료에 근거하여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이 휩쓰는 위기의 상황에서 보였던 포용의 모습을 생생히 확인해 준다. 그에 따르면, 로마제국 시대에 초기 교회는 극심한 박해 중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문에서 쫓겨난 채 극심한 가난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살던 도시에 전염병이 닥치거나 지진과 같은 긴급 재난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병든 사람들을 자기들의 지체로 간주하고 대응하여 인류애를 보였다고 한다. 인종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오직 생명의 소중한 기준만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다. 그때 무슨 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을 물로 씻어 주고 닦아 주는 게 전부였고, 그러다가 자기도 전염되면 함께 죽기도 하는데, 어쩌다 살아나게 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은 보살핌과 사랑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염병에 걸린 나를 돌봐줬다.” “그들은 진정으로 생명을 내주는 사랑으로 나를 보살펴 줬다.” “나도 그들을 본받고 싶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교회는 성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에게 박해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로마제국의 도시생활이 얼마나 비정하고 잔인하며 냉혹했는가? 계급이 없는 민주적인 현대 사회의 도시 생활도 차갑고 냉정하며 몰인간적인 생활 문화가 팽배한데 전쟁으로 바람 잘날 없는 로마제국의 고대적 노예제도의 계급 사회에서 얼마나 힘의 원시성이 지배되었겠는가? 그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을 공포스럽게 박해하며 놀리던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보살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규범을 제시했다. 그들은 배제의 담을 쌓은 것이 아니라 포용의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전염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부터 노숙자들까지 보살피며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였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세상에 소망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낯설고 두려운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과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첫 열매인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도시를 재건하여 교회와 세상을 사랑으로 결속하고 변화시켜 평안을 이루어갔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요 오이코스다


교회는 단순한 대안 공동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을 세상에 드러내는 소망과 평화와 구원의 통로 곧 초월 공동체이다. 교회는 또한 외관상 건물을 가진 고정된 조직체 정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 속의 가정 공동체다. 때때로 교회는 가정과 세상이 만나는 비밀의 완충지이고, 때때로 교회는 가정과 세상을 연결하는 만남과 소통의 플랫폼이다. 낯선 이들에게 집과 같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제공하며, 또한 낯선 이들에게 긴장을 녹여 주는 환대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사귐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개인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그들을 믿음으로 낳고 양육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수행하도록 수용하여 돕는 기관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키울 때 젖만 먹일 뿐 아니라 어머니의 언어와 문화를 함께 가르치듯이 교회는 개인 신자들을 보살피며 키우는 어머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의 가정을 일일이 연결하고 살피는 하나님의 심부름센터와도 같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불행의 이유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불행한 가정도 교회 공동체는 품어 줄 수 있다. 교회가 이런 공동체인 것을 알고 스스로 되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에서는 사랑의 사귐과 논의가 유별나게 일어나야 한다.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의 에클레시아(ekklesia)라 한다. 하지만 다른 말로 일종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집은 나무와 벽돌과 타일로 세우지만, 가정은 사랑으로 세우는 사랑 공동체다. 그래서 요즘 교회를 종종 패밀리 또는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일컫는다. 헬라어로 집은 오이코스(oikos)다. 가문이나 식솔, 가족 등을 뜻한다. 마치 구약에서 다윗의 아들을 솔로몬만이 아닌 자손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이코스는 정확하게 집을 의미하면서도 온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거실(livingroom)의 뜻이 있다. 집 전체가 오이코스면서 그 안에 오이코스-룸이 따로 있는데, 가족들이 한자리에 다 모이는 공간을 뜻하는 거실을 말한다. 공동체성이 강하게 반영되는 단어이고 달리 말하면 교회다.


다행인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가족주의가 강하게 발달해 있다. 사회 전체를 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발달하기도 했다. 아마도 유교의 군사부일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식당에 가면 일 하는 사람에게 모두가 그냥 언니라고 부른다. 나이가 많으면 이모라고 한다. 엄마 친구는 다 이모라고 한다. 가족이 사회 속으로 확장되었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은 직원을 자식처럼 여기고, 군대에서도 대대장은 삼촌뻘이고, 사단장은 큰아버지뻘이다. 교회에서 목사는 아버지로 생각한다. 나이든 권사님이 젊은 목사를 어버이라고 여긴다. 온 사회가 따지고 보면 오이코스로 연결되었다. 어쩌다 비합리적인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가정이나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주보며, 새롭고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종종 지나친 오이코스주의가 발목을 잡기도 한다. 지나친 가족주의 때문에 일차원적으로 우리 가족, 우리 교회만 강조하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은 편집증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양자 삼으신 것을 잊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교회도 우리교회주의에 빠져 있다. “우리 교회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교회를 돕는가?” 이런 말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교회가 뭔지 모른다. 교회만 모르는 게 아니라 십자가도 모르고 구원도 은혜도 모른다. 사랑을 말해도 개념적 사랑이기 쉽다. 어려움조차 같이 나눠야 가정 공동체라 할 수 있고 교회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빌립보 교회나 고린도 교회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 다른 교회나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요즘말로 찐 교회다.


그리고 지나친 가족주의는 감정적인 관계성에 빠지기 때문에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심정주의라고도 한다. 가령 서로 가족처럼 관계 맺는 것이 마케팅에서도 적용되어서, 한때 보험회사든 통신사든 전화하면 아주 젊은 여자 목소리로 “고객님,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왜 고객을 사랑하는가? 아주 기상천외한 인사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없다. 어떤 나라에서 고객에게 “I love you”라고 하는가? 이게 진심을 다해서 가족이라는 분위기를 주려고 훈련받은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어두운 면 때문에 빗나간 인형놀이 노력이 되고 말았다. 요즘은 분위기가 금세 바뀌어 감정 노동자에 대한 갑질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바뀌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아이 러브 유’를 남발하다 감정이 상한 데다 졸부나 질 나쁜 사람들의 추행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간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으면 세계의 IT산업이 멈출 정도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터무니없는 사고로 죽어가는 어두운 면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구촌 위기인 코로나19 방역만 해도 우리나라는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경제성장률도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자살률 또한 OECD에서 1위였고, 출산율과 성평등 지수는 37위로 꼴찌다. 교회도 이와 비슷하게 영욕의 경험을 동시에 겪는다. 열탕과 냉탕을 돌아가면서 첨벙거리는 기분과 무관하지 않다.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어느새 복음의 원리가 아닌 그럴듯한 전통을 내세우며 굳어 버린다.


서울에 강남이 언제 생겼는가? 88올림픽 때만 해도 개포동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 불렸다. 그런 강남이 가장 부자동네가 되어 보수적인 기치를 앞세우고, 교회도 그 뒤를 따라간다. 강남 소리 들을 때마다 웃음도 안 나오는 사이에 강남스타일까지 나왔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세속적인 물결에 휩쓸리는 수치의 역사에 휘말려 버렸다. 어떤 교회는 담을 높이 쌓아 문을 꼭꼭 잠그고 게토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을 수용하고 포용한다는 생각과 마음이 일(1)도 없다. 교회가 가정과 세상을 연결시키는 중재의 역할을 포기하고 유료 세미나만을 위해서 문을 여는 슬픈 현실이 흔히 경험된다. 


우리나라 교회는 이런 격동이 필요하다. 복음으로 막힌 담을 바라보면, 부딪쳐야 하는 긴장을 피할 수 없다. 이게 복음의 운명이다. 여러분의 마음을 가로막는 담장이 있는가? 허물어 버리라.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로 세상으로 연결되는 걸 가로막는 담장이 있다면 그것도 허물어 버리라. 교회는 게토가 아니라 세상으로 활짝 열리고 동시에 세상이 하나님을 만나는 플랫폼이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섬기고 활동할 때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는 담장이나 부서와 부서를 가로막는 담장이 있다면 그것도 허물어 버리라. 물리적인 담장이 있기도 하지만, 인격적인 담장도 있다. 모든 담장은 허물어 버려야 한다. 여러분 교회가 이 지역사회와 세상을 가로막는 담장을 허물고 세상을 격동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드라마로 시작했으니 드라마로 마무리하겠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시청률이 높을수록 미리 찍지 못한다고 한다. 그때그때 촬영을 하면서 방영을 하는데, 드라마가 절정에 이르며 이야기가 숨 막히게 진행될 때면, 시청자들이 난리가 난다. 주인공을 죽이지 말라고 떼로 몰려다니며 댓글을 달고, 그래서 죽은 사람도 살리고, 멀쩡한 사람도 죽이며 드라마를 함께 만든다. 여기서 의미 있는 힌트를 얻은 건데, 댓글을 달 듯이 교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여서 가정을 살리고 사회에 기준을 만들어 줘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경험하는 눈물과 감동의 드라마,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쁜 드라마를 스토리텔링하며 서로서로 연결을 만들어 가보라. 문제의 해결과 인도하심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여기서 과수원을 가꾸라. 여기서 여러분 자녀를 시집장가 보내고 살면서 주님이 이 세상의 포로에서 건져주실 때까지 세상과 지역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의 직장과 이웃의 평안을 위해 빌며 살길 바란다.




[주]

1. 자크 엘룰은 그의 책 ‘도시의 의미’(The Meaning of the City)에서 예언자적 통찰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연결되는 도시의 이야기를 광야에 비교하며 분석한다.




유다 백성에게 포로는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했던 것처럼 교회 공동체가 세상 한가운데서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는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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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삼영

총신대학(BA)과 총신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위클리프 홀(Wycliffe Hall, Oxford)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의 지도로 “존 캘빈 신학에서의 교회론의 위치”(M.Phil)를 연구했다. 남포교회 교육목사를 거쳐 초대교회와 새길교회, 새물결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저서로 ‘동서양의 철학적 우주론 반성’과 ‘기철학을 넘어서: 김용옥의 기철학적 세계관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