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by 권성찬2022-05-16

사람이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주님은 학교를 통해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하는 사람을 통해, 병원이 아니라 병원에서 섬기는 사람을 통해, 카페가 아니라 카페를 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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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주제: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5:5-7.



교회는 선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있다. 교회와 세상, 이 두 단어를 연결하는 말은 ‘선교’다. 다른 말로 풀어 보면, “교회는 선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매우 오해되는 말이다. 중요하다는 뜻은 ‘선교’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이 땅에서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을 이유가 없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그곳으로 “뿅!”하고 올라가야 맞다. 그래서 여의도 광장 같은 곳에서 무슨 전도집회를 하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뿅” “뿅”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럴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정작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전하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우습게도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영접해도 “뿅”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물론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하늘로 못 올라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상에 남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넓은 의미로 볼 때 그걸 선교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이 일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시고, 이 일을 통해서 주님이 세상에 더욱 드러나시길 기뻐하신다. 주님은 세상에서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주로 인정하고 고백하길 원하시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역이 주님의 주권에 속하게 되길 원하여 우리를 세상 가운데 두셨다.


또한 교회가 선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이 중요하지만 오해될 수 있다고 한 이유는 자칫 선교를 좁게 정의함으로써 마치 교회가 그 좁게 정의한 그 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축소하고 본래의 뜻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선교라는 말을 들을 때 다소 부담스러워진다. 젊어서 선교에 헌신하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지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특별해 보인다. 그런 특별함 때문에 선교라는 말이 더더욱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인다. 그것은 선교를 ‘특정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혹은 좀 더 축소하면 ‘다른 나라에 가서 전도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른 나라도 되도록이면 오지일수록 좋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물론 복음이 없는 지역에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맥 없이 그것만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교 또는 성경이 말하는 선교가 아니라 그냥 교회의 활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교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다면 실제로 선교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바꿔 말해서,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며 알리실까? 무엇이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가? 요즘에는 선교를 무슨 활동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많다. 교육이 부족한 나라에 가서 학교를 세우면 선교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교육은 너무나 중요하다. 나 자신도 선교지에서 문해 교육을 사역의 하나로 삼았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학교가 곧 선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의료가 부족한 곳에 가서 병원을 세우면 선교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돈이 좀 있는 교회나 재단은 그런 선교 병원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병원이 곧 선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카페를 열면 선교가 된다고 하거나 비즈니스를 하면 선교가 된다고 하거나 고아원을 하면 선교가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선교를 무엇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선교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팽배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교를 가능하게 할까? 그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주님은 학교를 통해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하는 사람을 통해, 병원이 아니라 병원에서 섬기는 사람을 통해, 카페가 아니라 카페를 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선교는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행위다. 선교는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그런데 이 문장 곧 “사람이 사람에게”라고 할 때, 첫 번째 사람은 자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 신약의 표현으로 하면 예수의 제자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라는 말에서 두 번째 사람은 세상 속에 있는 자연인,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연인이다. 그러니까 제자가 자연인을 찾아가 다시 제자 만드는 것이 선교다. 물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필연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셨다. 제자가 성령 안에서 세상에 있는 자연인을 만나는 것, 그래서 그들도 우리가 주님을 아는 일에 같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선교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는 ‘사람인 우리가 과연 참 제자인가?’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의 여부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제자라면 그 제자가 자연인을 어떻게 만나는가?”하는 점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첫 번째는 ‘우리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줄여서 ‘되어야’와 ‘대해야’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오늘은 첫 번째 부분,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또는 ‘예수의 제자인가?’라고 하는 ‘되어야’에 대한 것을 묵상하고, 다음 글에서는 두 번째 부분, ‘그 제자가 자연인을 어떻게 만나는가?’라는 ‘대해야’를 묵상해 보겠다.


우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신다


앞에서 선교는 학교나 병원이나 비즈니스 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라 했다. 만일 학교나 병원이나 비즈니스로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는 대신에 학교나 병원이나 비즈니스를 시작하셨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나가셨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선교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다. 소통하는 창구라는 말은 그냥 스피커처럼 도구로만 쓴다는 것이 아니고, 그 백성이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지녀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그 백성이 세상에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종의 계시인데, 그 계시를 세상이 어떻게 읽어 내는가 하면 그 백성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속성, 백성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 한 사람, 아브라함과 긴 시간을 보내셨고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긴 시간을 보내셨다. 왜냐하면 요즘 하는 것처럼 한 몇 주 정도 교육시켜서 도구처럼 선교로 내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말로 신의 성품의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복이 될지라”(창 12:2)는 말씀은 비록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은 아니지만 단순히 복을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역사하시며 사귐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자로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고, 다른 말로 복을 주셨다. 마침내 귀하게 얻은 자식 이삭을 바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기로 작정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자가 되는 거다. 예수님도 스스로 증거 하시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소위 ‘독수리 설교’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3중적임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이며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셨다. 소유적인 부르심과 사명적 부르심, 그리고 수준적 부르심이 통합된 부르심이다. 그러니 소유적 부르심에만 취하여 “나 구원 받았네”만 부르고 있으면 안 된다. 그 부르심은 온 세상을 향한 제사장의 역할이라는 사명을 위해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단순히 도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한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르심을 시작하는 원인 문장이 바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라는 서두 문장이다. 이스라엘을 소유로, 사명으로, 수준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본래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말씀이다. 배타적인 선택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곧 선교다. 그래서 세상이 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내고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 그것이 곧 선교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 세계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그 백성에게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고 드러내도록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백성을 도우시고, 알려 주시며, 복을 주신다. 또 용서하신다. 고치신다.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열심을 내신다. 이 모두가 그 백성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백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기 위함이다.


기대에 어긋난 백성


그런데 오늘 에스겔서의 본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그런 기대와 목적을 완전히 저버렸다고 한다. 본래대로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서 세상 사람들이 그 백성을 보면서 “와, 저게 뭐지?”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살 수가 있지?”하며 궁금해서 와 보고, 결국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새겨 넣은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그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만큼도 못한 백성이 되어서 세상이 “와, 저게 뭐지?”가 아니라 “재들 왜 저래?”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에스겔서 본문을 읽으며 해석을 첨가하겠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 속에 두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기대하며 세상이 그들을 보게 하였는데)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건 뭐, 나를 닮아가기는커녕 세상 사람들도 안 하는 그런 짓들을 하고 자빠졌으니)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야! 이놈들아, 세상도 그렇게는 안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만두고 세상만큼이라도 좀 해라, 제발.) 뭐 이런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신다.


사회학적 불가능성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기대에 근접하게 살았던 것은 예수께서 제자 공동체를 만드시고 그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복음을 나누었던 시대, 그리고 그들이 영향이 미쳤던 초대교회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사실 로마의 박해 아래에서 지금처럼 소위 선교 혹은 전도와 같이 교회 활동을 하기에 상당히 제약을 받았던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박해하는 로마 제국으로 놀랍게 퍼져 나갔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앞서 언급한 학교, 병원, 비즈니스에 집중한 사역이 그렇게 했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 참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그들을 참 제자라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세상에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회학적 불가능성’ (sociological impossibi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일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 볼 때 “그건 불가능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행할 때 세상은 “저게 뭐지?”라고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 분의 속성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어 선교가 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게 가능하다고?” “와 대박!” “헐!” 이런 소리가 나와야 가능하다는 거다.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속성을 보여주었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을 넘어 차별이 심한 시대에 함께 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에 남녀가 형제자매라고 차등 없이 부른 것과 같다. 오늘날처럼 세상은 오히려 남녀의 차등이 현저히 줄고 있는데 교단과 교회 안에는 남녀의 차별이 심한 것과는 아주 반대다. 또한 주인과 종이라는 엄격한 신분 구별 시대에 그들이 함께 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에 양반과 천민이 형제라 부른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범주로 구별이 뚜렷한 시대에 함께 했다. 노예들이 잡혀서, 혹은 적군들이 잡혀서 갇혀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 먹을 것을 주어서 잡혀 있던 노예와 적들이 “저 사람들은 누구야?”라고 할 때, 누군가 “저들은 그리스도인이야!”라고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복음은 그 노예와 적들에게 깊이 침투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사용하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교회 공동체가 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서기 301년경 당시 20세 청년이던 파코미우스는 이집트 사람으로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전쟁에 징집되었다. 나일 강에 위치한 테베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징집된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로마 군사들은 그들을 감옥 안에 머물게 했다. 그런 그들을 밤에 찾아 가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필요한 물건을 전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던 파코미우스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며 누구에게든 이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으로 인해 징집에서 풀려난 후 그는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다. 그가 수도원 제도를 시작한 성자 파코미우스다.


그러니까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사실 모순어법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 자체가 세상에게 “저게 뭐지?”라는 속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면서 복음을 말로 전하며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는 그들의 삶으로 침투될 리 없다. 그런데 에스겔서의 오늘 본문처럼 하물며 세상도 안 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재들 왜 저래?” “진짜 헐!”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선교나 전도 같은 말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을까? “택도 없는” 소리다.

 

한번 생각해 보자. 세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단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그 정도 문제가 되면 고개를 숙인다. 해결책을 내놓고 반성하는 척이라도 한다. 그런데 소위 뜨겁다는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이단보다 더하다!”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또 정치인이 어떤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하다가 그 같은 지역에서 그 정치인의 자식이 출마하면 지역구 세습이라고 욕을 먹고 잠시 버티다가도 철회한다. 그런데 교회는 교단이 들썩 거리고 사회에서 욕을 해도 끄떡없다. “그래, 우리 세습한다. 어쩔래?”하고 오히려 소리를 친다. 이런 예는 끝도 없다. 교수가 자신의 학생을 성추행한 것으로 징계를 받고 교수직을 내려놓게 되는 일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는 그런 일을 사회법이 나서 징계하기 전까지 교회 스스로 혹은 교단 스스로 해결하는 소위 자정 능력이 상실된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나와서 또 교회를 개척하고 큰소리친다. 사회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도 당당하다.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지지가 더욱 강해진다. 그러면서 선교가 잘 안된다고 무슨 전략을 더 개발해야 한답시고 머리를 맞댄다면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닐까?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요구되는 세상


그래서 오늘날 선교의 복원은 선교적 삶, 이런 용어도 사실 사치다만, 그냥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실한 삶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1937년 3월, 시대를 앞서간 우리 믿음의 선진께서 “조선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신 글을 읽어 보겠다. 현대어 버전이다.


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교회마다 성령의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주는 일이 아니었음은 과거에 경험한 바이다.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서 시장의 상인들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평안도 지방에서 벌써 경험했고 결론이 난 일이다. 또 신학을 하려는 청년이 많다든지, 홀로 전도를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을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새로운 삶의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돼지나 닭을 치더라도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라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모든 조선 민족에게까지 미치는 큰 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의 성취나 신령한 사업에 헌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이 무참하게 패배하는 것으로 세상 삶을 마친다 할지라도 좋다. 참다운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힘써 일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그에게 달렸다. (성서조선, 1937년 3월호, “조선의 희망”)


자, 이제 분명해졌다. 학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학교를 할 때 복음이 전해진다. 병원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병원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낼 때 복음이 증거 된다. 비즈니스가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카페나 비즈니스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낼 때 복음이 증거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된 우리 모두가 그런 진실한 사람들이 되길 소망한다. 우리가 이룬 교회 공동체를 보고 세상의 사람들이 “저 사람들 뭐지?”라며 놀라는 그런 선교적 공동체를 이루길 소망한다. 우리 각자의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이 기쁜 곳이 되고, 그 영향이 더 큰 지역으로 넓어지고 더 나아가 이 나라와 온 세상이 기쁘게 되는 그런 선교적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사실 모순어법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 자체가 세상에게 “저게 뭐지?”라는 속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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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성찬

한국해외선교회(GMF) 대표로 섬기고 있다. 성경번역선교회(GBT) 선교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역하고, 그 후 GBT 대표와 위클리프 아시아-태평양 대표로 사역했다. 영국 OCMS에서 ‘요한복음 선교적 읽기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