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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by 정민영2022-05-23

언제 세상이 선한 때가 있었던가? 타락 이래 세상은 줄곧 악했다. 진짜 문제는 세상이 깜깜해서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소금과 빛이 아닌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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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


질문이 요구하는 묵상과 성찰


우리는 계속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라는 큰 주제를 통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이다.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라는 주제는 우리 신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 주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일련의 질문들을 던져 왔다. “내 사고방식은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향하는가?” “내 삶은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향하는가?”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질문은 묵상과 성찰을 요구하고, 그 여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깨달음과 분별력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일련의 질문들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우리 한국식 교육은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보다는 정답을 주려는 사지 (또는 오지) 선다형 문제에 너무 익숙하며. 또한 그래서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을 교육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접근이라 여긴다.  


그러나 질문을 통한 사유와 반성의 접근 방식은 예수님의 교수법과 일치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속 시원한 정답을 주시기보다, 되레 반문을 던지심으로 질문자의 사색과 반추를 자극하시곤 했다. 나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란 동영상을 종종 시청한다. 나와는 다른 신앙을 가진 분이지만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곤 한다. 아주 어렵고 복잡한 삶의 문제를 대단한 순발력으로 즉각 답해 준다. 그런데 한 가지, 예수님은 왜 법륜스님처럼 명쾌한 정답을 주시지 않은 걸까? 권성찬 선교사가 앞서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서 설명했듯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처럼 목적어로 묻는 율법사에게 그냥 답해주시면 될 텐데, 되레 반문을 하고 계신다. 물론 예수님이 법륜스님보다 지식과 지혜가 부족해서 그러신 건 아니다. 정답을 주입하기보다 질문을 통해, 사유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라는 그분의 교수법 때문이다.


사실 불교의 가르침도 단답형 정답을 제시하는 방식은 아니다. 선불교의 가르침에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의미다.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 지식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터득하는 일이다. 율법주의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율법이란 형식이 담아내는 내용이 중요한데, 형식을 금과옥조처럼 붙드는 게 율법주의의 오류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인 셈이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성경읽기나 성경공부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ㅤ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라 말했고, 신약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예수 신경(The Jesus Creed)에서 율법의 문구(letter of the law) 아닌 율법의 정신(spirit of the law)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왜 그토록 심하게 율법주의를 책망하셨는지 이해가 된다. “화 있을진저,ㅤ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ㅤ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라는 율법의 문구가 담아내는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란 본질을 붙들었어야 하는 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 공예배를 사수하는 게 마치 신앙의 본질인양 고집하다가 복음의 공공선은 고사하고 되레 세상에 피해를 주는 민폐 집단으로 전락하는 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대변하고 증언하는 방식인지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따라서 성경을 단순히 정답 찾기 백과사전처럼 다뤄서는 안 되고, 그 방대한 계시가 담아내는 메시지를 궁구하는 깊고 긴 사색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고 한 이유다(시 1:2). 사색의 여정은 사라지고 즉각적 정보 검색만 남은 이 시대가 염려된다. 수(數)의 원리를 깨우치기보다, 정답 찾는 공식만 달달 외워 대입하는 입시 위주  수학 교육과 유사한 문제 때문이다.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500년 전 종교개혁 시대에 회자되던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가?”란 질문을 뒤집은 형태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문이다. 개혁 시대뿐 아니라 2천년 교회 역사에 반복적으로 던져진 기시감이 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요즘 소위 “가나안 교인”으로 풍자되는 무교회주의 흐름도 망가진 제도 교회에 대한 절망감이 엿보이는 슬픈 현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제도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인 거다. 가끔 세상이 악해져서 전도하기 힘들고 선교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새삼스럽게 더 악한 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언제 세상이 선한 때가 있었던가? 타락 이래 세상은 줄곧 악했다. 진짜 문제는 세상이 깜깜해서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소금과 빛이 아닌 데 있다. 깜깜한 세상의 빛이자 부패한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교회가 망가진 게 절망인 거다. 그러니 손가락을 밖을 향해 뻗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건강하게 풀어 가는 해법이 아니다.


이 시대 교회의 모습으로부터 세상은 생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 언급된 ‘생명’이란 단순히 육신에 호흡이 붙어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생물학적 생명이라면 굳이 교회의 역할을 논할 필요는 없다. 세상은 둘째 치고, 성경이 정의하는 ‘참 생명’을 제도 교회는 바로 이해하고 진실 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정말 생명이 있는 것일까? 생명이 생명을 낳는 법이다. 우리가 신천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겉모양이 같다고 해서 모든 계란이 병아리를 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유사하다. 무정란은 생명을 낳을 수 없고 유정란이라야 병아리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과 다음 글, 두 번의 메시지를 통해 (1) 교회가 참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life-abiding community)인지 자문하고, (2)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life-giving community)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을 질문 형태로 바꿔본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라야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세상이 우리에게 생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라는 선결 요건이 만족되어야 비로소 생명을 나눌 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메시지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다룬 교회의 존재론을 다룰 수밖에 없고, 내일 나누게 될 두 번째 메시지는 교회의 사명론을 다루는 셈이다.


바울의 교회론: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


에베소서는 바울이 교회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서신이다. 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특정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을 떠나 율법적 종교로 후퇴하려는 공동체를 되돌리려는 의도로 썼고, 고린도서는 교회의 내분과 부도덕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기록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상황적 대응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신비한 교회의 비밀을 깊이 묵상하며 서술한 바울의 대표적 교회론이라는 게 여러 신학자들의 중론이다. 다른 서신들처럼 에베소서에도 바울의 글쓰기 특징이 잘 드러난다. 바울은 전반부에서 핵심 주제를 심도 있게 설명한 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독자의 반응과 순종을 요청하는 적용 단계로 넘어가곤 하는데, 에베소서 4:1-3은 바로 그 후반부 초입이다. 


본문이 정의하는 교회의 교회됨, 또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주목해 보자. 1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일종의 언어유희가 있는데, 이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소멸되기 쉬운 요소다. 성경을 번역하는 단체에서 일한 경험으로 볼 때, 성경 언어를 번역할 때 최선을 다하지만 어떤 때는 피할 수 없는 의미의 손실이 있을 때가 있다. 이를 테면 기름을 병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기려 할 때 100퍼센트 다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기름을 긁어 옮기려 해도 기름이 병에 얼마간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1절 말씀이 그런 것 같다. 개역개정 성경이 “부르심을 받은 일”(1절)로 번역한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너희를) 불러내신 부르심”인데, 소위 ‘동족목적어’(예컨대 ‘꿈을 꾸다’도 동족목적어가 사용된 표현이다)라는 기법을 사용해서 의미를 한층 강화시킨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인데, 그 부르심을 위해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것이다. 교회와 부르심(召命)이 개념적으로 겹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교회(헬라어 ek-klesia)와 부르심(헬라어 klesis)은 동의어다. ‘부르심’에 전치사(ek)가 붙어 ‘불러내심’이란 문자적 의미를 가진 단어가 곧 교회다. 본문은 부르심이란 명사를 목적어로 하는 동사 ‘불러냈다’(eklethete)를 잇대어 사용함으로써 교회가 특정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바울은 1절에서 교회의 교회다움은 무엇일까를 묵상하면서 이런 표현을 통해 강조한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합당하게” 존재하는 교회를 3절에서는 “성령 안에서 하나된 샬롬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 사이의 2절에서는 하나됨을 가능케 하는 공동체의 사랑이라는 자질을 말하는데, 그가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이 설명하는 사랑이라는 자질과 겹치는 공동체적 본질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 생명이란, 개체적 생명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정신과 대조되는 가치의 “공동체적인 생명”임을 깨닫는다. 바울이 교회의 교회다움을 말하는 내용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우리가 묵상하면서 이해할 때 그의 공동체적 본질의 강조를 깨닫게 되는데, 우리는 세상이 뭐라고 공격할지라도, 심지어 좌파적 사회주의라는 동떨어진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적이라는 것만큼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교회가 이 공동체성을 포기한다면 교회는 존재의 근거가 해체된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명을 유추할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의 인간 창조로 거슬러간다. 공동체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합의하셨으며,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ㅤ형상ㅤ곧ㅤ하나님의ㅤ형상대로 사람을ㅤ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ㅤ창조”(창 1:27)하셨다고 기록한다.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공동체의 유기적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신약 교회론의 기초이자 혈연 관계 이전의 원초적 공동체성을 가리키는 셈이다. 하나님 자신 역시 개체로 계시지 않고 공동체로 계신다. 공동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음은 세상 학문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인간(人間)이란 한자 단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미한다는 게 새삼 놀랍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가정을 만드신 이유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창조 섭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 제도와 가정도 혈연보다 공동체성에 강조점이 있다. 결혼 유무를 떠나 인간은 상호의존적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독신자도 괜히 의문의 일패를 당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공동체적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었지만, 항상 신앙 공동체의 유기적 일원으로 사셨다. 바울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항상 공동체 안에 있었다. 주님은 심지어 혈연보다 “누구든지ㅤ하늘에 계신 내ㅤ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ㅤ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마 12:50)라고 선언하셨다. ‘가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oikos)가 성경 문맥에 따라 가정이나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호교호적으로 사용되는 이유다. 가정이나 교회는 바울이 흡사 같은 개념으로 말하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조차 없다.


결혼이나 혈연 유무를 떠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게 인간창조의 원리다. 인간 존재의 최소 단위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다. 마치 형질의 특성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는 최소 단위가 원자 아닌 분자인 것과 유사한 개념이다. 분자를 깨서 원자들로 나누는 순간 고유 형질이 사라진다. 죄는 공동체를 깨뜨렸다. 신자유주의는 타락의 필연적 결과다. 교회는 개체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공동체가 모인 공동체이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향해 함께 하나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론을 말하면서 미스터리라는 말을 쓴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공동체성을 파괴한 죄의 결과를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비극이나 바벨탑 사건을 통해 생생하게 듣는다. “예수-천당”이란 말은 이 점에서 너무 단편적이다. 구원의 대하드라마를 단순화시키고 진정한 하나님의 만유의 공동체성의 회복에 대한 오해이기 쉽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단편화시킬 뿐 아니라 종교화하고 만다. 공동체를 해체하는 죄로부터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회복하는 구원, 즉 깨어진 관계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이고, 바울이 말하는 회복된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이다. 세상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죄성이 만들어낸 개인주의적인 죄의 결과로 치닫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공동체적인 처방으로 교회에 공동체적 생명을 공급해 주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의’가 관계 개념인 이유다. 따라서 성경적 교회론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회복의 구원론에 기초한다.


에베소서 전반부에서 바울은 원수 되어 막혔던 인간관계의 담장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허시고 해체된 공동체를 회복하셨다고 말한다(엡 2:11-19). 따라서 교회는 회복된 공동체의 본보기여야 마땅하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생명의 소망을 던져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는 성경이 정의하는 교회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 못한다. “원래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는 회복된 관계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고,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더니,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업체가 되고 말았다”는 리처드 핼버슨(Richard C. Halverson)의 탄식이 공감되는 지점이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 동참하는 신적 공동체


본문이 가르치는 교회의 하나됨은 단순히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라는 윤리 도덕적 덕담 차원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공동체 수준으로 그 질을 끌어올린다. 그저 단순히 싸우지 말고 오순도순 살아가라는 그런 덕담 정도의 대상이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재직들끼리 또는 가정에서 부부나 형제나 친척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그런 윤리 도덕적 덕담 정도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얼마나 고귀하게 여기시고 대하시는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교회의 영광이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 속으로 초청받은 신비로운 기관이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의 수준을 말해 준다. 3절에서 바울은 성령님께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하며 그걸 지키라고 하는데, 여기서 성령님은 교회의 타자(他者)로 잠시 머물며 우리를 중재한 후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내부자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지속적 샬롬을 일궈내시는 분이다. 삼위 하나님은 항상 공동체적으로 계시며 활동하시는데, 이것이 곧 동방 교회의 개념으로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내주’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하는데 그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코이노니아의 수준이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의 수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에 가득한 성령님의 내주(內住) 개념이 그렇고,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과 함께 성령님의 도래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요 14:16-18)이 그렇다. 


앞에서 우리는 구원이 죄로 인해 망가진 피조 세계의 회복(엡 1:10; 골 1:20),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공동체성 회복이 핵심임을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그 회복의 방편일 뿐 아니라,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 또한 친히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해 회복된 공동체의 수준을 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신다. 바울 서신이 ‘참 생명’(요 14:6)이신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거함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도 “주 안에서 갇힌 나”(1절)라는 표현을 써서 예수 안에 함께 공동체적으로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점에서 교회는 정말 갈 길이 멀다 하겠다. 교회가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교회가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약 교회를 포함해서 교회사를 통해 초대 교회부터 2천여 년 동안 그런 이상향에 이른 교회는 한 번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교회는 없었다. 우리는 다만 그 여정을 가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건강한 현상불만족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께 붙어 있는 일이다. 이는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비로소 생명의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는 비유(요 15장)와 연결되는 개념이고, 개인적 신앙 차원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공동체에 접목된 생명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우리가 정말 주님께 붙어 있다면,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식과 실전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하고 뭘 해서는 안 되는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게 되면 주님과의 공동체적 삶의 나눔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때로는 힘이 들거나 우리의 헌신이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율법의 굴레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이 성경에 있듯이, 사랑이 준동하는 수고는 어렵지 않다. 그 수고는 기쁘다. 주님과의 깊고 친밀한  코이노니아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 그런 교회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교회의 공동체적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런 교회의 모습은 세상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생명을 기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타적인 삶을 보이게 될 때 바로 세상이 기대할 뿐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를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서 마무리해 보자.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주님은 지금 제자들만을 위한 배타적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로 전하여 주님을 믿게 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는데,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배경에 대한 말씀이다. 제자 공동체로서 교회가 하나된 공동체로 삼위 하나님과 연합된 전제가 있을 때 세상은 비로소 그들에게 생명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교회가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세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21절처럼, 성부와 성자가 서로 하나된 것같이 교회 공동체도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과 연합될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공동체됨이란 곧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과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신 전도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전제라고 하는 것이 바울의 교회론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여기서 ‘영광’이란 헬라어로 “그 본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곧 삼위 하나님의 영광됨을 교회에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된 속성이 하나된 연합의 본질로서 공동체성을 교회에 주셨다는 말인데, 교회의 교회다움(교회됨)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연합과 하나됨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됨은 어떤 하나됨인가? 물리적인 하나됨만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오이코스를 유지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며, 교회가 교회다워야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본다면 소망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교회의 교회다움(교회됨)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연합과 하나됨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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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민영

국제위클리프(Wycliffe Global Alliance) 부대표로 섬겼다. 현재는 복음과도시 자문위원이자 선교 컨설턴트로 사역하고 있다. 고려대 건축학과와 합동신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Calvin 신학교와 알링턴 텍사스 대학을 거쳐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등지에서 성경번역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인도네시아 소수부족어 신약 성경 번역 사역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