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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by 정민영2022-05-24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안전지대로 도피해서 저쪽 다른 곳에서 멸망하는 세상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의 모임이 아니라, 세상과 동행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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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


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


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ㅤ예수ㅤ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ㅤ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ㅤ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6:21-27.



목적이 이끄는 교회


교회란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로서 그 자체가 목적론적 사명을 가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불러내셨을 리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불러내신 어떤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베스트셀러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목회자 릭 워렌은 이 책에 앞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란 책을 썼다. 워렌의 이 책 제목 자체가 교회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부르신 공동체란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앞의 글에서는 교회의 교회됨으로서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다뤘다면, 오늘은 교회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론적 사명을 다루고자 한다.


반복되는 개념이지만, ‘참 생명’이란 단순히 육체에 호흡이 붙어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명’이란 한자 단어가 ‘살아있음’(生)과 ‘사명’(命)의 조합이란 사실이 흥미롭다. 목적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에 부합한 삶을 ‘참 생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말할 때 “예수-천당”처럼 이 땅에서의 현재적 맥락과 무관하게 단순히 교회가 종말적으로 누리게 될 막연한 특권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게 맞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 즉시 ‘천당’으로 가지 않고 이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에서 불완전한 모습으로 계속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통스런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고, 그때 천당에 입성한다는 현실 도피적, 탈세적, 염세적, 배타적 종교로 마치 예수-천당의 도식으로 천국을 영적인 디즈니랜드 식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논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라는 정체성에 “합당하게”(엡 4:1) 생명을 나누는 선교적 공동체로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부사는 바울이 자주 쓰는 말로,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명을 주신 것 때문에 그에 부합하게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다. 현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한시성은 기독교 시간관의 특징이다. 비기독교 세계관은 언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막연히 한없이 지속된다는 단선적 또는 윤회적 시간관을 갖는 반면,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만물의 처음과 끝이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때가 되면 종말이 온다고 가르친다. 이생의 한시성이란 우리를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체류자, 거류민, 순례자 등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생의 삶 자체가 목적 지향성을 가진 것을 드러낸다. 즉, 세상에서의 목적을 이루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어의 ‘end’는 끝이란 뜻과 동시에 목적이란 의미를 갖는다. 내가 섬긴 국제위클리프(Wycliffe Global Alliance)의 정관에 “목적 선언문”이라는 게 있다. 영어로 “엔드-스테이트먼트”(End Statement)라 하여 목적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시간관을 이해하고 전제한 맥락이 틀림없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교회가 단순한 종교소비자 집단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교회가 종교소비자로 비쳐지는 모습이 강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목적론적 사명을 깨닫는다면 결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삶을 대박 나는 삶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주님을 만나 목적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목적을 이루는 사명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전부라면 그건 기독교 복음과 매우 동떨어진 세계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천당이라는 단순한 내세 지향적 종말론의 몰역사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현세적 삶의 축복을 강조하거나 내세 지향적 종말론은 모두 교회 공동체의 목적론적 사명을 망각하고 개체주의적 욕망을 강조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선교적 증거 공동체


앞의 글에서 교회로 하여금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사랑을 생각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not self-seeking, 고전 13:5) 되레 자기를 내주는(self-giving) 이타적 삶이라 정의한다. 이기적 특혜론이 아닌 이타적 사명론으로 교회를 이해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세상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을 위해 자기를 내주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몸소 실천하셨다. 바울은 생명 공동체로서 교회가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을 본받아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십자가 신학과 연결해서 풀어낸다. 여기서 바울은 생명 공동체로서 교회를 선교적 증거 공동체와 연결하는데, 교회의 존재와 사명이 세상에서 생명의 증거와 관련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신학을 본받아 이 땅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자 목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주신 사랑을 교회가 본받아 따름으로 생명 공동체로서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 선교적 증거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말 자체가 세상을 향해 이타적 사명 또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동체란 의미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이타적 증거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특혜 집단이 아니라, 열려 있고 수용적이며 확장되는 선교적 공동체다.


오래 전 우리부부가 사역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용어(마인어)에는 ‘우리’란 단어가 둘이다. 하나는 배타적 우리(kami)이고, 다른 하나는 포괄적 우리(kita)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배타적인 내부지향적 집단(kami)이 아니라 외부로 향해 열린 공동체(kita)다. 역사적 교회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해 온 교회론 역시 “거룩한 공교회”(the holy universal church), 곧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에 나타난 선교적 교회론과 일치한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 17:20, 새번역). 선교란 교회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는 여정이다.


신학자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선교적 교회론을 문화인류학의 ‘커뮤니타스’(communitas)란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원래 커뮤니타스는 신성한 종교적 의례를 위해 모인 공동체에 사용된 말인데, 성년식 같은 통과의례에 등장한다. 이를 테면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전환기에 공동체가 함께 모여 어깨를 맞대줌으로 넉넉히 감당하도록 도와준다는 개념이다. 고통스럽고 불안한 세상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어깨를 맞대주는 선교적 교회가 절실히 요청된다. 세상에서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위기를 경험할 때 순례길에 나서 고난의 여정을 통한 위로를 경험하는 또 다른 예로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부쩍 각광을 받는 스페인의 성 야고보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을 들 수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며 피레네 산맥의 고도(古都) 생장(Saint Jean)에서 시작하여 대서양 가까운 산티아고까지 약 850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걸으며 순례자들은 자기 인생 여정의 질곡을 복기하고 반추하며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생명의 의지를 가다듬거나 위로를 경험하는 유익을 얻는다. 원래는 세상에서의 삶의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나 그 밖의 가정에서 일상의 커뮤니타스를 경험해야 하지만, 요즘은 유행에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치 관광을 가듯이 줄지어 순례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을 뿐더러 심지어 방송으로 연예인이 알베르게(숙식 장소)를 운영하기까지 하다 보니 현지인들이 왜 순례자들이 아닌 관광객들이 몰려오느냐고 푸념하기까지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안전지대로 도피해서 저쪽 다른 곳에서 멸망하는 세상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의 모임이 아니라, 세상과 동행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여기서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용어가 동행과 동참이다. 바울이 로마서의 교회론 문맥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말하는 이유와 같다. 이것이 순례자가 해야 할 삶의 실천이다.


정리하면, 교회는 배타적 특권을 누리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세상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신뢰의 관계를 쌓으며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선교 공동체라는 점이다. 관계가 배제된 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일방통행으로 인쇄된 전도지를 나눠주며 귀찮게 하는 포교 행위를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 그 대신 세상에서 함께 살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교제하면서 신뢰가 형성이 됨에 따라 삶을 나누고 서로의 가치관과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이 적절한 교회의 자세일 것이다. 그럴 때 신앙의 본질이 관계임을 알게 된다. 상대가 무신론자이든 아니든 일단 관계가 형성된 사이가 되면 서로의 문제에 대해 방관할 수 없게 된다. 서로의 아픈 경험이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참여자로 동행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만 비춰도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도들끼리 서로 어떤 삶의 모습으로 나눠야 할지가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종교적 게토에 은둔하지도 말고, 세상을 종교화하겠다는 극단적이고 빗나간 광신주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에 깊이 들어가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작용이다.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나타난 바른 교회론(요한복음 17장)을 따라 그분이 “있게 하신 자리”인 세상 속으로 들어가되(요 17:18), 세상과 구별된 회심한 가치를 통해 세상을 구하는 선교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가치와 대조되는 회심한 가치는 본문의 십자가 신학으로 우리를 이끈다.


십자가 신학


세상에 있되 세상과 다른, 또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가치관과 삶은 십자가 신학이라는 핵심적 가르침으로 집약된다. 500년 전 개혁자들이 회복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의 정점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이어지는 산상수훈(5-7장)은 제자도 메시지에 해당하는데, 그 이후 지속된 제자들의 학습 여정이 나오는 그 정점에 오늘 본문이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바른 신앙고백(16절)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 선언하시고(18절) 비로소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21절).


본문에 전개되는 베드로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신앙고백과 실존 사이의 큰 간격을 깨닫는다.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고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확한 신앙고백을 통해 엄청난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세상 종교나 권력자와 다른 그분의 방식 곧 십자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되레 방해하여 예수님께 극심한 질책을 받는다(22-23절). 소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십자가의 역설성에 넘어지는 상황에 처하여 자기 생애에서 가장 극단적인 열탕과 냉탕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엄청난 신앙고백을 했다고 하여 가장 큰 칭찬을 받았던 그가 곧 바로 칭찬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탄아 썩 물러가라”는 가장 심각한 비난을 듣게 되었다.


사실 복음이란 말뜻을 오해하면 의외로 당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복음이 가지는 십자가의 역설을 단순한 세상적 축복이나 물질적 이해로 접근할 때 사정없이 넘어지게 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다른 문맥에서 “좁은 문”(마 7:13-14)이란 은유로도 설명하셨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이 가지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설계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되레 우리를 넘어뜨리는 거침돌(“거리끼는 것” 고전 1:23)이 될 뿐 아니라, 베드로의 경우처럼 우리가 주님을 “넘어지게” 만들어버린다(23절). 십자가라는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도 하다. 복음은 진정 달콤한 것이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십자가의 여정은 쓰라리기 짝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것은 십자가의 이해가 판별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기준이다. 이 점에서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과연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지, 아니면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지, 십자가 신학의 기준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심히 염려스러운 것은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를 볼 때 신성모독은 무신론자나 타종교인이 아닌 우리(제도 교회)가 해 왔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본문은 두 가지 다른 “목숨”을 다룬다.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현세의 한시적 목숨과 영원한 참 생명(영생)이 그것이다. 두 개념을 구분해서 각각 다른 단어로 기록한 헬라어 사본도 있다. 제자도는 이생의 한시적 목숨을 영원한 참 생명에 투자하는 십자가 신학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데, 이는 회심한 가치관에 근거한 사명론인 셈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앞두고 외쳤다는 메시지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되리라”(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연상시키는 십자가 신학을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요 12:24-25)로도 설명하셨다. 


이생의 생명을 가볍게 다루거나 함부로 버리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시적 삶에 진정한 투자가치를 부여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리키신 것이다. 어차피 이생은 한시적이고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후에는 이생을 무엇에 어떻게 투자했는지 주께서 심판하실 것이다(히 9:27). 본문 마지막 절의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은 행위 구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과 세상을 위하는 선교적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자도는 특혜 집단과 대조되는 선교적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는, 그분이 자기를 비워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자기를 부인하고” 24절) 세상을 위해 선제적으로 위험부담을 끌어안는(“자기 십자가를 지고” 24절) 커뮤니타스의 길이다. 허세를 부리라는 게 아니라, 진짜를 가진 자의 진정한 여유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동적인 십자가 신학을 만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 그분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대속적 은혜는 아무도 가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고유 영역이다. 동시에,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주님은 이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요 17:18; 20:21) 그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축복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하신다. 초림이 아닌 재림을 대망하는 교회는 과거지향적 박물관에 십자가를 가둬두지 말고,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성령)을 보내시고 그분의 몸(교회)을 통해 재림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과연 커뮤니타스의 공동체인가?


커뮤니타스는 특히 위기상황에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코로나 시대는 현대 교회의 진정성 여부를 검증할 적절한 기회다. 역병이나 전쟁, 자연재해 등 재난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그 시대의 신학을 반영한다. 안타깝게도 역사적 교회는 재난이 발생할 때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근거 없는 마녀사냥을 저지르곤 했다. 코로나 팬데믹은 도대체 누구 죄 때문에 발생한 천벌일까?


신학자 톰 라이트(N. T. Wright)는 하나님과 팬데믹(God and the Pandemic)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누구 탓이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요 9:1-4)을 인용한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통 받는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나사렛 선언문으로 알려진 메시아의 사명선언문에 그 해답이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생길 때 그 원인에 대해 세상이 주목하면서 특정 집단의 잘못 때문에 세상이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말하듯이, 전염병과 같은 사회적 격변 현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면 누군가를 반드시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전가해야만 사회적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집적하여 새출발을 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광기어린 심리적 기재가 있다. 일명 “희생양 메카니즘”이다. 그러나 그렇게 책임을 지게 만들 전염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일각의 교회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종교적 무당 역할을 자청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2천년 역사에서 교회가 세상의 어떤 타종교 집단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데 얼마나 익숙한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대응하신 기준에 따라 생각해 보건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바로 인간의 죄가 근본 원인이다. 타락 이후 세상은 죄의 결과로 항상 고통스러웠고 암울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이유는 그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세상의 질고로 인해 생긴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역사)로 인해 영광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 온갖 신음으로 고통 받고 저주받는 세상을 축복으로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며, 지금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그 일을 계속 행하기 원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세상은 모든 것을 금으로 바꾼다는 미다스의 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교회의 섬김의 손길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같이 전염병이 창궐하여 어려운 시절 경제적으로 무너진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로 인해 부를 축적하거나 건물을 소유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희생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조물주 아래 건물주가 있다는 우스갯말이 나오는 현실에서 주변을 살피고 손을 내밀어 도움을 베푼다면 공동체적 커뮤니타스의 손길이 되어 이웃을 섬기는 진정한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로마서 8:28을 선교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성경은 교회를 수혜자로 보는 번역을 선택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연히 우리도 하늘 복의 수혜자다. 그러나 복음은 처음부터 항상 선교적이었다. 복음의 원형인 언약은 아브람과 후손을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가 그들을 포함한 열방의 축복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창 12:1-2). 문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현대 교회를 포함한 역사적 교회가 종종 자신들을 배타적 수혜자로 복음을 뒤튼 데 있다. 


현재의 로마서 8:28 역본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모든 것’(panta)은 복수형이므로 ‘합력하여’(synergei)란 단수형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없는데, 개역개정 성경은 ‘모든 것’이 주어로 번역돼 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둘째, ‘합력하여’(synergei)란 동사는 함께할 파트너를 요구하는데, 개역개정 성경은 협력 파트너를 적시하지 않고 ‘모든 것’이 스스로 협력한다는 어색한 번역이다. 결국 현재의 역본에서 교회,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선하게 이뤄진 결과를 누리는 수혜자가 된다. 바울의 의도가 그랬다면, ‘함께’(syn)란 접두사를 뺀 동사(ergei)를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 경우, 죄로 인해 고통 받고 뒤틀린 세상과는 달리, 하나님이 부르신 교회 공동체 즉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게 작동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협력 파트너를 요구하는 동사(synergei)를 고려하고 세상을 축복하는 선교적 사명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교회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합력하여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분의 위대한 일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신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synergoi)”(고전 3:9)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드러날 수 있을까? 코로나로 고통 받는 세상에 어떻게 교회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 바로 커뮤니타스의 기능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이 세상이라는 순례의 여정에서 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순례의 동반자임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진정한 커뮤니타스를 회복할 때 가능하다. 우리 교회가 가정과 세상의 커뮤니타스를 진정으로 회복되길 소망한다.

코로나로 고통 받는 세상에 어떻게 교회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이라는 순례의 여정에서 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순례의 동반자임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진정한 커뮤니타스를 회복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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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민영

국제위클리프(Wycliffe Global Alliance) 부대표로 섬겼다. 현재는 복음과도시 자문위원이자 선교 컨설턴트로 사역하고 있다. 고려대 건축학과와 합동신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Calvin 신학교와 알링턴 텍사스 대학을 거쳐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등지에서 성경번역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인도네시아 소수부족어 신약 성경 번역 사역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