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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의 길(3-2)
by Tim Keller2022-05-26

세속 문화는 목적, 의미, 희망, 행복, 죄책감, 용서, 정체성과 같은 위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을 포기했다. 따라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한 사회적 자리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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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 “주류 교회의 쇠퇴”와 두 번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오는 여름에 마지막 네 번째 글, “갱신을 위한 능력”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3-1] 부흥과 운동의 역사 

[3-2] 새로운 운동의 필요 및 성립


새로운 운동의 필요


미국 교회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동일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민주당의 진보-자유주의 정치 의제는 자유주의 주류 교회가 수행하던 복음 전도와 영적 형성이라는 사역을 사실상 대체했다. 그 결과 교회는 수십 년에 걸쳐 치명적이고 급격한 수준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는 보수적인 공화당 정치와 지금 거의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유대교 안에도 이와 비슷한 분열이 있다.) 종교 단체는 점점 더 특정 정당의 투표 세력으로 축소되고 있다.


세속 문화는 목적, 의미, 희망, 행복, 죄책감, 용서, 정체성과 같은 위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을 포기했다. 따라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한 사회적 자리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권력을 남용해서 안 되며 또한 과거에 종교 체제로서 저질렀던 실수를 피해야 한다. 


이미 이전 글에서 언급한대로, 기존의 종교 단체, 기관, 교회 중에서 미국 교회를 갱신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다 갖춘 곳은 하나도 없다. 갱신을 위한 비전과 움직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이제 다양한 전략적 주도성을 가지고 연합할 평신도 지도자, 목사, 학자로 구성된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리더십은 복음주의 교회, 흑인 교회, 적지 않은 보수적 고백교회(루터교, 성공회, 개혁파, 감리교, 재세례파), 그리고 놀랍도록 다양한 새로운 민족 및 이민 교회에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운동이 가진 기본 신학과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하나의 운동은 강력한 비전, 도덕적 확신, 강력한 개인적 우정, 한 개인이나 조직의 명령 및 통제 구조의 결과가 아닌 혁신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내적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그럼 운동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여러 그룹이 모이는 경우, 하나의 운동에 불을 붙이길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또한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참여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지의 여부는 그들조차도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동력이 붙게 되면, 운동을 일으킨 초기 조직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미래 비전과 도덕적 이상에 헌신하는 또 다른 시작(initiatives)과 조직의 생성을 촉발하게 된다. 


새로운 운동의 성립


새로운 운동은 역사적인 개신교 신학을 중심으로 통합될 것이다. 


뜨겁게 공유되는 신학적 믿음보다 응집력 있고 역동적인 기독교 운동에 꼭 필요한 요소도 없다.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개신교 신학을 유지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기본 믿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살펴보았듯, 마음과 삶에서 복음이 회복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만이 영적 쇄신의 열쇠이다. 


복음에 대한 정통적 이해를 정의하고 옹호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진리는 첫째, 에큐메니칼 신경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말한다. 이러한 신조는 다음 사실을 확증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 즉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한 하나님이 계시다.

• 우리 몸을 포함한 물리적 피조물은 모두 실재하고 선하다. 

•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는 한 위격으로 영원히 연합하신다.


둘째, 다양한 개신교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공통 핵심인 (‘오직’으로 시작하는) ‘다섯 오직’(Five Solas)은 복음에 대한 정통적 이해를 정의하고 옹호한다. ‘다섯 오직’은 구원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에 따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선언한다.[4] 따라서 개신교 신앙고백들은[5] 다음을 확증한다. 


• 성경의 필요성, 성경의 충분성,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

• 인간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개입 없이는 구원을 원하거나 성취할 수 없다는 죄의 교리

•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속죄의 교리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필요성,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양자 됨, 그리고 성화의 축복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성하기 위한 교회와 말씀 사역, 세례, 성만찬의 필수 불가결성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격적으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심


새로운 운동은 회개와 주님 찾을 것을 요구한다. 


회개 없이는 영적 부흥도 없다. 회개 없이는 개인이나 집단 간에 화해는 없다. 회개 없이는 개혁도 변화도 없다. 나의 잘못을 온전히 또 진실하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진정한 변화를 위한 도움과 관계 회복을 구하지 않는다면, 대신 변명하고 최소화하며 남을 비난한다면,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모든 기독교 부흥에는 몇 가지 공통 요소가 있다. 은혜의 복음, 비상한 기도, 회개, 생명이 넘치는 공동 예배, 하나님의 즉각적인 임재에 대한 감각,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 등이다. 이런 요소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갱신은 언제나 모양과 방법 및 측정 면에서 이전 갱신과 다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주권자이시다. 당신이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부흥을 일으키거나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자신의 명성이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고, 나의 허물에서부터 시작하는 개인 부흥의 작은 사례가 되기를 추구할 때, 긍정적인 영적 역학이 주변 교회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계획 속에 더 많은 부흥을 갖고 계시다. 마지막에 만날 궁극적인 부흥 이전에, 겨울이 지나고 궁극적인 봄을 맞기 전에, 나무들도 기뻐 노래할 것이다(시 96:12).


새로운 운동은 분열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눈물과 은혜가 있다.


1940년대 있었던 복음주의-근본주의의 분열과 같은 역사가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어쩌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 중 하나는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이 쓴 Reforming Fundamentalism(개혁하는 근본주의) 안에 담겨 있다.[6]


1940년대에 한 그룹은 분리주의, 급진적 개인주의, 반지성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정치적 극단주의와 같은 “근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면서도 “본질적인 복음주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세속주의에 당당하게 반발하려는 시도를 했다.[7] 이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새로운 복음주의”라고 표현했다. 칼 헨리(Carl Henry)는 1948년에 “새 복음주의의 활력”(The Vigor of the New Evangelicalism)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 새로운 운동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는 세 가지 수사학적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는 자유주의에 향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근본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기독교가 오로지 초자연적인 구원의 메시지에서만 찾을 수 있는…의미의 깊이…를 다시 도입하기에는 너무 늦었는가? 오늘날 복음주의의 유일한 메시지가 파멸의 운명에 처한 세대로부터의 개별적인 구원의 선포인가? 아니면 이 복음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사회 문제까지도 함축되어 있는가?”[8]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은 40년 동안 번창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형태의 근본주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신앙에 대응하는 성경적 정통성을 조장함에 따라 예전에 한편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 사이에서 과거와 비슷한 종류의 슬픈 소외가 또 다시 일어나고 있다. 분열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인 주요 순회 컨퍼런스(conference circuit)에서 만날 수 있다. 한때 같은 연단을 공유했던 연사 중에서 비공식적 또는 공식적으로 아예 초대를 받지 못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초대를 취소했다. 분열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장소로 들 수 있는 것이 통합된 기부자로 운영하던 복음주의 기관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적 인종 이론” “젠더 이데올로기” “사회 정의”를 놓고 기부자가 분열되었다. 이런 현실은 자신이 선택한 특정 진영(tribe)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내 편을 선택하고, 그에 맞는 언어까지 조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대학과 기관에 실로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분열은 아예 새로운 교단의 창립이라는 공식적인 분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보수 교단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80년 전에 많은 논쟁을 촉발했던 문제들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면에서 독특했다. 근본주의자와 새로운 복음주의자는 술과 담배, 영화와 같은 현대 오락의 사용에 관해서 이미 ‘배교’의 길에 들어선 주류 교단과 분리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또는 문화적 참여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만드는 복잡한 구약 예언 해석 방식인 ‘세대주의’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려 퍼지는 당시의 논쟁거리가 있다. 새로운 복음주의는 개인 영혼의 전도뿐 아니라 사회 문제와도 씨름했다. 근본주의자는 이것을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이라고 불평했다. 복음주의자는 또한 현대 대학에 참여했다. 근본주의자는 이것을 불신앙과의 타협이라고 불평하며 강력한 반지적성적 입장을 취했다.[9]


이 글에서 나는 분열의 양면을 설명하기 위해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대중에게 이 두 단어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이 두 용어를 다 효율적으로 포함하는 새로운 용어와 이름과 설명까지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10]


어쨌든 이런 분열 속에서조차 진리와 눈물과 은혜로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주를 더 잘 반영할 것이고, 불신자의 마음을 얻고 신자를 성화시키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가장 은혜롭게 행동하는 쪽이 나중에 가장 번성할 것이다. 그 의미는 이것이다. 


• 누군가가 우리에게 잘못했다면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예수님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다(눅 23:34). 모욕과 멸시를 받았을 때 예수님은 결코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다(벧전 2:23).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얼마나 더 은혜롭고 관대해야 할까? 

• 논쟁하기보다는 전도하고 교화해야 한다. 문화와 교회에서 만나는 분열은 좌파와 우파에 의해 더 부추겨지고 있다. 양측 다 정치적 의제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교회와 연합하고 싶어 한다. 양측은 또한 자신이야말로 도덕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진실과 정의의 편에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측은 교회 지도자를 비롯해 그들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엄청난 수의 악성 비디오와 밈과 기사를 생산한다. 종종 논쟁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논쟁은 어디까지나 항상 먹는 음식이 아니라 약이어야 한다. 사람이 약만 먹고는 살 수 없다. 장기적으로 끊임없는 논쟁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영적 고갈을 불러온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운동은 설교와 저술, 가르침과 목회로 이름을 날리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은 놀랍도록 훌륭하고 영적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가르치는 그 자리에서 독자나 청중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운동은 특히 불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정치 문제를 중심으로 ‘개신교 사회 교육’(Protestant Social Teaching)을 발전시킬 것이다. 


성경의 교리와 윤리적 원칙이 사회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이론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사회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다. 현대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개신교 사회 사상’(Protestant Social Thought)에는 다음이 필요하다. 


현대 세속 문화 전반을 비판하고 그 깊은 구조적 실패를 폭로하는, 일종의 기독교 ‘고급 이론’을 제공할 것.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이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공헌을 했다(예: 알리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11]


일반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참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 “그리스도와 문화” 모델에 대한 분열을 다룰 것.[12] 각각의 모델이 과도하게 차용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위험이 따라온다. 


• 변형 위험. 이것은 문화가 끔찍한 쇠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적인 힘을 추구하는 접근 방식이다. 위험: (심지어 가장 좋은 동기를 가지고도)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게 되고 종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킨 예수님과 달리 도리어 세상을 더 닮아가게 됨. 

• 동화 위험. 이것은 문화를 ‘더 많은 정의와 포용을 향한 역사’로, 보다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교회가 해방 운동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접근 방식이다. 위험: 세상에 너무 많이 순응하는 것,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보다는 진보 진영이 빠지기 쉬움.

• 철수 위험. 이 접근 방식은 ‘변형’ 접근 방식만큼이나 문화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만, 사회와 구별된 공동체 속으로 후퇴할 때 사회의 오염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위험: 문화가 이미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무지. 그 어떤 경우에도 문화가 삶에 스며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 무시 위험. 이것은 세상이 잘되고 있으며 굳이 교회까지 문화적 참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냥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라. 위험: ‘철수 위험’과 유사하게, 문화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것.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두 개의 ‘도시’ 또는 사회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이다(빌 3:20-2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랑과 자기희생(“당신을 섬기는 게 나의 삶”)이 아니라 권력과 이기심(“나를 섬기는 게 당신의 삶”)에 사회 질서의 기반을 둔 “인간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성을 특정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의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지상의 모든 정치 운동이나 정당은 미덕뿐 아니라 죄에 대한 공모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정당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은 좋은 당원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정당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선의(good will)에 대한 모든 세속적 또는 비기독교적 견해는 무엇인가로부터 언제나 우상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좌파는 정부를 과신하고 우파는 시장(market)이나 자기 인종의 선을 과신한다. 결과와 방법에 있어서 이런 식의 혼합은 심지어 선을 추구하는 기독교 조직과 운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운동은 영향력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권력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정 사회 영역에서 성장하는 새로운 운동을 형성하려면 돈과 기부자, 지지자의 숫자, 대중의 관심, 청중, 그리고 더 넓은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다른 그룹과 조직 또는 개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이기는 길밖에는 없다. 


“새로운 운동이 가능함” 또는 “영적 갱신”과 같이 영감을 주는 그럴듯한 용어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권력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적 자본을 활용하여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는 다른 종교 공동체보다 이 문화가 가진 질문과 반대에 대해서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시킬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강력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즉, 이는 우리가 자신을 묘사할 때 다른 그룹과 대조해서 확실한 차별성을 둬야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경쟁이라는 차원을 초월하는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13] 불가피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게임의 규칙을 가진 경쟁적인 사회 현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우리는 세상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성경 말씀으로, 그러니까 주해에 근거해 결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증을 통해 “경쟁”할 것인가? 상대방의 견해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방식으로 대변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방식에 따라서 쓰러뜨리기 쉬운 캐리커처를 하나 만들고, 두려움과 분노를 조장하여 자본을 확보하며, 동기를 전가하고 모든 반대자를 악인으로 비난하는 인신공격적(ad hominem) 논쟁에 가담할 것인가? 상대방을 설득하는 대신 단지 부끄럽게 만들거나 적대시할 것인가? 아니면 내 방식으로 상대까지 “소유”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확실한 “아니요”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운동은 7개의 선교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이다.


제임스 헌터(James Hunter)는 “중첩된 전략적 자본 네트워크”의 효과를 주장한다. 즉, 학자, 사업가, 종교 지도자, 예술가, 과학자, 언론인, 정치인 등이 연합하여 상징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본을 “공동의 목적, 공동의 세상, 그리고 모두가 원하는 변화를 향하여” 집중할 때 세상은 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14] 그러므로 교회 갱신 운동은 각 선교 사업에 적합한 자원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7개의 프로젝트와 8번째의 ‘메타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간단히 설명하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1. 교회 개척과 갱신. 미국에서 매년 개척하는 교회 숫자를 현재 3∼4000개에서 6∼8,000개로, 두 배로 늘려야 한다. 현재의 교회 개척 모델을 바꿔야 한다. 


2. ‘카운터(Counter) 교리 교육’ 제자도. 기독교 교육은 대대적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성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더불어 기독교 교리를 사용하여 신자들이 일상에서 심하게 노출되는 기본적인 문화의 내러티브들을 전복할 수 있어야 한다. 


3. 포스트 기독교 전도. 오늘날 서구 교회는 역사상 최초의 포스트 기독교가 가져다준 깊은 세속 문화에 직면했다. 교회는 아직까지 세속적인 사람과 더불어 “아예 종교 없는 사람들”(none)을 믿음으로 이끄는, 그들을 제대로 전도하는 방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러한 전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과 수단을 동시에 개발하는 것이다. 


4. 공정 네트워크.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또한 지역사회 수준에서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네트워크(최소한 하나의 초교파 사역 또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수십 명의 강도 피해자와 사역한 이후,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 사역이 여행자를 위해 특정한 도로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에 공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5. 믿음-사역 네트워크. 그리스도인이 직업과 신앙을 통합함으로 공동선에 봉사하고, 더불어 직업 현장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faithful presence)[15]을 제대로 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조직하고 준비시키는 네트워크(또는 새로운 사역 네트워크 또는 기존 사역을 활용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교회가 공적 생활을 위해 교인을 제자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신앙을 감추지 않을 것이며 또한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6. “기독교 지성” 프로젝트.[16] 복음주의는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강력한 반지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교수진을 늘리고 정통 개신교를 위한 강력한 지적 문화를 구축하며 또한 기독교 공공 지식인의 수를 늘려야 한다. 


7. 새로운 리더십 파이프라인. 우리는 전국의 청소년 사역과 캠퍼스 사역을 갱신하고 재창조해야 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장을 통해 크게 강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사역을 신학 훈련 프로그램 및 신학교와 연결해야 한다. 이는 보다 더 잘 갖추어진 기독교 지도자를 점점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7개 프로젝트 뒤에는 8번째 ‘메타’ 프로젝트가 있다. 그것을 기독교 자선이라고 부르자. 강력한 재정 지원 없이는 교회를 새롭게 하거나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부를 기부하고 관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고가 더 많은 돈을 사역을 위해 내놓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프로젝트는 같이 서거나 아니면 같이 무너진다. 모든 프로젝트는 서로를 지원하고 활력을 준다. 모든 프로젝트가 다 성취되지 않고서는 그중 어떤 하나도 제대로 된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운동은 미래의 비전 및 운동과 관련해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를 분명히 할 것이다. 


효과적인 운동은 그 운동이 가져올 미래의 청사진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역 프로젝트의 다양한 실제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우리가 과연 어떤 교회로 부름받았는가에 대한 그림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사항을 다짐한다. 


• 아직까지 교단이라는 큰 천막 속에 있는 개신교의 교리적 정통.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파와 전통을 사랑하지만 다른 교단과 전통도 존중하고 감사할 것이다. 

•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아 성결에 이름. 우리는 도덕주의와 상대주의의 전형적인 이중 함정을 피할 것이다. 

• 글로벌 및 비서구 교회와의 일치. 우리는 비서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운동으로 길을 찾을 것이다. 

• 다민족 미국 교회와 리더십. 우리는 비백인 지도자들에게 진정으로 힘을 실어주는, 다민족 팀이 이끄는 운동을 교회 전체에 걸쳐서 만들 것이다. 

• 말과 행동을 통합하는 사역. 우리는 정의와 자비를 행함으로 전도와 가르침을 하나로 만들 것이다. 

 영적 부흥, 그러나 또한 기관의 설립. 우리는 개인의 영적 경험 뿐 아니라 지역 교회와 새로운 기관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 좌파 또는 우파 정치의 세속적 형태에 저항하는 개신교의 사회 가르침을 지향할 것이다. (위에서 이미 다루었다.)

• 사도적이면서 동시에 종으로 섬기는 리더십. 우리는 역동적이고 기업가적인 “사도적” 지도자를 지지하지만 그러한 지도자가 섬기는 자세로 일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 세계관 그러나 일반 은총.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믿음과 다른 세계관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면서도 불신자가 가진 일반 은총과 지혜를 인정할 것이다. 

• 독창적인 기독교 ‘사회 프로젝트.’ 우리는 a) 다민족, (b)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c) 용서와 화해, (d) ‘낙태 반대’라는 대의, (e)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녀 성별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결혼과 섹스를 굳건하게 지킬 것이다.

• 신학적 회복(retrieval)과 교의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 우리는 과거의 정통에 충실하지만, 또한 정통을 현대 문제와 연관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비상한(Extraordinary) 기도.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 부분인 기도와 관련하여 영적 갱신과 부흥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글을 깊이 새기자. 


“나는 지난 수세기에 걸쳐서 교회, 특히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신 사람들의 전기를 읽을 것을 권합니다. 당신은 그들에게서 동일한 수준의 거룩한 담대함, 동일한 논쟁, 동일한 추론, 동일한 차원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모든 비밀이라고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은 멋진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괴롭히시오(sue), 하나님을 괴롭히시오.” 하나님을 혼자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을 괴롭히십시오. 하나님께 성경을 인용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치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그대로 하는 어린 자녀를 보면서 기뻐하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17]



[주]

4. 데이비드 베빙턴의 복음주의 네 가지 특징과 “오직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상관관계가 있다. 베빙턴은 (a) 성경의 완전한 권위-(sola Scriptura) (b) 회심의 필요성, 거듭남-(sola gratia and sola fidei) (c) 예수의 피 속죄에 의한 구원, 그리고 역사함-(sola Christus) 그리고 (d) 선교, 세계 복음화의 필요성-(sola Deo Gloria)으로 열거했다. 

5. 이런 사례는 다음을 포함한다: The Augsburg Confession (1530), The Belgic Confession (1561), The Helvetic Confession (1562), The Thirty-nine Articles of the Church of England (1571), The Heidelberg Catechism (1576), The Canons of Dordt (1619)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Larger and Shorter Catechisms (1647), The Savoy Declaration (1658), The Baptist Confession of Faith (1689). 그들은 로잔 언약과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과 같은 신앙 선언문에서 더 현대적인 표현을 찾는다. 이 모든 고백은 루터교, 개혁파, 성공회, 침례교, 회중 공동체에서도 통하는 것이기에 여러 면에서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두가 다 개신교 정통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

6. George Marsden, Reforming Fundamentalism: Fuller Seminary and the New Evangelicalism(Eerdmans, 1987). 19세기에 복음주의는 미국의 비공식적인 종교 기관(establishment)이었다. 복음주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과 더불어 개인의 회심과 경험을 강조하는 ‘부흥주의’적 측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교단뿐만 아니라 초교파적 조직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복음주의 제국”은 대부분의 주요 개신교 교회와 대학 및 종합대학을 지배했다. 대부분의 공인은 비록 기독교의 믿음과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 세대를 거치는 사이에 대학, 주요 개신교 교단, 연방 정부 및 기타 주요 문화 기관 등 엘리트 사회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영향력과 명성이 무너졌다. 성서의 ‘고등 비평’과 다윈의 진화론은 둘 다 유럽 대학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후 미국으로 퍼졌다. 새로운 대학 중 다수는 의도적인 반종교적, 세속적 기반에서 설립되었다. (Christian Smith, ed. The Secular Revolution: Power, Influence, and Conflict in the Secularization of American Public Life, University of California, 2003 참고). 그러자 주류 교단의 많은 지도자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현대 과학과 감성에 비추어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대 자유주의 전투는 미국 북부 (나중에 미국 전체) 침례교 대회와 북부 장로교회에서 처음 발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 보수주의자는 그 전투에서 패했고 1920년대 후반까지 “미국 북부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존경받는 교육 기관도 근본주의적 가르침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Marsden, 4)가 현실이 되었다. 189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보수적인 개신교가 엘리트 문화 기관, 특히 북부의 엘리트 문화 기관에서 쫓겨났을 때, “근본주의”라고 불리게 된 수천 개의 새로운 조직, 네트워크, 라디오 사역, 여름 캠프, 학교 및 기관, 그리고 수많은 협회가 설립되었다.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과 나단 해치(Nathan O. Hatch, The Democrat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 Yale, 1989)는 분리주의, 급진적 개인주의, 반지성주의 및 정치적 극단주의를 향한 “경향” 안에 초기 미국 복음주의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보여준다. (Marsden, 10). 이러한 경향은 사회에서 복음주의가 더 만연했을 때 오히려 잠잠해졌지만, 이제는 근본주의자가 스스로를 초교파적 조직으로 후퇴시켰다. 존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과 같은 더 지성적인 근본주의 지도자의 영향력은 사라지고 있고, 새롭게 궁지에 몰리는 입장에서 근본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도리어 크게 강화되고 있다. 

7. Marsden, 10.

8. Carl Henry, “The Vigor of a New Evangelicalism” Marsden, 69에서 인용.

9. 오늘날 복음주의자를 갈라놓는 다른 차이점에 대해서는 내가 새롭게 급증하는 근본주의를 설명한 두 번째 글을 참조하라. 

10. 칼 헨리(Carl Henry) 못지않게 복음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엇갈린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에도 그 단어가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무도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19세기 기독교처럼  들렸고, 따라서 “시대에 뒤진 것(passe)”이었으니까.” (Marsden, 10).

11.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는 개신교의 두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Reinhold Niebuhr, “The Christian Church in a Secular Age” in Robert McAfee Brown,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Selected Essays and Addresses, Yale, 1986, 79-92, 및 David T. Koyzis, Political Visions and Illusion: A Survey of and Christian Critique of Contemporary Ideologies 2nd edition, IVP, 2019.

12. 지금까지 나온 모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버전은 다음이다.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Harper and Row, 1951.

13. American Evangelicalism: Embattled and Thrivin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에서 저자 크리스찬 스미스(Christian Smith)는 ‘종교적 힘의 하위문화적 정체성 이론’을 제안했다. 이는 일부 종교 공동체가 다원적 환경에서 더 잘 번성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스미스는 “전투를 잘 선택하는” 종교 공동체가 가장 잘 번성한다고 주장한다. 일반 문화와 전투를 벌일 때, 너무 많은 지점에서 또는 너무 적은 지점에서 싸우는 경우 번성하기 힘들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가 (너무 많은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는) 근본주의 또는 (너무 적거나 아예 싸우지 않는) 자유주의 개신교보다는 더 나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는 매혹적이며 미국 교회의 모든 갱신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서 함축적 의미를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전투’ 즉 비판과 반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전투에 관해 순진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전투’를 어떻게 벌이느냐이다. 

14. James Davison Hunter,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Oxford, 2010, 43.

15. “faithful presence” 개념에 대한 설명은 Hunter, To Change the World 참고. 

16. “기독교 지정”이라는 표현은 Mark Noll의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Eerdmans, 1994)에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

17. D. M. Lloyd Jones, Revival, Crossway, 1987, 209.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3-The Path to Renewal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

번역: 무제


성경의 교리와 윤리적 원칙이 사회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이론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사회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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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