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강과 상승, 비움과 채움

케노시스의 신비

by 최병락2022-06-25

기독교는 ‘위대한 상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대한 하강’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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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이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위아래가 없다. 세 분은 완전히 동등하시고 본질상 하나이시며 창세전부터 존재하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인간 세상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기독교 변증가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 인생에서 이 사건을 ‘위대한 하강’(Great Descent)이라 표현했다. 기독교는 ‘위대한 상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대한 하강’의 이야기다. 얼마나 높아졌느냐의 성공 이야기가 세상의 이야기라면, 기독교는 얼마나 낮아졌느냐의 겸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묻는다면, 그는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어디까지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느냐”를 물을 때, 비로소 그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비울 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으로, 죄인으로,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인 십자가와 무덤 속으로까지 낮아지실 수 있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중요한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비워…”(빌 2:7).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이러한 비움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 부른다. 이는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3-4세기경 기독교는 기독론을 두고 뜨겁게 논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가 아닌가를 놓고 치열하게 갑론을박했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인가, 유사 본질인가를 놓고 뜨겁게 논쟁했다. 이때 논쟁을 불식시킨 성경 구절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이다. 이로써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정통 기독론이 명확히 정립되고 삼위일체론이 완성된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곧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인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할 책임을 지고  보내‘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비워 자원하여 기쁨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영역본 성경 NIV는 자기를 비운다는 말을 “Made himself nothing”로 옮겼다. 말하자면, ‘자기를 없는 존재처럼 여긴다’는 의미를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자기를 감추시고 낮추시고 비우셨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성부 하나님을 높이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를 때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


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비우시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시는 삶을 사셨다. 사람들에게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자기를 낮추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마음이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품으라고 촉구한다.


나를 통해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철저히 비워 오직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만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이다. 나도 보이고 하나님도 보여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나는 확실히 죽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삼위 하나님 중 그 누구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오직 서로를 드러내실 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높여 주신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잠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삼위일체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삼위일체를 제대로 아는 교회는 절대로 갈등이 생길 수 없다”고 했다.


어느 공동체든지 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금방 깨지고 만다. 이는 자기를 비우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이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원하는 직분이나 인정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조용히 이동만 하면 그나마 덜 불행이지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유야 수백 가지겠지만 근원은 자기를 비우지 못한 결과이다. 내가 살아 있기에 나를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하고, 무시를 당한 것 같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걷어내고 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본받고 배워야 한다. 비움에는 자력의 비움과 타력의 비움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력의 비움이다. 이는 마음을 겸손히 하여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는 죽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타력의 비움은 그 사람의 욕심과 자존심과 자아가 모두 비워질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거나, 급할 때는 강제로 비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우리가 비우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비워야 채우기 때문이다. 


극한 가뭄에 피폐해진 시돈 땅에서 아들과 살고 있는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먹고 죽으려 했다. 그런 모자 앞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엘리야는 이제 곧 목숨과 맞바꿀 그 얼마 남지 않은 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 통에 남은 가루와 병에 남은 기름을 비운다. 이것이 케노시스, 비움이다. 그리고 가루와 기름을 비우고 났더니 그때부터 그 병에 기름이, 그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는 채움이 시작되었다(왕상 17:8-16). 케노시스는 케노시스로 끝나지 않는다. 채워지는 기적이 시작된다. 그래서 케노시스는 곧 케노시스의 신비이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어 빈 배와 빈 그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고, 베드로는 그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빈 배는 만선으로 바뀌었다. 놀라운 채움이다. 예수님은 빈 배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요 21:1-14). 완전히 비기 전까지는 베드로에게 아무리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해도, 자기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완전히 빈 배가 되고 나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배와 마음이 철저하게 케노시스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께 순종하게 되었다.


사르밧 과부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했는가? 베드로처럼 평생 모아서 사 놓은 배 한 척이 빈 배가 되고, 그물은 찢어져 기능을 상실했는가? 화려한 인생의 시간이 지나고, 명성과 평판을 잃고, 축제의 포도주 통이 텅 비어 버렸는가?


비움 앞에서 사르밧 과부와 베드로는 공통의 경험을 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만났다. 비어버린 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전에 예수님으로 채워야 한다. 그 비움에서 채움이 시작된다. 케노시스는 그래서 플레로마, 곧 충만의 시작이다.


낮아짐으로 


예수님의 위대한 하강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자 그 다음에 위대한 상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다가 땅 위에 오시고, 땅 아래로 내려가셔서 장사되신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려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위대한 자기 비움으로 하강하신 것이다. 땅 위로 오시지 않으면 땅 위의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땅 아래로 내려가시지 않으면 사망 권세에 놓인 자들을 해방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비굴한 것도 초라한 것도 실패도 아니다. 낮아지는 동안 그 경험으로 인해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편집자 주_이 글은 최병락,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두란노)의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비어버린 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전에 예수님으로 채워야 한다. 그 비움에서 채움이 시작된다. 케노시스는 그래서 플레로마, 곧 충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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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병락

최병락 목사는 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침례신학대학을 거쳐 사우스웨스턴신학교(M.Div.)와 Dallas Theological Seminary(M.A), 사우스웨스턴신학교(Th.M)을 졸업했다. 저서로 ‘모든것을 살리는 예배’(2019. 요단출판사),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2020. 두란노서원), ‘다시 시작하는 힘, 은혜’(2021. 요단출판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