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by Jeremy Linneman2022-07-03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사망에 악영향을 미친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이런 헤드라인을 봤을 것이다.


• “의료계는 이제 외로움을 전염병이라고 말한다”(워싱턴 포스트)


• “젊은이가 노인보다 외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USA 투데이)


• “중년 남성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흡연이나 비만이 아닌 외로움이다”(보스턴 글로브)


• “외로움이 건강에 미치는 놀라운 영향”(뉴욕 타임스)


• “외로움은 더 깊은 외로움을 낳는다”(애틀란틱)


• “사회적 고립이 우리를 죽이는 방법”(뉴욕 타임스)


• “사회적 고립이 비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슬레이트)


사회적으로 서로를 연결하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로워한다. 저렴한 전화통화와 무료 이메일에도 불구하고 소통은 줄어만 들고 있다. 모두가 다 자동차를 갖고 있고 항공여행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지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볼링도 함께 치다가 혼자 치는 서서히 늘어나더니 소셜 미디어가 넘치는 이제는 아예 볼링 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저 화면을 바라보면서 혼자 스크롤 할 뿐이다.


어쩌다 이러한 사회적 고립이 심지어 트렌드가 되어버렸을까? 이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내 이론은 간단하다. 서구 공동체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으며 급진적 개인주의는 가장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급진적 개인주의는 전례 없는 사회적 고립과 21세기 미국 문화 특유의 깊은 외로움을 낳았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 이 점은 기독교 신학에서야 오래 전부터 주창되어온 것이지만 이제는 신경과학조차도 뒷받침하는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에 깊은 고립을 낳는 상황은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이해함으로 우리는 교회와 세상에서 사회적 연결과 우정,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다.


21세기 전염병


올해 초 UCLA가 개발한 외로움 척도(Loneliness Scale)에 기초하여 2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그나(Cigna) 연구에 따르면, 18세에서 22세 사이가 72세 이상보다 외로움을 훨씬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결과는 학계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우리 각자는 다 하나의 외로운 국가이다. 


전직 외과의사였던 비벡 머씨(Vivek Murthy) 박사는 외로움을 전염병이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머피는 외로움이 만성 염증과 심장병, 관절염 및 당뇨병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교활한 유형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사망에 악영향을 미친다. 


외로움은 현대 서구 문화에서나 만나는 전염병이라고 쉽게 주장할 수도 있다. 심장병에서 음란물 사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전염병 대부분은 외로운 마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없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질병”이라고 말한 테레사 수녀의 말은 옳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우리보다 중요한 나


외로움은 개인주의 사회의 당연한 증상이다. 적지 않은 역사가와 철학자가 지난 70년 동안 개인주의의 부상을 추적했다.


철학적 관점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종교적인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전환한 서구 지성의 흐름은 자아와 의미에 대한 일차적 견해로서 공동체가 아닌 개인주의가 부상한 사실과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사물도 중요했지만, 사회적 유대 자체도 매혹적이고 신성하게 간주되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를 인용하자면) “우리 조상이 살았던 마법에 걸린 다공성 세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삶이었다.” … 개인이 의미의 핵심이 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의 본질적 원칙(atomism)은 이것이다. 불신이 더 이상 사회적 문제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음새 없는 천이나 촘촘하게 짜인 사회적 조직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사회적 “가스” 안에서 떠도는 개별 분자처럼 하나하나가 얼기설기 모여서 이룬 일개 집합일 뿐이다. 


엉뚱한 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 환멸에 빠진 개인으로서 나는 단지 단순히 자율성과 자존감이 필요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깊은 관계로 연결된 공동체 속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라지는 관계


건강한 공동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점점 더 희귀해지고 있는, 같은 지역 내에서 발생하는 빈번한 상호작용이다. 


최근에 아내가 자기의 하루 일과를 이야기했다. 아내는 식료품점에서 우연히 원래 알던 린지와 최근에 사귄 브래드와 체스니를 만났다. 같은 날 나는 빵집에서 친구 로스를 만났고 자전거 가게에 들러 안젤라와 내가 지금 고민 중인 몇 가지 새 타이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우연한 만남”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런 만남이 없이 며칠을 지난다고 해도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마크 던클만(Marc Dunkelman)은 이러한 우연한 만남이야말로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식료품점, 커피숍, 놀이터와 같은 공공장소에서 이웃은 건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웃과의 평범한 대화가 수백 마일 떨어진 사람과 스크린 화면을 두드리면서 만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식의 변화는 점점 사라지는 미국식 공동체에 더 큰 문제를 드러낸다고 더클만은 지적한다


오늘날 성인은 과거 할아버지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연결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시간과 관심을 아주 친밀한 사람 또는 가장 가벼운 관계의 지인에게 사용한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고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우리는 아예 포기했다.


중간 고리가 없는 사회 구조는 많은 부분에서 무너진다. 이러한 사회학적 발견은 우리의 경험과 일치하는데, 모든 사실이 신경과학에 의해서까지 뒷받침된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경과학이 신학을 지지할 때


UCLA의 한 연구원은 관계 및 커뮤니티 문제에 기능성 MRI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 중 하나이다. 당연히 그의 연구는 사회적 연결의 필요성을 심도 있게 확인했다.


기능성 MRI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는 인간의 두뇌가 사회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과거에는 불가능하던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인간의 두뇌가 다른 사람과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 이는 결코 결함이 아니라 설계상 특징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회적인 두뇌의 소유자이다. 이러한 발견은 자연스럽게 두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고립의 힘을 보여준다. 거부감이나 외로움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레고를 밟을 때 고통을 느끼는 뇌의 영역과 똑같다(Cacioppo and Patrick, 8).


외로움은 아프고 그 고통은 육체적 질병으로 발전하는데, 치료 방법은 약이 아닌 우정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공동체 내에서 서로 연결되도록 설계된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을 모든 과학이 다 동의한다.


관계를 맺는 존재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관계의 모델이 된다. 그는 관계를 맺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는 하늘을 쪼개면서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라 어머니의 태에서 조용히 자라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과 초기 성인기를 무명으로 생활한 후에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역을 시작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에도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또 겟세마네에서 함께 기도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어머니를 돌보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때때로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났지만 대부분의 활동을 그들과 함께 했다. 그의 삶과 사명은 그가 고립된 삶을 살기를 거부했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에게 관계가 필수적이라면, 우리에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관계를 위해 존재한다. 삼위일체 곧 영원히 관계적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완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예수님이 역사상 가장 “완전하게 살았던” 인간이었기에, 누구라도 공동체 없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 


마음이 외로운


외로움이 넘쳐도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구원들은 ‘UCLA 외로움 척도’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어려운 질문에 답하고 실제 관계와 일상 습관을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 결코 스스로를 “외롭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운가?


나는 30대 중반 기혼에 아이가 셋이고 생계유지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런 내가 어떻게 외로울 수 있을까? 아내는 최근에 내가 가장 좋아할 휴가는 감시가 느슨한 감옥에서 두 주를 보내는 것일 거라고 농담했다. 세 끼 식사에 마당에서 보내는 여유 있는 시간, 그리고 우는 아이들도 없고 말이다. 아내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십대 때만큼 친한 친구가 많지 않고, 여가 시간도 전보다 줄어들었고, 또 대학 때처럼 밤늦게까지 놀 에너지도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대부분의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20대와 30대와 40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때가 사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바쁘지만 관계는 끊어져 있다. 우리가 가진 여러 관계는 다 피상적이다. (소셜 미디어는 잘해야 외로움 해소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뇌와 마음은 할 일이 많이 정신없다고 소리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외로워서 고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외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고립과 싸울 수 있을까? 고독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또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외로운 자를 가족에 포함시킨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시편 68편에서 다윗은 아버지 주님을 찬양한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편 68:5-6.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 그는 외로운 자를 가족 안에 두신다. 외로움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가장 깊은 형태의 고독에서 탈출하는 것, 곧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포함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옹호자, 해방자이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독의 감옥에서 가족이 주는 자유로 해방시켜 주신다. 물론 여기에 묘사된 가정생활은 생물학적인 부부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다. 


복음은 사회적이다


우리가 가진 좋은 소식은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복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은 관계적 차원이다. 창세기 3장의 저주는 관계적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갈등, 아내와 아이 사이의 고통, 하와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 사이의 적대감.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역전되는 저주 또한 관계적이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가족이다. 교회는 증거, 교제, 환대, 민족 화해를 통해 형성된다. 영원조차도 사람과 장소로 묘사된다. 


우리 미국인은 심할 정도로 개인주의적 틀에서 성경을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는 오로지 복수대명사만 들어있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의 죄를….”) 바울은 “우리 주님”을 53번이나 썼다. 그에 반해 “나의 주님”은 딱 한 번만 썼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적인 것 이상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베드로전서 2:9-10.


교회에서 외로움에 반응하기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은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 육성을 우선시하도록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복음의 능력으로 외로움을 물리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1. 등록을 통한 소속감 만들기


내가 루이빌에 있는 ‘잠시 머무는 교회’(Sojourn Church)의 교인등록팀으로 일할 때, 우리는 등록교인 자격을 단순히 한 교회에 소속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 전환은 중요하다. 교회에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갈망에 호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초대임을 발견했다.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나 자존감, 의미 있는 일, 결혼, 또는 자녀가 아니라 소속감이야말로 음식과 주거지를 뛰어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교인에서 우리는 단순히 “나는 헌신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속해 있습니다”라고 한다. 새로운 교인이 교회에 대한 공개적인 헌신을 선언한다면, 교회도 그들을 향한 공개적인 선언을 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조셉 헬러맨(Joseph Hellerman)은 When the Church was Family(교회가 가족이었을 때)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영성 형성은 주로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발생한다. 지역교회에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만족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이해에서 더 발전하며, 하나님 및 다른 사람과 건전한 관계를 맺는 능력에서도 더 성숙해진다. 이것은 대인관계의 불화와 갈등 해결이라는 종종 지저분한 과정을 통해서까지도 자기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용감한 그리스도인에게 특히 해당한다. 장기적 인간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정한 발전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한 교회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헌신하도록 도전하라.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에 소속하도록 초대하라. 


2. 생명을 주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라


나는 생명을 주는 공동체 옹호자이다. 한 달에 몇 번 누군가의 집에 모이는 소그룹 모임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내 희망은 성인, 십대 및 어린이가 다함께 진정한 공동체의 리듬을 찾는 것이다. 소그룹은 달력에 표시한 시간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이다. 건강한 그룹은 서로 격려하고, 도전하고, 또 지원한다. 


나 역시 공동체 모임에 매진하고 있지만 교회에서 공동체를 육성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현재 주일학교 공과공부, 주중 예배 또는 지역사회 봉사 등등을 통해 공동체를 제공하고 있다면, 이미 구축한 그런 공동체를 더 발전시킬 방안을 고민해 보라. 필요하다면 더 깊은 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전혀 새로운 공동체도 만들어 보라. 


3. 공유하는 리더십에 대한 약속


외로움이 서구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한 동시에 다양한 회중과 사역의 부족, 많은 지도자의 도덕적, 관계적 실패 등과 같이 몇 가지 전혀 다른 긴급한 과제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흔하게 발생하는 리더십의 실패는 가장 먼저 관계와 책임, 공유된 권위의 실패에서 비롯한 것이다. 


교회가 외로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리더라면 외롭기 마련이다”는 논리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물론 회중이나 조직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리더십은 참으로 무거운 짐이지만, 그 리더십을 서로 나눔으로 외로움을 크게 완화할 수 있다. 건강한 장로, 직원 또는 자원봉사자 등으로 이뤄진 헌신된 팀과 함께 만들어 가는 목회는 한 명의 목사 또는 지도자의 부담을 줄이고 교회 사역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보호한다. 


4. 우정과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


많은 교회가 결혼, 육아, 가족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치지만, 우정과 공동체에 대한 심도 깊은 설교 시리즈를 듣는 것은 드물다. 그러나 구약은 가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소명,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그리고 우정과 충성에 관한 지혜를 강조한다. 신약은 예수님의 긴밀한 관계적 제자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증거, 서신서의 “서로”를 향한 명령,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누릴 영원한 교제의 소망에 대한 비전을 제공한다. 


교회는 중점적으로 설교하는 내용을 홍보하기 마련이다. 우애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는 강단을 활용하여 외로움 전염병을 퇴치할 것이다.


5. 서로에게 헌신하라


서구 개인주의는 전례 없는 사회적 고립을 촉발시켰기에 우리는 지역교회를 통해서 인간 본성과 공동체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바울서신서는 희생적인 관계를 통해 지역교회 안에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로마서 12:10-13의 부르심을 점점 더 구체화하기를 바란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원제: How Your Church Can Respond to the Loneliness Epidemic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개인의 자유나 자존감, 의미 있는 일, 결혼, 또는 자녀가 아니라 소속감이야말로 음식과 주거지를 뛰어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Jeremy Linneman

제레미 린맨은 미저리주 콜롬비아에 위치한 Trinity Community Church의 선임목사이며, 대표 저서로 'Life-Giving Groups: “How-To” Grow Healthy, Multiplying Community Group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