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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팀 켈러는 왜 ‘도시 선교’를 말하는가?
by 고상섭2022-07-20

도시를 선교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한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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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음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으로 복음 생태계를 만들어 도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팀 켈러를 언급할 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대두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복음’과 ‘복음설교’일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은 너무 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반드시 도시로 그리고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 도시인가? 


도시선교라는 단어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시를 선교해야 한다면 농촌은 선교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는 단순히 농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도시가 아니고 또 농촌선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팀 켈러가 도시에 집중하는 이유는 도시는 단위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살고 있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문화와 사회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도시의 변화는 한 개인의 변화를 넘어 도시 속에 창출된 경제, 정치. 법질서, 문화의 변화를 촉진한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도시의 개념에 눈을 뜨지 못하면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게 되고 구조적인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도시를 선교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한다는 뜻이 된다. 


도시의 긴장


도시는 사람들이 몰려 밀집된 곳이라 도시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선교적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만 또한 죄의 온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모여 있는 도시에는 안정과 안정, 다양성, 생산성과 창조성이라는 일반은총의 긍정적 요소도 있지만 죄와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모습도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에 빛을 비추어서 선한 영향력을 통해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소금이 되어 도시의 부패를 지연시켜야 하는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긴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기독교 승리주의식 사역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도시는 교회가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이지만 교회의 힘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곳임을 인식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도시의 완전한 변화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날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임을 이해하라고 권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열매가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밭의 채소’의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세상 속에 있지만(도시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지만) 우리가 먹을 밭의 채소를 통해(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의 예고편과 맛보기) 우리는 소망 가운데 실망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라고.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고 여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팀 켈러,일과 영성, 111쪽).


본래 의도된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얼마쯤 열매를 맺는다. 도시는 교회가 원하는 만큼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로, 천국의 시민권자로 이 땅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임을 선포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는 나침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도시와 구원 


구약 시대의 선교는 구심적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 가운데 이방의 빛이 되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이 유입되는 중심을 향해 바깥에서 모여드는 흐름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의 여왕이 와서 감탄하는 형태의 선교적 모델이었다. 신약 시대 선교는 원심적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해 움직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천국을 약속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파송의 사명을 함께 주셨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교회를 향해 주신 소명은 세상으로 파송이며 이것은 곧 도시를 변화시키라는 부름이다. 도시목회와 선교의 저자인 하비 칸 교수는 선교신학적으로 ‘도시선교’를 단순히 선교라는 개념에 도시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시선교를 새로운 선교학작 장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를 선교하는 것은 기존 선교의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 접근 가능한 미전도 종족 

이전엔 선교지로 나가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많았지만 요즘 도시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국가에서 복지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고, 이주자들과 이민자들은 여러 가지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 가장 효과적인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선교의 불모지에서 선교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교적 환경이 훨씬 좋은 곳에서 새로운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 미전도 종족에 대해 쉽고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2) 젊은 세대

도시에는 젊은 세대들이 몰려 있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18세에서 34세 사이의 미국인 중에 55퍼센트가 뉴욕 시에 살고 싶어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직장이나 학교 주변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주로 삶과 환경에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가거나, 결혼과 출산을 했을 때이다. 삶의 변화가 있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면 새롭게 직장을 구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귀한 자원들이 된다. 


3) 문화적 엘리트

도시는 출판, 미디어, 학문, 예술의 영역이 모두 종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시대정신이 된다. 제임스 헌터는 문화가 변화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이 변방에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문화적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을 수용해서 활용하는 교양인들이 많아질 때 문화는 운동이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비슷한 문화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문화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헝가리에 사는 청소년들이 뉴욕에 사는 청소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맨해튼과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문화 생산물이 세계에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이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복음과 연결할 때 도시의 문화는 복음의 가치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4) 빈곤층 

도시는 명암이 확실한 곳이다. 화려한 면이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 뒤에 보이지 않는 빈곤층과 노숙자들이 함께 있는 곳이 도시이다. 급성장하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3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세계 빈곤층의 대다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에서 엘리트를 전도하는 것과 빈곤층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타당성에 중요한 표시가 된다. 그리고 빈곤층을 섬길 때 필요한 돈과 자원은 엘리트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빈곤층과 도시의 필요를 위해 엘리트들의 돈과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 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역과 엘리트에 대한 사역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곤층을 돕기 위해서 엘리트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빈곤층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메시지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문화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가 된다”(센터처치, 345쪽).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처럼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도시 사역을 강조하고 지원하는 것보다 선교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이 바로 도시를 복음으로 품는 것이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다음 세대를 전도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세상의 문화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센터처치, 346쪽).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처럼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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