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짐승들, 부러운 짐승들
by 전재훈2022-07-22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죽어야 했던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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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불쌍한 짐승들


성경을 보면서 말도 못 하는 짐승들이 참 억울하겠다 여겼던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 하셨지요. 하지만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죽이시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그것도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죽은 것은 다른 짐승이었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려고 짐승을 죽이셨습니다. 짐승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잡은 짐승은 결코 부정한 짐승이 아닙니다. 가장 흠이 없고 정결한 짐승을 잡으셨습니다.


이 짐승이 만약 뱀처럼 대화가 가능했다면 아마도 하나님께 원망하였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그 아담과 하와를 죽이셔야지 왜 저보고 죽으라 하십니까?”


제가 이 짐승이었다고 상상하면 억울함에 미쳐 죽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짐승들이 성경에 더 나옵니다. 세상이 악해져 갈 때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셔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 노아의 식구들과 그 방주에 탄 짐승들을 제외한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명을 멸하십니다.


그때 방주에 타게 되는 짐승들의 규정이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이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으로 정하셨습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는 창세기 6:19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위의 규정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세 쌍에 한 마리를 더 태우고 부정한 것은 암수 한 쌍만을 태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신 이유는 방주에서 나올 때 제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며 예배하는 장면을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창 7:20-21).


저는 제물이 된 정결한 짐승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세상을 멸하실 때는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세상에 나갈 때는 죽임을 당한 짐승들입니다. 이럴 거면 왜 자신들을 살려 주었냐고 항의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죽으려고 더러운 세상에서 정결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고 항의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짐승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벧세메스 암소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6장에 보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꾸만 패배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회의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전쟁터에 두기로 결의합니다. 그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언약궤를 블레셋에 뺏기게 됩니다. 이 일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죽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역시 만삭의 몸이었는데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신전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아예 부서져 있었고 아스돗에 사는 사람들은 독한 종기와 재앙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아스돗에 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두려워하여 가드로 보내지만 같은 일이 벌어졌고 다시 에그론에 보내니 그곳 사람들도 독한 종기가 나서 죽어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리하여 속건제로 바칠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수레에 하나님의 궤와 함께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합니다.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매어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젖 나는 소란 어린 송아지가 있는 소를 말합니다. 멍에를 한 번도 매어보지 아니한 소라면 수레를 끌기가 매우 힘듭니다. 거기에 더해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는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로 갈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멍에를 매어보지 않았으니 불편해서 몸부림을 치거나 본능을 따라 서로 자기 새끼들에게 가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두 마리의 소는 벧세메스로 곧장 나아갑니다. 그때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삼상 6:10-12).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소를 키워본 경험이 없지만 듣기로는 소가 영물이라 도살장에 끌려갈 때는 운다고 들었습니다. 이 두 소는 자신이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두 소에게 실컷 여물을 삶아 먹이고 깨끗하게 씻겨서 자기 송아지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수레를 장작삼아 두 소를 번제물로 하나님께 태워 버립니다. 이 두 소는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을까요? 한번도 매어본 적 없는 멍에를 매고 새끼들마저 떼어놓고 귀한 예물을 담아 여호와의 궤를 고생고생하며 가져왔더니 상은 못 줄망정 번제물로 태워 버리다니요. 저는 이 두 소가 매우 불쌍해 보였습니다.

 

부러운 짐승들

 

그러나 제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서는 이 짐승들을 보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죽어야 했던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이 짐승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부러웠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수많은 정결한 짐승들 중에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정결한 짐승들도 부러웠습니다. 땅에는 짐승들의 시체로 넘쳐났지만 이미 죽어버린 짐승은 제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암수 짝을 찾지 못한 나머지 그 한 마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태어나 결코 일평생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볼 수 없었던 이 두 마리 암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그 말씀을 전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번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영적 예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가장 거룩한 예배는 십자가 위에서 드린 예수님의 예배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렸던 예배는 전혀 그 어떤 희생도 담아내지 않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향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자비하심으로 저의 악취 나는 예배를 참아 주셨습니다.


그 언젠가 저도 구약의 그 짐승들처럼,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제 평생 소원이 이 땅에 거룩한 순교자의 피를 필요로 하실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이라도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언젠가 저도 구약의 그 짐승들처럼,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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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 ‘오히려 위로’(아르카), ‘목사도 사람입니다’(은혜미디어),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두란노/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