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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2022-09-17

우리는 모두 어떤 수준에서 이 이상한 세계에 가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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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

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

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

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

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

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우리 시대의 표현적 개인주의에 가담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술은 약간의 뉘앙스가 필요한데, 표현적 개인주의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에게는 감정이 있다. 정말 우리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형성하는 내면의 심리적 공간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루소가 내면 정서에 뿌리를 두는 자아의 관념을 발전시키는 사이에 조나단 에드워즈도 명백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앙감정론을 저술하면서 내면 공간을 탐구했다. 표현적 개인주의는 우리 정체성을 위한 심리의 중요성을 단언하고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존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옳다.


우리는 또한 개인에 대한 이런 강조가 개인적 믿음의 중요성을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하는 방식에서 신약의 존재론적 시급성과 일치한다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나를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둔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가령 종교의 자유를 생각해 보라. 종교의 자유는 사회적 미덕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핍박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범죄로 취급받는 국가에서 살고 싶어 하겠는가? 그렇지만 이런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 국가에는 보통 우리가 소속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교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종교도 많다. 내가 이 책을 집필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우리 집 주변 10Km 인근에는 수십 개의 교회(장로교회, 루터교회, 동방정교회, 침례교회, 로마가톨릭교회)가 있다. 그리고 심지어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라는 용어도 다양한 교단을 포함한다. 이것은 종교적 자유의 결과(좋은 일)인데, 여기에는 종교를 시장으로 만드는 효과도 있어서 교인은 고객이 되고 교회는 판매자가 된다. 이것은 종교에서 권위가 심리적 자아의 필요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고객인 소비자 쪽으로 기울어짐을 의미한다.


이 논지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 필립 리프가 과거에 했던 다음의 논평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우면 자기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교회에 갔다.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행복의 이런 관념은 기독교나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 사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념은 오늘날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어쩌면 친구를 만나거나 (전통적이든 현대적이든 간에) 기분을 고양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좋은 설교로 마음을 각성하거나 아름다운 노래로 귀를 교화하기 위해 직감적으로 교회에 간다. 개인 기도와 공동 기도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기보다 고통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을 개인적으로 기분 좋게 만드는 데 알맞은 교회에 출석하는(교회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가령 오순절교회의 설교가 호소력이 있는 감정적 유형이든, 성공회나 가톨릭교나 정교회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갈 수 있는 예술미의 애호가든, 아니면 (나처럼) 개혁주의 교회의 지적 설교에 매력을 느끼는 학구적 유형이든 상관없이 사실이다.


어쩌면 내가 여기서 사실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다수는 스스로에게 솔직하다면 우리의 교회 선택이 전적으로 신학적 신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 기호가 일정한 역할을 하는데, 개인적 기호는 우리가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심리화한 심리 치료적 사회의 기대에 따라 형성된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종종 스스로 깨닫는 것 이상으로 세상과 더 유사해지는 다른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 행복의 추종이다. 하지만 행복해지는 것에는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앞 장에서 지적한 대로, 행복의 본질은 몇 년 사이에 내면의 심리적 행복감과 유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일단 우리가 행복을 이런 측면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바울 서신과 특히 고린도후서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삶의 이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번영 복음에 노골적으로 헌신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 중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자기의 개인적 행복의 측면에서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속으로 스며든 심리적·심리 치료적 문화의 결과다.


그리스도인이 가담한 다른 분야도 존재한다. 한쪽 또는 양쪽 배우자의 개인적 행복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혼이 무의미하다고 이해하는 결혼관에 입각한 무과실 이혼의 개념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교회가 단호한 태도를 보였는가? 사랑하는 친척이나 친구가 게이나 트랜스젠더라고 밝힐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감정이 윤리를 지배하게 허용하는가? 우리는 모두 어떤 수준에서 이 이상한 세계에 가담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단체적으로 스스로를 살피고, 우리가 어떤 면에서 이 시대의 정신으로 복음을 훼손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회개하고 은혜를 위해 주님께 부르짖고 자기의 신념, 태도, 직관, 실천을 여기에 맞추어 개혁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 시점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진정한 개혁이다.


둘째, 우리가 자신이 가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이 문제와 관련해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에서 어느 정도 겸손한 태도를 길러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주님께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위한 자리는 있을 수 없다. 


셋째, 자신이 가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미래에 이와 같은 문제와 관련해 적절한 자기비판과 자기 단속에 관여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예배하는 교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요즘은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한 신자도 교회에 계속 출석하는 일을 선택하는데, 교회에 전혀 출석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선택안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교회를 선택했으면 우리는 그 교회에 헌신하고 그 교회를 고수하며 단순히 어떤 사소한 문제나 개인적 기호의 문제로 교회를 옮기기를 거부하기 위해 자신을 수양할 수 있다. 이것은 전혀 완벽하지 않고 쉽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기 인식과 자기 수양 외에는 다른 선택안이 전혀 없다.



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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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미래에 이와 같은 문제와 관련해 적절한 자기비판과 자기 단속에 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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