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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2022-09-24

우리가 우리 시대를 위한 전례를 찾아야 한다면, 나는 우리가 시간상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2세기와 사도 시대 직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기독교는 거의 이해받지 못하고 멸시당하고 주류에서 거리가 먼 종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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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

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

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

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

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

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

전통적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주장(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과 행동)에 뿌리를 둔 신앙이 있으며, 우리는 자신의 종교단체가 오순절과 그 너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의 도전에 직면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현재 경험과 관련된 소망을 찾기 위해 종종 과거를 돌아본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신자는 종교개혁 시대를 돌아보고 로마가톨릭 신자는 중세 중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그 세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은 이와 같은 회귀가 최선의 경우에도 거의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첫째, 종교개혁 시대나 중세 중기 중 어느 것도 후대의 종교적 향수가 우리에게 믿게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황금기가 아니다. 교회가 이 시기에 활동한 사회는 대부분 과학 기술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재구성한 방식 때문에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가 우리 시대를 위한 전례를 찾아야 한다면, 나는 우리가 시간상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2세기와 사도 시대 직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기독교는 거의 이해받지 못하고 멸시당하고 주류에서 거리가 먼 종파였다. 기독교는 부도덕하며 폭동을 부추긴다는 혐의를 받았다. 자기가 섬기는 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심지어 결혼한 다른 신자를 ‘형제’와 ‘자매’로 부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는 외부인에게 매우 미심쩍게 여겨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주장은 표면적으로 보면 일종의 충성서약으로서, 기독교의 문화적 소외를 탄식하며 가이사에게 돌려야 하는 충성을 훼손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우리의 입장 때문에 비합리적이며 편견이 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여파로 종교적 보수주의자와 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시민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매도당하는 것은 일상사가 되었다. 2세기의 영적 선조들처럼 우리도 부도덕하고 폭동을 부추기는 것으로 인식된다.


물론 이 비유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2세기 교회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이방 세계와 마주했다. 우리는 종종 의식적이면서도 의도적으로 비기독교화하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반대가 고대 교회에서보다 더 잘 형성되고 더 적극적일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2세기 교회의 전략을 간단히 살피는 작업은 여전히 유익하다.


첫째, 신약과 ‘열두 사도의 가르침’(Didache) 같은 초기의 비정경 문헌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공동체가 교회 생활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보살피고 섬기는 교회의 심상을 제공한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은 낙태 및 유아 살해 금지를 포함하는 일련의 도덕 규정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교회를 주변 세계와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분명히 기독교 정체성은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된다. 지금까지 주장한 많은 내용의 근간(실제로 사회적 상상이라는 관념의 근간)을 이루는 생각은 정체성이 우리가 소속한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양한 정체성이 있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남편, 아버지, 교사, 영국인, 이민자, 작가, 럭비 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가장 확고한 정체성은 나의 가장 확고한 직관을 형성하며 내가 소속하고 있는 가장 확고한 공동체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가 우리 각자가 소속하고 있는 가장 확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LGBTQ+ 공동체가 이 점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성적 소수자가 주변부에서 중앙 무대로 이동한 이유는 주변부에 있는 동안 형성했던 확고한 공동체와 관련 있다. 기독교의 문화적 소외에 대한 탄식이 정당해도 교회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격변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반응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확실히 탄식하라(우리는 많은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대로 세계가 당위적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탄식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조직하라. 공동체가 되라.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13:35).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으로 안내한다. 공동체는 일상적 세부 사항의 측면에서 보면 시골 마을과 도시, 또는 미국과 영국에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곳에서 공유할 수 있는 특정 요소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배와 교제다.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일, 기도하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낭독되고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일, 세례와 성찬을 기념하는 일, 교회 사역에 물질적으로 헌신하는 일, 이런 일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일 때 해야 하는 것이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세상에 대한 교회의 증언 중 큰 부분은 진실로 예배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불신자가 우연히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 교회에서 진행 중인 예배의 초자연적 거룩함에 감동되어야 한다고 직접 언급한다. 복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언은 예배의 집무에 진심으로 전념하는 교회 자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실제로 문화는 다른 문화를 제공하는 교회가 가장 극적으로 관여하는데, 교회는 예전적 예배에 뿌리를 두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로서 예배 안에, 그리고 예배를 넘어서 존재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발현된다. 그리스도인과 세속주의와의 문화 전쟁에 대한 많은 이야기, 그리고 틀림없이 성경 자체도 이 시대의 영적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전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 세계의 물리적 전쟁의 실재와 역사를 고려할 때, 어쩌면 ‘문화적 항의’가 이 개념을 현대적 관용어로 바꾸는 더 나은 방식일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된다는 의미에 대한 진정한 이상을 제공함으로써 더 넓은 문화에 항의한다.


이 접근법은 2세기 기독교 문학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같은 소위 헬라 변증가들은 로마 제국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오늘날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는 방식과 비교할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고대 변증가들이 크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헬라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와 그의 신하의 악폐를 비난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헬라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인이 최고의 시민, 최고의 부모, 최고의 종, 최고의 이웃, 최고의 고용인을 만들므로 정부 당국의 괴롭힘 없이 일상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이 시민 생활에 참여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에는 물론 한계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하듯이 황제에게 제사하라고 요구받으면 거부해야 했겠지만, 이런 요구를 제외하면 로마 사회의 훌륭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걸작 하나님의 도성 19권에서 비슷한 주장을 제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의 도성의 시민인 동시에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이교도 이웃은 단지 이 땅의 도성의 시민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두 집단이 여전히 공동의 이익이나 사랑, 무엇보다 지상의 도성의 평화와 번영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이것들을 원했으며,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협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헌신이 자신에게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고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변증가들과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두 적대적 문화 속에서 교회에 대한 이상을 제공하는데, 이 이상은 ‘교회가 교회가 될 것’과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위치한 더 넓은 사회의 건설적 구성원이 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사람은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대결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패배주의나 철수처럼 보인다고 반발할지 모른다. 정말 그럴까? 낙태 같은 중요 문제와 관련해 서구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도성의 구성원으로서 자기의 권리를 선을 위한 운동에 여전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시민적 책임을 포기하기를 촉구하거나, 이 같은 책임을 추구하는 방법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추구하는 방법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 수동적 정적주의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세상의 도구, 수사학, 무기를 사용해 문화 전쟁에 관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변증가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수동적 정적주의자였다면, 기독교가 대단히 오랜 세월 동안 서구에서 어떻게 그토록 우세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역사적 증거는 오히려 변증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법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단히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아마 내 생전에나 우리 아이들의 생애에는 아니더라도 또다시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시며 장기전을 벌이는데,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원제: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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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도구, 수사학, 무기를 사용해 문화 전쟁에 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방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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