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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강화교산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2-10-15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그 복음에 담긴 영원한 소망을 보았기에 혼자만 그 소망의 길을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갯벌을 걷고 있는 이승환의 모습에서 존스 선교사는 분명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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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조선을 넘보는 제국주의 열강이 조정을 향해 오다가 맞닥뜨리는 곳, 그곳은 강화도이다.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강화도, 이 섬은 조선 정부의 최전(最前)의 보루였다. 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넘지 못하고서는 조선의 심부(深部)로 향할 수 없었기에 미국의 함선도, 프랑스의 함선도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과 결전을 벌여야만 했다. 프랑스가 침략한 병인양요(1866)도, 미국이 도발한 신미양요(1871)도 모두 강화도가 그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강화 도민들에게 양인은 모두 오랑캐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더 이상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두 양요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면서 조미통상수호조약(1882)과 조영통상조약(1883)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1884년 알렌 선교사를 필두로 양인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의식에는 서양 오랑캐로 각인되었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어도 그들의 여정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강화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893년에 처음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존스 선교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893년이면 이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시점이지만, 그래도 강화도 입도(入島)는 불가능했다. 강화유수와 도민들이 양인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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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강화도 출신의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승환이 그였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그는 일거리를 찾아서 인천으로 나왔다. 인천에서 새로운 세상 물정을 경험하였고, 인천 번화가에서 주점을 열어 큰돈도 벌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불릴까 궁리하다가 선교사가 시작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돈을 불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갔지만, 오히려 교회에서 곗돈을 잃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돈은 잃었지만, 그는 교회에서 존스 선교사를 만났고, 이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으며,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자신이 주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하나님을 모르는데 혼자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죄스럽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이승환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었다. 이승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점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 하지만 세례를 받게 할 길이 없었다. 하여, 이승환은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인천과 황해도 지방의 선교를 책임지고 있는 존스 선교사에게 어머니의 세례를 요청했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양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승환은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구원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존스 선교사를 전세 낸 배에 태우고 고향마을인 시루뫼(甑山)로 향했다. 하지만 향리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토호인 초시 김상임이 있었다. 그는 결코 자기 마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당시 김상임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방의 유생들과 함께 사실상 어른 노릇을 하면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시루뫼 마을 대부분이 그의 땅이기에 마을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승환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존스 선교사를 태운 배를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앞산 너머 갯벌에 정박해 놓고 마을로 들어와 물때를 기다려 밤이 깊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앞산을 넘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이르렀을 어머니를 등에 업고 멀리 갯벌에 정박한 배로 향했다. 쉽지 않은 발걸음이다. 혼자 걷기도 어려운 갯벌을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걷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환의 열정은 기어코 어머니를 뱃전에 앉혔다.


존스 선교사는 뱃머리에 선 채 멀리 어머니를 업고 배를 향해 다가오는 이승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록 입도는 할 수 없었지만, 이승환의 모습을 보면서 훗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당장은 외세와 양인들을 배척하지만,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는 분명 그 은혜를 담아내는 교회가 될 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간절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그 복음에 담긴 영원한 소망을 보았기에 혼자만 그 소망의 길을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갯벌을 걷고 있는 이승환의 모습에서 존스 선교사는 분명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뱃전에 앉은 이승환의 어머니는 문답을 거쳐 어렴풋한 달빛 아래에서 선상 세례를 받았다. 존스 선교사의 평생 사역에서 시루뫼 마을 앞 갯벌에서 행한 세례식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것은 강화도 최초의 세례식이었으며, 오늘의 강화도가 복음의 섬이 되는 시작이었다.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한 선상 세례를 시점으로 강화도 복음화를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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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존스의 능력도, 이승환의 효심 때문도 아닌 성령님의 역사가 드러난 것이리라. 철저하게 양인들을 배척하는 땅 강화도, 그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북쪽의 한 촌락 시루뫼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루뫼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동과 서로 강화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전역을 퍼져나갔고, 강화도는 복음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시루뫼에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다음에도 걱정은 이어졌다. 예배를 할 수 있어야 했지만, 마을에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환은 묘책을 찾아야 했다. 당장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존스와 함께 사역하고 있던 전도부인 이명숙과 백헬렌을 이 마을로 오게 해서 어머니의 신앙을 양육하면서 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이 더해지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또한 선교사 입도를 결사반대했던 초시 영감 김상임도 존스 선교사를 만나면서 개종하게 되었고 끝내는 시루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스 선교사는 김상임을 인천 우각동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개설한 신학회에 참석하게 하여, 훗날 시루뫼 공동체의 전도사가 되어 평생을 이 공동체를 섬기게 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시루뫼의 역사를 잇고 있는 교산(橋山)교회이다. 시루뫼에서 시작한 작은 공동체는 강화도의 모교회가 되어 200여 교회와 강화도를 신앙의 섬으로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



예배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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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교회는 선교 초기인 1896년에는 초가를 한 채 매입해서 예배 처소로 사용하다가 1915년에 처음으로 초가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 지은 예배당에서 시루뫼 공동체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겨내고 해방을 맞았다.

 

6.25사변이 휴전을 맞으면서 강화도 지역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원조가 감리교 본부로부터 전달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해야겠다는 의지가 낙후된 지역인 이곳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58년 4월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30평 규모의 석조 예배당이다. 해방 이후에 지어진 예배당들이 주로 석조건물인 것을 생각하면 시대적 특징을 잘 간직한 건물이기도 하다.


이 예배당이 지어지기까지는 큰 희생이 있었다. 김봉일 성도의 딸이며 김예기 목사의 어머니인 김리브가 권사가 옥답 1,000여 평을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김용기 탁사부장은 예배당 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가능했다. 또한 예배당 완공과 함께 문순만 권사가 부흥회를 통해서 온 가족이 인가귀도(引家歸道) 됨을 기뻐하면서 풍금 한 대를 헌물로 드렸다. 이때까지 이 교회에는 풍금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온 교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봉헌감사 예배를 1962년 2월 20일에 드렸다. 그리고 이 건물은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110주년 존스기념예배당이 2003년 봉헌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시루뫼에서 시작한 작은 공동체는 강화도의 모교회가 되어 200여 교회와 강화도를 신앙의 섬으로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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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 등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로 역사신학 분야를 연구하면서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의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 중이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으로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하였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