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목회자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by Chris Davis2022-11-13

외로움은 나를 질식시켰다. 내 존재 전체를 부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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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사역에 지친 나는 외로움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고통에 온몸이 아릴 정도로 나는 혼자였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내 몸이 그 사실을 알려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내 목회 열정의 전부가 설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달 동안 설교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도무지 제대로 사역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긴급 안식년을 가졌고, 조용히 목회를 그만둘 계획을 세웠다.


고통은 함께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외로움은 나를 질식시켰다. 내 존재 전체를 부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혼자 있는 아담을 보시고는 “좋지 않다”라고 선언하셨고, 벌거벗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완전하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관계를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 우리는 온통 자신을 가리고 산다. 마치 물에 둘러싸이고서도 목마름에 죽는 것처럼, 또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말이다. 


모세는 이렇게 한탄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 11:14). 엘리야는 동굴에서 외쳤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왕상 19:10). 광야에서 함께 짐을 나눠 짊어지는 장로 70명에도 불구하고, 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간구했다.


모세와 엘리야처럼 내 주변에도 든든한 사역의 친구들이 있다. 나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형제들과 함께 월간 목회자 모임에 참석한다. 나를 책임지는 파트너도 있다. 아내 및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풍성하고 달콤하기만 하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외로움을 짊어지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을 짊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한두 번 정도야 친구나 다른 교회 동료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느끼는 상실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언제 그런 주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4년 전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돌아가셨을 때, 나는 상실감을 주는 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슬픔나눔(GriefShare) 그룹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고통을 숨기는 대신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둔 기독교 치료사가 이끄는 지역 주간 그룹에 합류했다.


연결의 리듬


간증과 더불어서 주간 업데이트를 할 때, 인도자는 종종 일시 중지 버튼을 눌러 다른 사람들이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화가 납니다!” 또는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등과 같은 감정적인 소통은 바늘과 실을 연결하듯 서로의 마음을 묶는 역할을 했다. 


진행자가 처음 간증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들었을 때 어땠냐고 물었을 때,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의 연결은 두 배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참가자들이 이어서 어떻게 느꼈는지 공유했을 때, 이야기를 나눈 사람의 말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모두 한 번 더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가 경험한 관계의 깊이는 심오했다.


이 지독한 외로움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인도자는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이와 비슷한 그룹을 시작해보라고 권유했다.


내 기준은 간단했다. 매주 한 시간을 함께 보낼 만큼 연결을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 명의 목사 친구에게 물었고, 그들은 즉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접근 방식에 관해서 약간의 망설임을 드러냈다. 뭐라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자고? 내 이야기를 하라고? 모임을 줌(Zoom)으로 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바로 나가겠다고 미리 말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몇 주 지나지 않고 시간을 매주 90분으로 늘이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우리의 모임은 어느새 없어서는 삶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 중 누구도 이전에 그 어떤 모임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연결과 정서적 안정감을 키울 수 있었다. 


마침내 자유함을 


모임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게 우리의 전문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사인 내가 나 자신의 감정, 욕망, 동기 및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건 어렵다는 사실이다. 지금 기분이 어때? 원하는 게 뭐야? 지금 무슨 이야기를 자신한테 하고 있어? 등의 자주 접하는 질문을 정작 내가 대답하려니까 쉽지 않았다. 강단이 주는 혜택이라고나 할까, 언어에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점이 목회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까지 나를 제대로 알리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임에서 종종 자기도 모르게 설교하려는 상대방을 설교 모드로부터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래야 비로소 다시금 제대로 목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게 나를 제대로 알리는 목표 말이다. 


동료 목사들과 시작한 모임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그와 비슷한 공간을 만들 기회를 열어주셨다. 나는 가정생활을 버거워하는 아빠 그룹, 그리고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과부 그룹을 매주 만났다. 각각의 경우, 모두는 다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 지금 우리는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했다고. 공유할 간증거리가 항상 있었지만, 내가 던진 질문은 각자가 감정의 폭발, 신분이 도용된 악몽, 그리고 성인 아들의 죽음에서 느낀 감정이 무엇인가 말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가장 의심스러운 의미에서 쓰이기도 하는 용어, ‘치료’(therapeutic)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이 가져다준 가장 놀라운 결과는 그것이 어떻게 성화를 이뤄가는 새로운 통로를 열었는가라는 점에 있다. 감정과 욕망 그리고 이야기(narratives)에 대한 공동 탐구가 복음 전달 체계가 되어, 이전까지만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에서 더 깊은 치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날 수 있도록, 상처받은 부분이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나는 참가자의 심령이 더 온전하게 치유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나는 목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외로움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감춰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사역 속에서 나는 이제 부분적인 것이 완전한 것에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온전히 알게 될”(고전 13:12) 그날을 꿈꾼다.



원제: Where Can the Lonely Pastor Go?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게 우리의 전문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사인 내가 나 자신의 감정, 욕망, 동기 및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건 어렵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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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Chris Davis

크리스 데이비스는 Groveton Baptist Church(Alexandria, Virginia)의 담임 목사이며, Bright Hope for Tomorrow: How Anticipating Jesus’ Return Gives Strength for Today(Zondervan, 2022)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