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소설은 그만 쓰자!
by 김형익2022-11-15

시간이 갈수록 오해는 쌓이고 그 속에서 소외와 불화와 단절은 깊어진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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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시네.” 사실과 다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소설의 허구성을 빗댄 말일 것이다. 한 번은 한 정치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와서 소설가협회가 성명을 낸 적도 있다. 사실, 소설은 허구(픽션)이지만 인간 내면의 또는 인간 사회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최근에 류현재의 장편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을 읽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죄가 가져온 비참함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고통의 경험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도 경험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피하면서 조금 소개하자면, 한 가정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다음은 각 장의 제목들이다: 김은희, 김현창, 김인경, 김현기, 김영춘과 이정숙. 이렇게 모두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1장부터 4장까지 각 장의 제목은 김영춘과 이정숙의 자녀 이름이다. 노부부가 자녀 모두를 결혼시키고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엄마의 뇌경색은 네 자녀 중 누군가 엄마를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고 이 와중에 형제들 각자의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혀 빚어지게 된 결말은 슬프디 슬프다.


소설의 각 장과 그 제목은 바로 그 사람의 시점(視點)에서 동일한 상황과 가족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한 내용이다. 읽다 보면, 어떻게 동일한 상황과 가족들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상황은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여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오해 덩어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삶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우리 한국인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독특한 단어인가? 어떤 이들에게는 다정한 엄마의 품이나 아빠의 넓은 가슴 혹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에게 그리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고,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결론을 필요로 하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한다. 작가가 사용한 제목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개념의 부정적이면서 묘한 느낌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모른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한국의 노령화 현상과 함께, 부모를 직접 돌봐 드려야 한다고 느끼는 다분히 동양적 (혹은 한국적) 사고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자녀들의 사랑과 부담과 고민은 우리 모두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의 사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그 조금의 사실에 옷을 입히기 시작하고 칠을 하기 시작하면서, 각자가 내리는 결론은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그 결론에는 일말의 사실이나 진실도 있을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어느 정도 그런 결론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해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은 우리를 결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오해하고 상황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다가 죽는다. 자기 시점으로만 파악한 거짓과 허구, 그리고 오해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타락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죄와 비참의 현실을 보고 경험한다. 가족을 만드신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깨어져 버렸고, 가족은 가장 안전한 사랑의 연합이라기보다는 끊을 수 없는 족쇄로 여겨지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 각자는 다 자기만의 시점에서 서로와 상황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바라보니, 사실은 사라지고 진실은 찾을 수 없게 된다. 부부 사이에서,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형제들 사이에서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오해는 쌓이고 그 속에서 소외와 불화와 단절은 깊어진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인가? 


복음은 우리의 시점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점에서 하나님의 시점으로 보는 시각을 열어준다. 평면에서 움직이고 평면도만 보다가, 갑자기 공간의 시점, 하늘로부터 내려다보는 조감도(bird’s eye view)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그림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면도를 보고 내가 내렸던 결론이 틀렸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상대화하게 한다. 더 이상 내가 우주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주권과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신다. 언제나 나의 시점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라고 인정하게 한다. 결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이렇게 복음은 죄와 비참이 빚어내는 인간 사회의 비극을 고치기 시작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받았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하고 기분이 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시점에서만 고린도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조감도는 제3의 존재를 보게 한다. 제3의 존재는 사탄이고, 사탄이 조종하는 거짓 교사들의 존재들이 보인다. 얼마든지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이 오해로 말미암아 끝장이 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 고리를 끊어낸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바울을 향한 고린도 사람들의 오해와 근거 없는 비난이 바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은 복음 때문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복음은 사람들의 오해와 시선, 비난과 판단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시점의 판단이 빚어내는 오해와 확신 그리고 소외, 불화와 단절의 고리를 끊어내게 하는 힘이 된다. 복음은, 바울의 고백대로, 자신의 판단과 확신을 지나치게 믿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으로 맡길 수 있기에, 우리는 오해와 근거 없는 주관적 확신을 품고 죽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주님은 교회를 가족에 비유하셨고(막 3:35), 신약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권속)이라고 부르고 가족에 비유한다(엡 2:19; 딤전 5:1-2). 비록 이 세상에서 육신의 가족만큼 질기다고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혈연 가족 안에서 경험될 만한 오해들이 교회 안에서도 빚어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지긋지긋해도 끊어낼 수 없는 질긴 족쇄처럼 여기지는 않기에 스스로 족쇄를 끊어내는 슬픈 결정들을 하기도 한다. 죄로 망가지기 전의 가족이라면, 소외, 오해, 불화와 단절 같은 일들 대신, 결속과 사랑, 돌봄과 섬김 만을 즐거이 누릴 수 있었겠지만, 죄성은 주의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잔존하는 세력으로 남아 우리를 지배하려 들며 교회에서 그 영향력을 키우려 들곤 한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고 영적 가족인 교회에 상흔들이 남는 이유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이 소설이 들려준 슬픈 이야기가 우리의 가족, 교회에서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저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아닌가! 조금의 사실, 약간의 진실에 자신이 만들어내고 채색한 허구 덩어리로서의 소설 말이다. 복음이 이 못된 습성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가진 평면도가 완전한 것이라고 우기면서, 복음 안에서 주어진 조감도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늘 이 싸움 속에 던져진다. 때로는 질긴 족쇄, 지긋지긋한 족속으로 여겨질지라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어, 교회처럼 질긴 사랑의 연대, 기쁜 족속은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날, 단지 몇 사람만의 고백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는 날을 바라본다. 이제 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소설은 그만 쓰자! 

복음은 사람들의 오해와 시선, 비난과 판단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시점의 판단이 빚어내는 오해와 확신 그리고 소외, 불화와 단절의 고리를 끊어내게 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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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