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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민족 지도자의 산실로 서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새문안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2-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한반도에 복음이 전해 들어온 루트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다름 아닌 새문안교회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는지.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출발이 언더우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새문안교회의 출발은 그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언더우드가 이 땅에 선교사로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만주에서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었던 로스(John Ross)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한글 성경을 최초로 번역할 때이다. 


로스는 조선인들(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을 통해서 1876년부터 우리 말과 글을 익히면서 그들을 전도했고, 동시에 성경 번역을 시도했다. 또한 로스의 매부인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가 1879년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최초로 세례교인이 탄생했다. 1881년까지 로스는 우리말 신약 성경 전체의 초벌 번역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서 번역을 다시 살펴보면서 수정했고, 1882년 봄에 출간했다.


그러나 번역한 성경을 출판하기까지는 난관이 많았다. 그것은 한글 활판이 없었고, 인쇄 기술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로스는 그러한 준비까지 해야만 했고,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번역을 시작해서 비록 완역은 아니더라도 쪽복음서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말 성경의 효시가 되었고, 초기 전도 문서로서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서가 출판되자 로스는 그것을 초기 번역에 동참했던 조선인들에게 들려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하도록 했는데, 그것이 국내 복음 전파의 효시가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국내에 입국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이전의 일로써 새문안교회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그 공동체는 언더우드의 입국 이전에 서상륜에 의해서 장안에 복음이 전달되었고, 그 가운데 개종한 사람들이 있음으로 이미 형성되었던 공동체였다. 서상륜은 정동에 머물고 있던 언더우드를 찾아가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당시 공식적인 기독교의 집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공동체를 세워감으로써 오늘의 새문안교회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이전에 내국인에 의해서 형성된 공동체였고, 언더우드가 입국하여 지도자가 됨으로써 1887년 9월 27일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 곧 당회를 구성한 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의 한국 선교인데, 새문안교회는 장로를 세우고 교회로서 기능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때 서상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 번역의 주역이었던 로스 선교사도 참석하였다. 그 이후 언더우드는 조선에 이미 공동체가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순회 전도를 나서서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을 찾아가 그곳에 형성된 공동체에서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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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의료선교사로 온 엘러스(Bunker Annie Ellers)와 함께 여학당을 시작했다. 이것이 후에 정신여학교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과 일시적인 단절도 있었지만 정동 안에서 감리교 선교부가 설립한 학교들과 함께 장로교 선교부의 학원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정동에서 시작된 언더우드의 사역은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을 붙이게 되는 다양한 일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의 사역 중심에는 언제나 새문안교회가 있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지만, 서울에 입경한 것은 언더우드 혼자였다. 아펜젤러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이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외국인이, 그것도 여자가 서울에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아펜젤러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미국 대리공사인 포크(George C. Foulk)가 아펜젤러 부부의 서울 입경을 만류한 결과이다. 따라서 아펜젤러 부부는 4월 13일 일본의 나가사키로 돌아갔으며, 언더우드 혼자서 서울에 입경하여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그가 선교사의 신분으로 정동에서 행한 대부분의 것은 최초가 되었다. 


예를 들어서 공식적으로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보다 6개월 남짓 먼저 와서 활동하고 있었던 알렌 선교사, 그리고 언더우드보다 한 달후에 입국한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 가족 등과 함께 1885년 7월 5일에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비록 조선인은 참여할 수 없는 예배이지만 조선의 중심지 정동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렇게 정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당장 우리말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사역은 알렌을 도와서 제중원 의학반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리에 일정한 거처도 없이 돌아다니는 고아들이었다. 자신의 어학 선생의 소개로 특별히 한 사람을 고용해서 장안의 고아나 걸인의 형편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 사람이 한 명의 고아를 데리고 온 것을 계기로 1886년 5월 11일 고아원 개원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회의 아펜젤러도 참여했던 이 개원식에 이어서 고아원은 이내 여러 명의 고아가 모여들었다. 이 고아원은 단지 고아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아닌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학교로 발전했다. 그것이 경신학교이며 사실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정동에 자리한 언더우드의 집과 사랑채, 그리고 새로 마련한 건물들을 통해서 고아원과 학교를 동시에 시작함으로 우리나라 근대교육과 보육시설을 출발시켰다.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로서 큰 보람이었을 것이다.


언더우드가 살고 있던 바로 옆집을 예배당으로 하여 예배 모임을 인도하면서 우리말을 익히던 언더우드는 우리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한영자전’을 편집함으로써 우리말 발전과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게 했다. 또한 우리말 성경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성경 번역을 주도하는 중심에 섰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집은 사실상 한국 선교본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성경 번역 위원들 모임도 그의 집에서 시작했고, 선교사 공의회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도 그 중심에 언더우드와 새문안교회가 있었다.


국내에서 실시된 최초의 유아 세례도 새문안교회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888년 4월 25일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에게 세례를 행함으로써 최초의 유아 세례자가 되었다. 물론 새문안교회가 설립되기 전인 1886년 7월 18일 주일에는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이 언더우드에 의해서 탄생했다. 1884년 봄 어느 날 알렌 선교사의 집에서 우연히 접한 한문 성경(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발견한 노춘경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밤새워 읽고 개종을 결심한 후 이튿날 아침 언더우드를 찾아왔을 때, 그에게 기독교 교리서를 주어 읽게 했다. 5, 6개월이 지난 후 자원하여 세례를 요청했고, 언더우드는 그에게 세례를 시행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되면서 언더우드는 당장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어렵지만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새문안교회를 생각하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교회가 배출한 걸출한 민족의 지도자들이다. 그 첫 번째는 도산(島山)이다. 안창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낯이 설다. 하지만 도산을 개종시켜 민족의 지도자로 서도록 하는 데는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은 송순명 장로의 공이 컸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장안에 떠돌아다니던 고아였다. 그러한 그가 12살 되던 해인 1887년 언더우드가 개설한 고아원(학교)에서 자라나 이 교회의 장로가 되기에 이른다. 사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가 된다. 이 때 장립한 장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지금까지 알 수 없고, 또한 당시 장립한 장로는 실제로 새문안교회에서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첫 번째 장립된 장로 두 사람이 있었고, 송순명 장로는 두 번째로 장립된 세 번째 장로인 셈이다. 그는 신실하고 성경에 관한 지식이 출중해서 한국교회 초기 권서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복음전도의 공헌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그가 도산을 개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도산은 1895년 청일전쟁이 평양에서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서 서울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마침 당시 민노아 학당을 맡고 있던 밀러(F. S. Miller) 선교사가 “누구든지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찾아들었는데, 그곳에서 송순명 장로는 안창호를 만났고, 송 장로는 안창호를 끈질기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했다. 그 후 안창호는 송장로와 함께 영신학교 접장(교사)이 되어 민족의 미래를 위한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다. 시기에 따라 원두우 학당, 민노아 학당, 예수교 학당(통칭 구세학당) 등으로 불린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나중에 새문안교회가 운영하는 영신학교가 된다. 이 학교는 새문안교회가 1895년에 설립한 학교로 학교운영비의 50%는 새문안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충당했는데, 언더우드의 예수교 학당(1897년 폐교)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학생들까지 받아들이기도 했다.


새문안교회 역사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또 있다. 그것은 우사(尤史)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아 언더우드의 비서 역을 감당하다가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이념 갈등이 깊어졌을 때 민족주의 노선에 서서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 김규식 장로는 여섯 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서 성장해서 장로까지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새문안교회 사람이다. 


그는 1881년생으로 그가 여섯 살 때인 1887년에 고아원에 입양되면서 새문안교회에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1910년 12월 18일 만 29세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고아로 언더우드의 손에 이끌려 새문안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김규식은 총명했다. 언더우드는 그를 1897년 미국 버지니아의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서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03년 졸업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 돌아왔다.


당대에 흔하지 않은 유학파 재원이기에 그에게는 많은 역할을 요청하는 유혹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언더우드의 비서 역을 자처하면서 새문안교회를 섬기면서 경신학교 교감, YMCA 학생부 간사, 배재전문학교 영어 강사 등을 하면서 교육과 계몽운동에 힘을 썼다. 주어진 일에 충실한 그의 모습은 새문안교회에 장로로 세움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한일병탄이 있었던 1910년 말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장로가 된 후 당회 서기로 섬기면서 새문안교회를 이끌었다. 하지만 1913년 망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상해로 떠남으로써 더 이상 새문안교회 장로가 아닌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겼다.


새문안교회는 또 한 사람의 민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는 한국 교회사에서 최초로 유아 세례를 받은 송암(松巖) 서병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소래교회를 설립하는 데 주역이었던 서경조의 아들로 언더우드에게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7년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소래교회에서 성장하여 여덟 살이 되던 1893년 새문안교회가 직영하고 있던 영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상경했다. 1905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해서제일학교, 평양 대성학교 등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그러던 중 언더우드의 요청으로 1909년 모교인 경신학교의 교사와 학감으로 봉사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새문안교회의 일꾼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알아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중국 상해에서 서병호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선우혁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한 후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몰래 파송하였다.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핵심적인 활동을 했다.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1947년 귀국하여 다시 새문안교회 장로로 봉직하면서 YMCA 전시비상대책위원장, 경신학교 이사장, 경신중학교 교장직 등을 수행하면서 독립한, 그러나 폐허가 된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교육과 계몽의 현장에서 수고를 이어가다가 1972년 별세했다.


이렇게 새문안교회는 민족의 지도자를 배출하여 독립과 계몽, 국가의 재건을 위한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외에도 사회, 학계, 문화계 등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여 대한민국의 복음화와 문화와 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 잊어서는 안 될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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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새문안교회 예배당은 2019년 새롭게 지어서 입당했다. 현재의 새문안교회라는 이름이 사용되기까지 정동예배당, 정동교회, 신문내제일예배당, 서대문교회 등으로 불리던 것을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새문안교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문안교회역사관에서 촬영한 이종전 교수와 장명근 장로의 영상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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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