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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를 위로하는 세 가지 방식
by Owen Strachan2019-02-26

심판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회의하는 현대 문명이 기독교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럼,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신뢰하지 못할 것 같다. 성경은 죄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거룩한 심판 앞에 직면했을 뿐 아니라, 그 심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친다.


바로 여기,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성경이 제시하는 세 가지 관점이 신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이다.


1.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의 성품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만든다


심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몫이다. 왜냐하면 복수는 주님에게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롬 12:19). 우리는 약하고 타락했으며 또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분은 무한하시다. 무력하지 않고 모든 일에 능하시다. 또한 그분의 거룩한 본성으로부터 공의가 흘러넘친다. 우리는 바로 이 진리를 의지함으로 큰 위안을 받는다. 심판을 담당하고 세상을 공의롭게 만드는 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다. 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고 마음을 가볍게 하는 진리인가.


2.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기준이 지켜진다는 의미이다

 

공의는 찾기 힘들다.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고난과 죽음이다. 저주받은 세상이기에, 그냥 육신의 눈으로 둘러보면 이 세상은 전 우주적으로 우연 덩어리이자 인간이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거대한 로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실재는 공의로우신 아버지, 용서하시는 구세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의 공의가 도래하고 있으며,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고, 거의 다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신학을 거부하는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신성한 복수를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다. ‘신성한 복수’(divine vengeance)라는 교리는 그저 부드럽고 심신의 치유만 추구하며 이제는 최고의 인생을 살자고 외치는 변형된 기독교에는 도통 적합하지 않다. 그런 기독교 안에서는 ‘축복’은 넘칠지라도 공의는 찾기 힘들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저 지위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달콤한 컨설턴트로 전락했다. 평등과 은혜, 더 나은 사회 조건, 급진적인 행위는 약속하지만, 악을 복수하는 왕은 사라졌다. 거짓된 기독교 정신에서 ‘신성한 복수‘라는 교리는 거의 찾기 힘들다.


이처럼 오늘날 그리스도는 저항 운동에 은사를 가진 리더 정도로 내려앉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그 정도의 변질된 생각을 갖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신성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한 애정의 표시도 아니고, 일종의 행동 개선 프로그램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유지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롬 5:12-21).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미래에 있을 심판을 취소시키지 않는다. 속죄는 오히려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장하는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할 완벽한 대안이 없는 인간에게 장차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결코 악에 관해 너그럽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바는 언젠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잠시 지연되었던 심판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3.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멸망시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악의 종말을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낙태 산업과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해 외쳐야 한다. 또한 살인과 잔혹한 학대, 대량 학살과 성적 잔인함 등 셀 수 없이 많은 악의 궁극적 종말을 간절히 염원해야 할 뿐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그에 반대해야 한다.


이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신부를 그 보혈로 씻으셨다(엡 5:25; 벧전 1:19). 또한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자기 백성을 위한 승리를 쟁취하셨다. 죽음이 통치하던 세상의 끝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이미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승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강한 자(사탄)는 묶였고, 그의 집도 약탈을 당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불못에 던져지지 않았다(마 12:29; 막 3:27). 그러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바로 그날에, 사탄은 그의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땅에서 사악함을 몰아내는 분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죄는 선(goodness)을 지향하는 우주의 모호한 궤도 속에서 자연적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죄의 종말은 예수님이 하늘을 찢고 온 땅을 타작마당으로 만들 때가 되어야 찾아온다(계 20:11-21). 교회는 이 진리를 깨달아 불붙는 소망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 진리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심판이라는 이 불편한 기독교의 교리가 때로는 가장 깊이 잠든 영혼을 깨울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단 한 명의 죄인도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흥 시대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 소돔에서 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며, 또 간곡히 호소해야 한다.


생각할 점들


기독교는 앞을 내다보는 신앙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이 상기시키는 천상의 도시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역사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이 신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영원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실 공의의 약속은 영광스럽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여기서 더 나아가 공의의 심판이 곧 영화로움의 완성이다(계 21:21-27). 그날에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죄를 속죄하고, 악을 멸망시키며, 뱀의 머리를 부숨으로써 오랜 예언을 성취하신 어린 양을 경배할 것이다.


회의적인 문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뿐 아니라, 죄를 완전하게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집으로 부르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그분은 자비로우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Ways God’s Justice Comforts Us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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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Owen Strachan

오웬 스트라챈은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 교수이며, 더글라스 스위니 교수와 함께 '스위니 교수의 에드워즈 핵심 강의 시리즈'를 다수를 공저했으며, 또한 'A Theology of Mankind'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