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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잃어버린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
by Thomas R. Schreiner2019-08-07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을 읽을 때, 특히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종종 말씀 전체의 맥락을 놓치곤 한다. 15장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분을 공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1-2절). 여기에서 죄인들과 나누는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복음의 은혜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 식탁 교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 즉 죄에서 돌이켜 믿음으로 나아온 자는 누구든지 메시아와의 영원한 만찬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 가지의 비유를 통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이유를 밝히셨는데 이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3-7절),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8-10)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11-32절)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과시하는 자기의 의와 그들의 사랑 없음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보다는 각각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특히 마지막 비유 속의 큰아들을 통해 자기 의에 빠진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이끄셨다.


먼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살펴보자(3-7절).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는 이를 찾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양을 찾게 되면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말한다(6절).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은 곧 회개한 죄인 한 명의 구원으로 인한 기쁨을 상징한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기쁨은 고사하고 분노를 드러낸다. 이는 결코 회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다음은, 동전의 비유 속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8-10절). 열 개의 은화 중 한 닢을 잃은 여인은 사라진 은화를 찾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 닢을 찾았을 때, 그녀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즐거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회개할 때 천국의 천사들은 모여 기뻐한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 준다. 그분은 죄인을 찾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죄에게 돌이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에스겔 18장 23절을 생각해 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또한 로마서 10장 21절에서도 하나님은 반역한 자들에게 종일 손을 벌려 그들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신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떠한가? 그들의 모습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대신, 그들은 오히려 회개하는 죄인들을 보며 불평하고 화를 낸다.


마지막은 세 가지의 비유 중 가장 유명한 두 아들의 비유이다(11-32절). 탕자인 작은 아들은 모든 죄인을 상징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재산을 미리 내놓으라고 요구한 후, 그 재물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난다. 이와 같은 떠남은 죄인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짐을 뜻한다. 탕자인 작은 아들은 이리저리 방황하며 사악한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추구했지만, 곧 가뭄이 그의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서 가뭄은 죄가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 즉 이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쾌락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고 결국 돼지를 먹이는 일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음식이 너무나 귀한 나머지, 그는 돼지가 먹는 여물까지 기꺼이 먹는다. 그 당시, 돼지는 불결한 동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돼지 사이에서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그들의 먹이까지 취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추락을 보여 준다. 또한 지저분한 돼지 사이에서 일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자들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모세의 명령이 담긴 토라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 그리고 정결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바리새인의 눈에 불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자신이 하인으로 일할지언정 밥은 굶지 않을 수 있음을 기억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탕자의 회개는 거짓도, 피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죄 지었음을 인정했고, 또한 자신은 이미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모두 탕진했으므로 다시 그분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음을 고백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서 하인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참회의 마음으로 나아간 이 아들은 분명 엄한 질책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벌하지도, 꾸중하지도 않았다. 대신 기쁨으로 달려가서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뛰어가는 것은 부모의 처신에 맞는 행동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체면에 연연하지 않았다. 왜나하면 그의 마음은 이미 잃어버렸던 아들을 향한 자비와 자식을 되찾은 즐거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읊조리기 시작했으나, 아버지는 그가 깊이 회개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고백을 멈추도록 했다. 또한 아들을 하인으로 삼는 대신 그에게 최고의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며, 좋은 신을 신겼다. 게다가 그는 가장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까지 벌이며 이렇게 선포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비유 속에서,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을 상징하고 탕자는 죄인을 의미한다. 공생애 내내, 예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긍휼한 성품을 드러내셨다. 물론 이 비유가 복음의 모든 부분을 다 설명할 정도로 포괄적이지는 않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이 비유를 근거로 십자가의 죽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의 비유가 구원론에 관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주장은 해석학적으로 볼 때 오류가 많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결론을 맺는, 즉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누가복음 전체의 이야기 중 일부이다. 죄인은 오로지 예수님이 치르신 속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 


한편 밖에서 일하던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여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하인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그제야 동생의 귀환과 이를 기뻐하는 아버지가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때 큰 아들의 반응은 기쁨이 아닌 분노였다. 아버지가 “방탕한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고 속이 상했기 때문이다. 비록 아버지는 큰 아들도 사랑하였으나, 그는 완고한 마음으로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큰 아들에게 잔치에 함께하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상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자기 의에 취해 있었으며, 또한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아버지의 뜻을 어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잔치를 받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율법을 준수하는 도덕적 소수라고 확신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바로 이 큰 아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은혜의 선물이 아닌 스스로의 경건과 순종으로 얻어낸 성취라고 생각했다(눅 18:9-14 참조). 하지만 지금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자들은 그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하고 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독을 뿜어내며 폭발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 그는 돌아온 작은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동생은 단지 “이 아들”일 뿐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은 존재였고 또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창녀들과 어울린 집안의 수치에 불과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죄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했으며 다른 기회를 줄 필요조차 없는 존재로 여겼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회개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용서와 자비의 마음 역시 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잔치는 사악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과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그러한 큰 아들도 사랑했다. 그리하여 모든 부와 재산이 다 그의 것임을 다시금 알려 주며, 작은 아들은 다름 아닌 그의 동생임을 상기시켰다(“네 동생은”, 32절). 만약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동생의 돌아옴이 축하할 일임을 알아야 했다. 그 동생은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찾은 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잃어버렸던 영혼을 다시 찾은 것이다. 죄인들이 잔치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목자가 그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그 잔치에 초대했다. 과연 그는 자기 의에 빠진 오만함과 사랑 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인식하고 동생을 위한 잔치에 참석할까? 아니면 여전히 아버지의 초대를 거부하는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할까? 이 비유는 큰 아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 아버지처럼 예수님은 바로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라고 초대하신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Jesus’ Mission to the Lost: Luke 15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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