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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아름다운 눈물
by Makoto Fujimura2019-09-28

요한복음 11장의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이를 슬퍼하는 마리아와 막달라로 인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 예수님의 눈물은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의 구체화된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요 11:4)고 예수님은 베다니에 가기를 연기하셨고, 도착해서는 마르다에게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25절)이라고 알려주셨다. 만일 그분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베다니에 왔다면, 그가 정말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는 메시아가 사실이라면, 죽음과 나사로의 질병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으셨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그랬으면 모두가 바로 기뻐했을 거고 모든 눈물은 필요없었을텐데 말이다.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굳이 눈물은 헛되고 필요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능력을 사용하시는 대신, 스스로 취약해지는 것을 택하시고, 죽음의 아픔을 느끼셨다. 소망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몸소 행하셨다.      


눈물을 흘리신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선언하셨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비틀거리며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한 자신의 행로를 계속 가시게 되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관점을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눈물은 굳어진 베다니의 땅을 흠뻑 적시면서 마리아의 눈물과 함께 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구세주일뿐만 아니라 친밀한 친구도 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사람의 아들과의 깊은 우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요한은 이 부분을 주목했다. 

고대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과 함께 연결시키는 개념이었다. 벚꽃은 꽃잎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그 감격은 일본인들에게 도덕성을 생각하게 한다. 하카나이 비(순간적 아름다움)는 슬픔을 의미하지만, 생명에 대한 연민에서, 일본인들은 심오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야스나리 카와바타(Yasunari Kawabata)는 전후 작가인 류노스케 아쿠타가(Ryunosuke Akutagawa)가 자살 전에 쓴 유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하지만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의 맨 마지막 상황이 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Japan, the Beautiful, and Myself)라고 말했다. 


카와바타도 몇 년 뒤에 자살을 했다.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을 감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연결된, 매우 비극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눈물도 순간적이며 아름다웠다. 그분의 눈물은 우리에게 우시는 구세주로 계속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절망이 아니라 부활의 위대한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살이 아닌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마리아는 나중에 자기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가지고 예수님께 달려감으로 그분의 눈물에 보답했다. 그녀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자신의 결혼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일 년 임금에 해당하는 지극히 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를 깨뜨렸다. 그녀는 예수님의 눈물에서 직감적으로 그분이 기적을 행할 때마다 자신의 희생적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직접적이고 직감적이지만 의도적이며 헌신적인 행위로 응답해야 했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녀의 행위를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의 희생의 행위, 즉 베다니의 방 안에서 퍼진 나드 향으로 이어졌다. 거기에서 한 여인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향기, 즉 복음의 실재가 단절된 세계 속으로 불어 넣어져, 고통으로 깨진 곳을 채워넣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능하게 했다.

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나드와 같이, 예술은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일 수 있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그들의 삶을 장식하는 여가와 같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까? 큰 무대에 서야 하는 무용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부수적이고 낭비가 심하다고 여기는 삶이 어쩌면 우리 인간성을 정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날 저녁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엎지른 나드향 속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있었고, 공기 중에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칸타타가 흘렀다. 감사하게도 큐레이터이며 화가인 제임스 일레인의 이러한 표현과 관찰은 실로 대단하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드리는 보답이다. 우리는 이러한 직감을 왜곡시켜서 죄악되고 해로운 것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러한 창조적 충동은 창조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에 화를 내고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도 있었겠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책망했다(막 14:5). 실용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탐욕은 순간적 아름다움의 힘을 이해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천천히 영혼을 옥죄이는 경직된 결정론이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고통에 대해 실용적 대답을 하려 함으로 상처를 입힌다. 그것은 나드를 주님의 발에 흘리지 못하도록 금함으로 생명력을 빼앗아가 버린다. 마리아처럼, 예술가들은 직감적으로 생산해 내고, 억압된 것을 깨뜨려 열 수 있다. 교회 안팎에서,실용주의와 율법주의는 순간적이지만 성스럽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우리가 알고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예술가들은 창조를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리아와 예수님처럼, 예술가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율법주의자의 책망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누어 주는 행위는 우리에게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단지 기쁨으로 보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넘친다거나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베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예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다. 예술은 마리아의 나드처럼 ‘깨끗하다’라고 여겨지는 곳에 스며든다. 그러한 예술은 진정으로 마리아의 헌신처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동시에 유다의 책망처럼 진정으로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카와바타처럼, 예술가들은 또한 절망하기 쉽다. 율법주의와 절망은 둘 다 악마가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살은 이 두 행로의 종착점이다.


나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네랄 재료를 섞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은혜를 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미네랄 물감은 엄청나게 비싸다. 금, 플래티넘, 은, 희귀한 종이와 실크, 그리고 백년이나 된 수미 잉크 등 모두 내 작품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나는 스스로 마리아와 같이 되기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을 떠올려 본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아마도 그분이 마리아 안에서 본 것은 작은 예술가였을 것이다. 그분의 위대한 희생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작은 예술가의 모습 말이다.


마리아는 감사로 전율하며, 왕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사랑의 헌신으로 문화적 규범을 깨뜨렸다. 이 행동으로 그녀는 신비의 순간을 열었다. 그녀의 나드는 흘러넘쳤고, 그 향기는 그 방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그녀가 미처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매우 순간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도 자신의 순간적인 행동이 영원한 유산으로 남아 기억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놀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마리아가 한 이 행동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우리는 이 확실한 선언의 결과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의 나드 향기를 담은 그 복음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는가? 마침내 도래할 우주적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가 아름답고 넘치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Beautiful Tears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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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koto Fujimura

마코토 후지무라는 예술가이며 작가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s Brehm Center for Worship의 디렉터이며, The International Arts Movement의 설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