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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사랑의 섭리
by R. C. Sproul2021-01-06

신학에서 쓰는 “일반은혜”(common grace)라는 구절이 바로 딱 그런 옥시모론에 해당한다...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수준의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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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리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사용되지 않았던 한 단어의 발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들어서 일반적인 어휘에 들어간 그 단어는 바로 옥시모론(oxymoron: 형용모순이라는 뜻)이다. 옥시모론의 전형적인 예는“점보 새우”라고 할 수 있겠다. 특정 사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자기모순이거나, 아니면 대조적인(antithetical) 관계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학에서 쓰는 “일반은혜”(common grace)라는 구절이 바로 딱 그런 옥시모론에 해당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수준의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편재하지만(commonplace), 그것은 오히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피조물은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참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관대함을 드러내는 일반적이지 않은(uncommon)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혜택을 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는 존재다.


자 그럼, 이 점을 유념하면서 일반적이라는 이 용어를 왜 굳이 은혜와 관련해서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은혜는 일반적이지 않은 은혜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위 말하는 “특별은혜”와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반은혜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가지 현상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은 단지 믿는 자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당신의 신성한 섭리로 부어주신다. 그런 혜택과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과 관련이 있다. 2004년 5월호 ‘테이블토크’(Tabletalk)에서 내가 설명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 중 두 가지 특성이 바로 이 일반은혜와 관련이 있다. 


첫 번째 특성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자비함이다. 자비라는 용어는 단순히 말해서 “선의”(good will)를 의미한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가 비록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모든 피조물에 대해 일반적으로 친절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로 정의된다. 물론 이것이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자들, 또한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에게 드려야 할 예배와 감사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노여움을 무효화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자비함이라는 특성은 모든 피조물을 향한 그분의 선의를 반영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보여주시는 이 친절함이라는 성향은 하나님의 성품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유형의 사랑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이 가진 선행이라는 측면이다. 자비함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는 반면, 선행은 창조된 전체 영역을 향한 그분의 행동과 관련된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자비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사랑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비가 내린다고 말했다. 나란히 살고 있는 두 농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매일 이 두 농부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한다. 당연히 이 두 농부는 수확을 위해서 충분한 양의 비와 햇빛을 필요로 한다. 만약에 이 두 농부가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갈린다고 할 때, 그러니까 한 명은 거듭난 신자고 또 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비신자라고 할 때, 하나님이 신자의 밭에는 햇빛을 비추고 또 비를 내리지만 비신자의 밭에는 햇빛과 비를 거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앙과 관계없이 두 농부는 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혜택을 동등하게 누린다. 햇빛과 비는 그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선물일 뿐 하나님은 신자와 비신자에게 그것을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선물을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쏟아부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선행에 관해 말할 때, 그분이 베푸는 선행은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온 세상이 어느 정도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에게 주시는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있는 의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으로 치료하는 믿지 않는 의사에게 갈 수도 있다. 반드시 신앙이 있어야만 재능이 있는 의사, 재능이 있는 음악가 또는 재능이 있는 회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재능과 달란트라는 축복을 주셨고, 이 모든 선물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선물은 단순히 신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법도 모든 인류에게 다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주어졌다. 하나님은 처음에 낙원 입구를 지키는 천사를 두고 정부를 세웠다. 정부의 역할에는 악을 억제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악이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한계를 정했고, 그 구속력 덕분에 온 세상은 유익을 얻는다. 비록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사악한 개인과 부패한 정부에 의해서 엄청난 잔학 행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만약에 일반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악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심각한 타락과 퇴폐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악한 사람들과 나라들 가운데서도 악이 제한 없이 마구 뻗어나가지는 않도록 억제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반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일이 사회 전체에 유익을 주는 경우도 하나의 일반은혜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낙태와 인권 침해와 같은 일반적인 악에 맞서서 그리스도인도 무신론자 및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복지를 위한 문제다. 일반은혜와 관련한 문제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경기장에서 일하도록 요구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은혜는 거듭남이 포함된 특별은혜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심에 따라서 오직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다. 오직 선택받은 사람만이 그 은혜를 받는다. 바로 여기서 선택받은 사람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갈린다. 


우리는 일반은혜를 무차별적인 구원의 은혜, 또는 인류 전체를 향해 하나님이 미리 특정해서 구분하지 않고 임의로 주는 구원의 은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반은혜에 대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협력해서 이룬다는 주장-역주) 또는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주장-역주)로 한 발짝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일반은혜에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그분의 신성하고 주권적인 선택적 은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원제: A Loving Provision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무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재능과 달란트라는 축복을 주셨고, 이 모든 선물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선물은 단순히 신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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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 C. Sproul

R. C. 스프로울 박사는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했으며, 플로리다 주 샌포드 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창립목사로, Ro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총장으로 봉직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거룩성’(The Holiness of God)을 비롯하여 백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