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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교만과 싸워야 한다
by Scott Hubbard2021-07-10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망각하거나 왜곡할 때 교만이 자기 안에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골고다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만 자기 속에 있는 교만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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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미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인생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다.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이렇게 쉽사리 단정하는 전도자의 판단이 혹 의심스럽다면, 특별히 한 가지 죄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그러면 솔로몬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죄란 바로 ‘교만’이다.


우리 모두는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서 스스로를 과시하며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 노골적으로든 교묘하게든 그러한 자세를 드러내며 살고자 한다. 마치 우리의 체력은 끄떡없고, 지식도 부족하지 않으며, 숨도 전혀 차오르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뽐내며 활보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호흡을 주신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이다. 그러니 ‘미친 마음’이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사악하고 비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라 정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겔 36:25-27).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미친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비록 용서받을 때 교만한 자아가 꺾여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되긴 했지만,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려 준비하고 있다. 한 마디로, 미친 마음을 지닌 몸을 일으켜 기상하고 노동하고 이야기하고 활동하고 잠을 자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최근 나는 사도 바울의 도움으로 내 자신의 교만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그가 교만으로 표현되는 미친 마음과 겸손으로 드러나는 행복하고 온전한 정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반복해서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1.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바울은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에는 헤롯이나 빌라도만이 아니라, 바울이 “지혜 있는 자”나 “선비” 또는 “이 세대의 변론가”라고 부른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전 1:20). 간단히 말해, 교만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메시지를 듣게 되면, 그분을 곧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한다.


만일 교만이 무엇인지를 더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교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헤아려 보면 된다. 일단 우리 안에서 교만이 자라나면, 서슴없이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꼭 손으로 죽이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살해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마 5:21-22). 이처럼 자기 안에 교만을 키우며 즐거워하는 사람은 가인을 따라 들로 나가며(창 4:8), 이세벨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뿐 아니라(왕상 21:5-14), 헤롯 왕의 잔치에도 참여하는 자이다(막 6:25-27).


교만이 막 싹트기 시작할 때는 그리 해로워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숨겨진 욕망이나 혹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는 생각을 소셜 미디어의 사진이나 글을 통해 얼핏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교만이라는 짐승이 자라나면 영광의 주님을 대면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청교도의 기도를 그저 무뚝뚝한 태도로 묵상할 수가 없다.


내 안에 높아진 모든 생각을 무너뜨리소서

이 교만을 부수어 사방으로 흩으소서

내 마음에 달라붙은 자기 의의 찌꺼기를 다 제거하소서

그리고 내 속에 회개의 눈물이 샘솟게 하소서

그렇게 나를 찢고 다시 싸매소서


2. 교만은 십자가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


교만한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죽이고 말았지만, 그 사건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는 일이 되었다(행 4:28).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 가운데 교만은 그리스도를 못 박게 만들었지만, 그리스도가 못 박히심으로써 교만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그 나무의 거친 표면과 거기 박혀 있는 차가운 못을 만져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고백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망각하거나 왜곡할 때 교만이 자기 안에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골고다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만 자기 속에 있는 교만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는 왜 교만이 살아남을 수 없을까? 첫째로,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원인이 우리의 교만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다시 말해,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해악한 입술과 마음속에 감추어진 욕망, 그리고 자신만만한 태도와 거만한 눈빛을 깨닫게 된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보려면, 그 앞에서 우리가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둘째로, 십자가는 우리 입술에 진정한 자랑을 심어 줌으로써 교만을 내세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랑을 제거한다기보다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추구하던 자랑이 비로소 그분을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신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이처럼 십자가는 죄 가운데 자랑하던 우리로 하여금 사죄의 은혜를 누리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역사하던 사탄의 세력을 멸하여 우리가 받아야 했던 영원한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를 철회하고 마침내는 우리에게 의를 부여함으로써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준다. 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호흡하며 온전한 정신으로 그분을 찬양하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우리에게는 그분을 자랑해야 할 이유밖에 남지 않았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 ‘예수’는 그저 역사 속의 한 인물을 지칭하는 이름일 뿐이었고, 복음이란 주일학교 시절의 기억이나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였으며, 구원은 평범한 종교적인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예수’는 가장 고귀한 이름으로 들리게 되었고, 복음은 유일하게 좋은 소식으로 다가왔으며, 구원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부귀보다 더 값진 선물로 여겨졌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유를 밝히는데, 이는 곧 우리 각자가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그분의 정체성을 알아차릴 만큼 똑똑해서도 아니며 심지어는 구원자가 필요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의식할 만큼 깨어 있어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어떠한 환경에서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갔든 간에, 그 배후에는 우리를 부르신 성부와 우리를 찾아오신 성자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신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 시작만이 아니라 중간 과정과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역을 하며 심고 물을 주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고전 3:7). 그리고 경건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모든 노력조차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고전 15:10). 결국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또 우리를 자라게 하시므로 영혼이 성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를 붙드시기에 마지막까지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7-9).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재능이나 성과를 드러낼 때 그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라고 교만이 부추긴다면, 얼른 이 질문을 던져 정신을 차려야 한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 그 어떤 일에 대한 공로도 우리 자신이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 진정 감사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주어진 선물로서 찬양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4.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4:21-23). 


우리는 교만에 설득당할 때가 있다. 우리가 추구해 온 무엇인가를 한순간이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교만은 우리를 설득한다. 동료들의 찬사라든가 주위에서 보내는 존경의 시선, 또는 사람들의 환호나 특별한 소속감을 누리는 즐거움을 경험해 보라며 설득한다. 그러나 가볍게 보이는 그 제안에 따르는 대가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 교만은 우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네면서 다른 모든 것을 대가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D. A. 카슨(Carson)은 ‘십자가와 기독교 사역’(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에서 바울이 단순하게 진술한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라는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논리를 이렇게 풀어낸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또 만물이 하늘 아버지의 것이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면, 만물은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말라며 교만이 속삭인다면,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곧 만물을 소유하신 우리 아버지가 인생의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기에, 우리는 다윗처럼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교만한 마음을 품으려는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고작 몇 마지기 땅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왕자와 같다.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게 이미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말이다.


교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일시적으로 그렇게 할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 이 순간에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게끔 역사하시고 마침내는 우리에게 온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마 5:5; 롬 8:16-17).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했으며 그리스도는 성부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속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하나님이 만물을 소유하신다. 그러므로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할 것이다(시 34:2)




원제: Argue with Your Pride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장성우

교만은 우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네면서 다른 모든 것을 대가로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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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cott Hubbard

스콧 허바드는 Desiring God의 에디터, All Peoples Church의 목사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