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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TGC 신임 대표 줄리어스 김이 걸어온 나그네길
by Sarah Eekhoff Zylstra2020-01-22

- 이 글은 TGC 신임 대표로 선출된 줄리어스 김의 성장 배경과 사역 비전을 설명하는 아티클이다. 여기서는 원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함을 밝힌다.


줄리어스 김(Julius Kim)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줄리어스는 미군 부대에 소속된 사립학교를 다니며 한국 문화와 영어를 동시에 익혀 나갔다. 그러다가 열두 살이 되자, 그의 가족은 다시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다.


그는 중학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느낌이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가정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문화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온 후로는 인종 차별을 겪었다. 그러다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그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저는 지금도 두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문화권 속에 있긴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진 않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보다는 학창 시절에 그러한 느낌이 더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대 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듯, 저 역시 제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엄청나게 씨름했습니다. ‘나도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죠. 그러면서 스스로를 미워했습니다. 제게 있는 놀라운 재능이나 강점 그리고 기회는 보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그렇게 지나온 시절은 마치 유배지에 있는 듯한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한 마디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줄리어스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두 가지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이방인처럼 살게 된 한국계 미국인 친구가 많이 있었다는 이점이다. 또 하나는 열두 살 때 집에서 쫓겨나 잔혹한 전쟁 가운데 생존한 후로 두 번이나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아버지가 자신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 주었다는 이점이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타문화권 속에 살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즐거운 경험을 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갔다. 그러면서 어떻게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는 나라에 살다 보면, 신자들은 때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세속화도 가속화되면, 점차 유배지로 추방되는 기분까지 맛보게 된다.


그러나 줄리어스는 바로 그 경험이 자신의 문화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아버지의 회심


그처럼 나그네로 살아가는 비결을 줄리어스는 그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원래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난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호의호식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곧 줄리어스의 할머니)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에게 쫓겨나 다른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아버지가 찾아와 불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근교의 작은 마을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식량을 구하거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해서 철수하게 되자, 그는 정부가 지원하는 무상 교육과 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즈음 한 친구의 인도로 마을에 세워진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명목상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밤이면 교회에 가는 아들이 집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이후 1950년 6월에 북한군이 쳐들어오며 전쟁이 터지자 학교와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에 두려워진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비록 아버지는 자신을 쫓아냈고, 어머니는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궜으며, 나라는 그를 안전히 지켜 주지도 못했지만, 그 모든 시련은 그의 믿음을 좌초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러한 환난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경건한 생활


1959년에 아버지는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약 10년 후 줄리어스가 태어났다.


그러다가 줄리어스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와 공군 제트기에 장착할 컴퓨터 메모리 시스템을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회사는 전성기 무렵에 직원을 천 명 가량이나 두었다.


당시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지역 교회의 목사를 초대해 복음을 전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줄리어스의 증언에 의하면 “수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줄리어스는 아버지가 직원들을 어떻게 돌보는지, 또 지역 교회의 사역을 어떻게 후원하는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평신도 리더로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며 자라게 되었다.


“아버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멘토입니다. 그 경건한 생활이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남겼죠.”


그런데 1980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줄리어스는 자신의 짙은 피부색과 검은 눈동자가 다른 이들과 달라 두드러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관심을 두는 문제나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선호하는 집안 장식이나 주말 활동 등도 모두 미국인 친구들의 생활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처럼 줄리어스의 가족은 주류 문화권에 속하진 못했지만, 다른 한국인 가정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1980년에 캘리포니아로 돌아올 당시 그의 가족은 똑같은 바다를 건너온 29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 대열에 속하게 되었다.


그 이민자 물결은 1965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이 해제되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970년에 3만 9천 명 정도였던 한국인 이민자 수는 1990년에 56만 8천 명으로, 2010년에는 1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미국으로 넘어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된 초기 한국인 이민자들은 대체로 야망이 크고 똑똑하다는 등 공통점이 많았다. 그리고 서로 밀접한 관계로 엮어진 커뮤니티를 이루어 한 동네나 교회 혹은 가정에서 자주 모였다.


줄리어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주일 밤이면 3,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늘 저희 집에 모였습니다. 모두 함께 저녁을 먹었죠. 그러고 나서 어른들은 성경공부를 하고,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학교에 가서 백인 친구들과 지내고, 주말이면 이민교회에서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줄리어스의 신학교 동창이자 장로교 목사로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오웬 리(Owen Lee)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한국인다운 애들이 있었는가 하면, 좀 더 미국인다운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애들은 그 중간에 끼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웬의 동생인 로빈 리(Robin Lee)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저는 대학에 가서야 제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혐오감을 지닌 채 오랫동안 살았죠. 백인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오웬은 집에서는 한국 문화에, 밖에서는 미국 문화에 맞춰야 하는 생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이며, 그 현실의 렌즈를 통해 인생의 모든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두 가지 문화 속에 있지만,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되죠.”


혼자가 아닌 삶


이처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낯선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자신과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존재라 할 수 있다.


로빈은 대학 시절에 한인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회장으로 있던 줄리어스를 만나 개혁신학에 대한 소개를 받으며 그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


줄리어스도 개혁주의 전통에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간 이유는 다른 신학교보다 그곳이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목사로서 생을 마감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담임 목사와 아버지의 권면으로 결국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때 저는 너무 어리고 미숙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목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번 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이전에는 알지 못한 방식으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열어 주었다. “새롭게 개혁신학을 알게 된 후로 성경을 보는 눈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러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획하지 않았던 길


당시 PCA에 소속된 한인 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를 사용하는 2세 사역자를 늘 필요로 했다. 이에 줄리어스는 목회학 석사 과정을 하며 어느 한인 교회에서 청장년부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금요일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또 토요일이 되면 리더십 훈련이나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상담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다시 설교를 한 후 온종일 교회를 섬겼다.


그 시절 줄리어스와 그의 아내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교수들은 그에게 박사 과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줄리어스는 이렇게 답변했다. “목회학 석사 과정도 충분히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울 만한 도구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수들은 한번 기도해 보라며 권면했다.


결국 그는 트리니티신학교에 가서 존 우드브리지(John Woodbridge) 교수의 지도하에 역사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줄리어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과정만 끝나면 해외로 나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러다 박사 논문 제안서를 준비하는 중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교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는 전화였다.


하지만 그는 일단 20년 정도는 해외에 나가 선교 사역을 해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그에게, 최소한 학교에서 기도를 한 후에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줄리어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이 학교가 보여 준 배려에 깊이 감사합니다. 바로 그 초창기 수년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를 용납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설교학과 타문화권 선교, 그리고 목회 사역과 설교사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설교학 교과서를 포함한 저술 사역과 일 년 동안 한국에서 가르친 경험을 포함한 교수 사역을 감당하며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에 있는 뉴라이프 장로교회에서 협동 목사로도 섬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좀 더 광범위한 선교 사역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세월


줄리어스가 트리니티신학교에 있을 때 돈 카슨(Don Carson)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딱 10년 후 카슨과 팀 켈러(Tim Keller)는 TGC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이 시대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는 복음주의 리더들의 연합을 이루는 게 당시 TGC의 목표였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누구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그 성과를 드러내었다.


그래서 현재 TGC는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스물한 개 지역의 대표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는 열두 개가 넘는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웹사이트 방문자 수만 1백만 명에서 3천 2백만 명으로 늘었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웹사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TGC 대표를 역임해 온 카슨은 다가오는 6월에 TGC 신학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줄리어스가 본격적으로 대표직을 수행하게 된다. 줄리어스는 기독교를 잃어버린 현대 문화 속에 복음을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목사들을 목양하고 교사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전 세계에 걸쳐 수행하게 될 것이다.


“TGC가 이미 감당하고 있는 사역에 맞아떨어지는 온갖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오신 주님의 섭리가 불가사의할 따름이죠.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려고 지난 세월 그 많은 일들을 허락하신 주님이 그저 놀랍습니다.”


세상 문화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오랫동안 미국은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선택받은 땅처럼 여겨졌다. 공립학교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었고, 법정에서는 판사가 성경을 인용했으며, 지역 의회에서는 의장이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했다. 나아가 토마스 제퍼슨과 에이브러햄 링컨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은 개신교에,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는 가톨릭에 속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있다. 2007년부터 2018년을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밝히는 미국인의 비율은 78퍼센트에서 65퍼센트로 떨어졌다. 이에 반해 스스로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다고 밝히는 비율은 16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증가했다. 또 낙태와 동성 결혼은 합법화된 반면에 교회 출석과 기도 생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두 다 쇠퇴하고 있다.


이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유배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인 조엘 킴(Joel Kim)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우리가 들고 다니는 여권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혹은 우리 이름에 뒤따르는 직함이 아닌 다른 데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곳은 일시적인 집,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있는 무언가를 꽉 붙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러한 삶이 큰 유익을 준다고 줄리어스는 말한다. “그와 같은 삶은 저로 하여금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또 장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결국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아온 여정은 줄리어스를 두려움에 위축된 사람이 아니라 그 담임목사인 테드 해밀턴(Ted Hamilton)의 표현처럼 “겁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아내의 고백처럼 “매력적이고 사려 깊으면서 희망차고도 열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한 나그네길이 줄리어스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TGC가 우리의 본향이 이곳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다른 분에게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의 인생과 관계, 우리의 꿈과 목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Unlikely Pilgrimage of TGC’s New President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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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arah Eekhoff Zylstra

사라 에코프 질스트라는 TGC의 편집자 겸 선임 작가이다. Dordt University에서 영어와 소통(BA),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Christianity Today의 작가였으며, 프리렌서로 지역 신문에도 기고를 하며, Trinity Christian College에서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