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에 대한 ‘관원’의 역할
by 장대선2020-04-02


현대 우리 사회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의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주변국만 보더라도 여러 대에 걸쳐서 가업을 잇는다거나 전통과 역사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쉽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인식과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은 미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독교 신앙 또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개신교 선교의 역사가 이미 백 년을 넘어선 시점이지만, 정작 그 기원과 전통에 대한 인식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O. J. Brown)은 이단에 관한 그의 책 ‘Heresies: the image of Christ in the mirror of heresy and orthodoxy from the apostles to the present’에서 “기독교는 수 세기 동안 영속된 옛 관습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 종교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에서 전통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인들이 수 세대 동안 전해준 첫 번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이다. 두 번째는 간결하고 신비로운 성경 구절을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우리가 정통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전통적 이해를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헤롤드 브라운의 설명에서 보자면 한국의 기독교는 가장 중요한 성경은 비교적 잘 전달 받았으면서도, 다음으로 중요한 “성경 구절을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 구절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단을 정의하고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근거를 제공한다. 오랜 시간 정립하여 형성된 정통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주장들이 바로 ‘이단’(Heresies)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문제는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다. 다원화된 현대적 사고와 가치관 가운데서는 마치 ‘양심수’(prisoners of conscience)의 경우처럼 법으로 제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양심의 문제로 이해하는 실정이다. 자신의 윤리적·사상적·정치적 신념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어야 함과 같이,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 또한 개인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입장이나 견해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 라틴의 격언인 “Corruptio optimi pessima est”, 즉 가장 선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정통의 교리에서 살짝 이탈하여 벗어나게 된 이단의 문제는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극악한 피해를 주는 심각한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한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에 바탕을 둔 집단적인 격리 생활, 심지어 광신적 집단자살이나 원시 공산제(primitive communal)의 추구 등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단들의 공통적인 양상이기 때문이다.


이단은 이미 신약성경 안에서도 언급되었고,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 사도는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라고 하면서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라고 했다. 이미 사도들의 시대도 이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정죄하여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라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주 후 325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로부터, 나폴레옹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있어서까지도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같은 중요성에 바탕을 두고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회의는 순수하게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위정자(군주)와 관원들이 함께 주관하는 가운데서 이뤄졌다. 중세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종교적인 권한(jurisdiction)뿐 아니라 사법적인 권한까지도 종교재판을 통해 사용했다. 교회는 군주 혹은 관원들과 긴밀한 협력 가운데서 이단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법적인 절차까지 단행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수많은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은,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고집하게 했다. 그로 인해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로 세속군주와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에서도 이미 세속정치의 야욕과 그로 말미암은 분열 및 쇠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봉건적 왕조체제가 붕괴한 이후부터 시작된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은, 신대륙 아메리카에 전래한 기독교 신앙이 연방의 연합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며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속정치와 종교 사이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현대적인 정교분리의 모범적인 예로 꼽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여기서는 연방정부든 주정부든 공식적인 종교를 가질 수가 없으며 모든 국민은 그가 택한 신앙을 자유로이 믿을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제헌헌법 또한 이러한 맥락을 견지했다.)의 의도 역시 앞서 영국의 국교회에서 보여준 폐단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을 뿐이지 정치와 종교를 완전하게 분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교를 근거로 개혁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세속정치의 권한을 헌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수정헌법의 바탕인 것이다.


최근 몰아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사태가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한 사법적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종교의 문제와 세속정치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역으로 신천지 이단은 이미 정치권과 상류 사회집단에 줄을 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이번 코로나 사태뿐 아니라 이미 가정파괴와 같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를 주는 그들을 사법적인 절차를 통해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와 세속정치의 적절한 관계의 설정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에 세속정치가 종교의 문제에 전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만 정교분리 원칙을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이단인 신천지의 문제에 사법적인 개입이 이뤄지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역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이해가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신천지와 같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와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 집단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실정법에서 규정하는 심각한 범죄를 자행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단인 신천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성교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단에 대처하고 있지만, 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신천지 이단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하는 경고문을 출입문에 붙여두는 정도의 대처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단의 폐해와 해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나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1578),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파악되는 세속정치와 교회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에 관한 관원들의 분명한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제23장은 “국가의 관원”에 관해 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하고, 모든 신성모독이나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며,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고 개혁하도록, 또한 모든 하나님의 규례들이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방안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으로서의 책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도 10장에서 “교회의 기독교 관원들의 직무”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비록 세상 왕과 군주라 할지라도 그들이 경건한 자들이라면, 때로는 그들의 권력으로 경건한 유다의 몇몇 왕들과 신약시대의 여러 경건한 황제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타락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주님의 참된 예배를 복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했다. 로마가톨릭 교회가 이단에 관련한 관원들의 역할까지도 교회가 차지해서 변질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이후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개혁된 교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국가의 관원들이 함께 협력하여 이단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제거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의 이단 문제 또한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관원들이 담당할 역할과 영역을 교회 스스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들의 확장을 차단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교회가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 상황은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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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대선

장대선 목사는 도서출판 고백과문답 대표와 장로교회정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교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터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