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치유자
by Joni Eareckson Tada2021-04-17

내가 울 때 슬픔이 내 마음에 낸 흠집의 틈바구니 사이로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부드럽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 그것을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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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어느 무더운 아침, 에이프릴(April)과 그녀의 남편은 아들들을 SUV 차량에 태우고 시에라네바다(the Sierras) 산맥에서 일주일간 캠핑을 하기 위해 출발했다. 목적지에 반쯤 다다랐을 때 에이프릴은 아이스박스를 열기 위해 안전벨트를 잠시 풀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바로 그 순간 반대편 차선에서 오던 차가 휴게소로 들어가기 위해 갑작스럽게 차선을 변경해서 들어왔다. 미처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에이프릴 가족의 SUV는 그 차와 충돌했는데, 그 차를 운전하던 노인은 중상을 입었고 그 차에 함께 탑승했던 이는 사망했다. 에이프릴의 몸은 앞의 대시보드를 강타했고 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1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내가 에이프릴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휠체어에 구부정하게 앉아 재활 치료를 받고 있던 사지 마비 환자였고 비참한 모습으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재활치료사의 말은 그녀에게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내 휠체어를 몰아 그녀 옆으로 갔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내 눈물은 함께 고통받는 이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는 에이프릴이 맞닥뜨린 공포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저 조용히 ‘오 하나님, 이 젊은 엄마가 어찌 이를 견딜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주어야 할까요?’라고 간구했다. 에이프릴은 울 수밖에 없었다. 2년 내로 남편은 그녀를 버릴 것이고 아이들 양육권 다툼이 이어져 그녀의 인생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상처입은 구원자를 담은 상한 그릇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위로를 다른 이에게 전하라 ‘명하신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의’ 위로지 우리의 위로가 아님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 위로를 전해줘야 한다면, 에이프릴 같은 이들을 볼 때 우린 그저 안타깝게 여기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칭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이 겪은 환난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가엾게 여기는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큰 환난을 당할 때 ‘항상’ 함께 아파한다.


질고를 아는 분이 에이프릴 같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찢기고 부서진 생명의 떡이 되셨다. 우리는 그분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주시는 격려를 우리 자신의 깨어짐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도록 하셨다. 다른 이들을 보며 그냥 안타까워하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시는가


스코틀랜드의 목회자였던 윌리엄 아놋(William Arnot, 1808-1875)은 “내가 울 때 슬픔이 내 마음에 낸 흠집의 틈바구니 사이로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부드럽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 그것을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드신다”라고 썼다(Roots and Fruits of the Christian Life).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면 우리의 환난은 기쁨이 되고 암울해진 영혼이 살아나고 위축된 마음이 펴지며 미약한 의지가 그리스도의 인내와 소망으로 강해진다. 공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의 본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벧전 4:13) 오히려 ‘즐거워하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더욱 달콤하고도 친밀한 관계로 이끄신다. 환난 속에서 주와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를 강하고 용감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목뼈가 부러져 절망에 빠진 젊은 엄마에게 다가가는 것도 가능케 한다.   


하나님의 대리인 되기


하나님이 주시는 아버지의 위로를 ‘받으면’ 우리는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그의 사랑을 전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도구’가 된다. 더욱 기쁜 것은, 에이프릴 같은 사람을 잘 위로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에이프릴 같은 사지 마비 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직관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고후 1:4)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난은 어떻게 우리가 상처 입은 이들을 더 잘 위로하도록 하는 것일까?


중보함으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함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고난 중에 있는 당신이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하면, 이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시 10:17)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에 대고 그야말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고난을 받는 자로서 환난을 당하는 타인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큰 통찰과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고 더욱 깊은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귀를 쫑긋 세우고 놀란 표정으로 ‘이 중보자는 정말 진지하다. 자기 자신 역시 고난을 당하고 있기에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우리의 씨름은 [비극적인 사고, 사지 마비, 이혼 같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중략]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는 에베소서 6장 12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로 담금질한 기도가 고난 당하는 다른 이들을 위한 간구에 어떤 도움이 될까? 에이프릴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하는 거짓말에 취약할 수 있다. 하지만 고난 받는 성도의 중보 기도로 그런 거짓말들을 막아줄 수 있다(눅 22:31–32).   


그의 말씀으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통해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 내가 목에 골절상을 입었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셨던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역시 고난을 겪고 있었음에도 나의 초점을 온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약속들이 그를 지탱해주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기에, 나 역시 그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그의 도움으로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약속들을 하나하나 살펴가는 것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의 고난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얻었다. 


에이프릴에게도 동일한 것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이 환난을 친구로 여겨요. 힘 좀 내요, 고난 중에도 즐거워해야죠!”라는 식으로 결코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은 혈액 한 팩을 테이블 위에 툭 던져놓고는 “자 여기요. 이걸 믿으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한마디 던지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그의 혈관에 나의 혈관을 연결하여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나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함께함을 통해 그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더 큰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더 큰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 배신, 노예 생활, 투옥으로 고난을 당했던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았기에 그의 악한 형들을 만났을 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당신 자신이 고난을 통과했던 때를 기억해 보라. 고난을 견딘 당신의 인내를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깨닫게 되지 않았던가? 고린도후서 1장 6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에이프릴은 자신의 삶은 하나님이 은혜를 펼쳐가시는 무대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이프릴을 주위에서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역시 이 무대를 주목하는 관객임을 알게 되었다(엡 3:10). 자신의 고난이 단순히 자기 개인의 일이 아닌 우주적인 사건임을 알게 되자 에이프릴의 신앙이 되살아났다.


용감해질 수 있도록 도우라


같이 고난 당하는 이들을 통해 에이프릴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이들 역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에이프릴을 위해 하는 기도와 말에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당신은 하나님이 다른 이들을 회복하는 일에 쓰시는 최고의 통로가 된다. 미국의 장로교 목사였던 J.R. 밀러(J.R. Miller 1840-1912)가 쓴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위로하시는 방식이다. 그는 고난 받는 이들 옆에 그저 앉아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공감하신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주신다”(‘Things to Live For’). 


이 글을 쓰기 2주 전 에이프릴이 장애에 의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휠체어를 굴려 앞으로 나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매일 아침 휠체어에 단순히 앉는 것만 하려 해도 에이프릴이 겪어야 했던 그 많은 고통들을 잘 압니다. [중략] 저도 고난을 겪는 사람이기에, 에이프릴이 이제 고통이 없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제게 위로를 줍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자 했던 그녀의 단순한 자세는 제게도 그렇게 행하라는 영감을 줍니다”라고 말했다. 감히 말하건대, 그날 아침 내가 정말 어렵게 고민하고 말한 그 고백이 그날 모인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고난 중에 받은 위로는 바로 그렇게 전해진다. 당신이 경험한 고난이 무엇이든, 당신이 어려울 때에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속으로 묵상하기만 하며 그저 방관자로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은 당신에게 사명을 주셨다. 고통에 대한 당신의 다음 한 판 승부는 하나님이 당신을 따뜻하게 격려하시며 당신보다 더 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라 보내시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질고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용감해질 수 있도록 도우라.


이것이 바로 주님의 상한 몸을 통해 위로 받은 상한 자가 하는 일이다. 




원제: Broken to Comfort the Broken: How Quadriplegia Prepared Me to Carry Others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고통에 대한 당신의 다음 한 판 승부는 하나님이 당신을 따뜻하게 격려하시며 당신보다 더 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라 보내시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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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ni Eareckson Tada

조니 이렉슨 타다는 캘리포니아 아구라 힐스에 위치한 Joni and Friends의 설립자 및 CE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