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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강생의 하모니
by Justin Taylor
2023-12-25
다음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장의 예수 탄생 사건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간단한 연대기이다. 마태는 주로 요셉의 눈을 통해서 사건을 전달하고, (아마도 마리아를 인터뷰했을) 누가는 주로 마리아의 시선으로 사건을 파악한다. 마태 누가 예수의 계보 1:1-17 3:23-38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의 탄생을 예고 1:5-25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 1:26-3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 1:39-56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낳음 1:57-80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림 1:18-25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음 2:1-7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전하고 목자들이 예수를 찾아감 2:8-20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감 2:21-40 동방에서 박사들이 도착(예수 탄생 1-2년 무렵?) 2:1-12 천사가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 이름 2:13-18 천사가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나사렛에 돌아가라 이름 2:19-23 함께 보세요 ▶ Lumo Project 원제: A Harmony of the Birth of Jesus: Matthew and Lu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 없음의 유혹
by Trevin Wax
2023-12-23
유혹 하면 보통 마음을 끌어당기는 특정한 태도와 행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유혹받는 게 뭔지 잘 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음란한 환상에 탐닉하는 것,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또는 내가 당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연민에 빠져서 쓰라린 자아의 뿌리를 키우는 모습 등이다. 유혹이라고 하면 보통 죄를 생각한다. 또한 이기적인 충동을 떠올린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진리로 죄와 유혹에 맞서 싸우기를 소망한다. 간과된 유혹특정한 죄에 대해서 선하고 경건하게 저항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가 행여라도 정작 훨씬 더 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혹, 이기심의 더 깊은 근원이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유혹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이 유혹은 다른 모든 죄악의 중심에 있으며, 개인 차원의 죄나 사소한 태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하나님 없음의 유혹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특정 성경 가르침을 부인하는 영적 또는 종교적 사람들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일상생활과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삶, 그래서 우리의 창조주를 아예 언급하지 않고 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그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자 저자를 내가 직접 쓰는 이야기의 각주로 축소한다. 이런 유혹을 “하나님 없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현실 대부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 부재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이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주변으로 몰아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의 가장자리 여기저기를 떠돌며, 필요할 때 치료를 공급하거나 고난받을 때 위로의 원천 정도로만 소환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안전하게 안주하며 내 일상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기를 원한다. 종종 개인적이자 사적 종교라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언제나 우리가 만든 조건에 부합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나를 괴롭히고, 자유를 침해하고, 또 욕망을 방해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하다. 이것은 세속 시대의 삶이 직면한 큰 유혹이다. 아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편한 대로 만들어 저기 어딘가 내놓은 존재로 인식하면서 살고 싶은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유혹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정작 우리를 비췰 때 눈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 유혹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부재를 당연시하며 사는가? 전능한 ‘내’가 내 생각과 열망의 중심에 있는 진짜 위대한 ‘나’를 얼마나 자주 밀어내는가? 우리의 예배, 모임과 외출, 봉사와 사역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세속 시대 교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각종 활동으로 바쁘고 싶은 유혹에 항상 직면한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사실상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일상적인 기독교 용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조를 암송한다…. 단지 기능적 세속주의자로서.기도하지 않음우리가 하나님을 잊거나 무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했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기도야말로 내 가면을 벗기고 나의 자급자족 정신을 드러낸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현실 세계”를 권력, 정치, 일과 여가, 심지어 사역의 중심으로 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 영역과 세상의 거칠고 험난한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한편,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분, 즉 우리가 가진 위대함과 자립이라는 환상을 벗겨내시는 하나님은 옆으로 제쳐둔다. 우리가 진짜로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안다면, 그래서 나를 부르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길이 없음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조용한 절망 가운데에서 그분이 함께하심을 갈구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고 또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하얀 불빛 같은 거룩하심과 함께 다가오는 부드러운 손길의 신선함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하나님을 옆으로 밀어내기세속 시대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가져다준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변으로 밀어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중심 무대에 선다. 이제 중요한 건 오로지 인간의 활동이다. 우리의 목표와 열망. 우리의 전략과 기술. 우리의 목적과 계획. 영원하신 분이 단지 보조 역할에 그치기에, 우리는 이제 영원이란 관점을 잃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들은 이제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 숨겨져 있다.뜨거운 기도의 부재로 드러나는 하나님 밀어내기, 이것은 확실히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큰 유혹이다. 원제: The Temptation We Most Often Overloo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by 박혜영
2023-12-22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예수의 탄생과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 또는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요 1:13) 말미암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믿게 되며,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아무 어려움 없이 믿습니다. 둘 다 원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반면, 어느 한쪽을 믿지 못하면, 다른 한쪽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는 하나[한 덩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분이 자신은 거듭난 신자지만,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좀 마음에 걸린다고 하면, 그 사람 속에서 진리는 불일치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진리는 하나[한 덩이]라는 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전능(全能)하시며, 전능하기에 전지(全知)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칩시다. 그럼 상대방을 어쩌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 있으면 전능하지 않은 것이며, 전능하지 않다면, 전지하지도 않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전지하려면 전능해야 하며, 전능하려면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에 대한 진리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덩이입니다. 원래의 내용으로 돌아와 봅시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요셉이 …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마 1:25)—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열 달을 채우고 출생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자가 육신이 되었으며, “나실 바 거룩한 자”(눅 1:35)가 되었습니다. 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육신으로 태어나 살던 어떤 사람이, 삶의 어느 순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요한일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낳았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담하게 “씨[헬. 스페르마]”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요일 3:9). “씨”는 헬라어에서 ‘정자’(精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의 ‘정자’(perm[스펌])가 이 헬라어, 스페르마에서 기원한 겁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씨”를 육신으로 사는 어떤 사람에게 주시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 3:9), 곧 “하나님의 자녀”(요일 3:10)가 됩니다. 하나님의 씨에 의해 잉태된 자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입니다.그럼 “하나님의 아들” 곧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육신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같은 모습이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3:2). “그와 같을 줄을!” 둘 다 성령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장래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으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뭐라고 말하는지 자세히 보면 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잉태된 아기가 어미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면 때가 되어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 또한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요일 3:3)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부모에게서 난 사람이 전부인 이 세상에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출현하였습니다. 새로운 종의 인간입니다. 그렇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죄를 짓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영화 Past Lives: 가벼운 로맨스 세상에서 발견하는...
by Brett McCracken
2023-12-21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미묘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영화로 올해 최고작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반대가 종종 권장되거나 적어도 반대하는 모습이 더 “진정성이 있다”라고 단정하는 세상에서 도덕적 자제와 자기 부인, 헌신의 고수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상쾌함을 준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로맨틱 서사를 지배해 온 예측 가능한 대본(“당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가라”)을 180도 뒤집는, 매우 할리우드답지 않은 러브스토리이다. 이십사 년에 걸친 세 번의 연결영화는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북미로 이주한 여성 노라(그레타 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노라의 생애 중 세 시기를 다룬다. 첫 번째는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다. 노라(당시에는 나영)는 같은 반 남학생 해성과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은 로맨스의 정점에 다다른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로맨스가 결실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노라의 가족이 한국을 떠나고 이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 장면은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한 세트의 계단을 올라가는 노라와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골목길의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는 해성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려졌다.)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뉴욕에 사는 이십 대의 극작가 지망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해성(성인 역할은 유태오가 연기)은 최근에 군 복무를 마쳤다. 두 사람은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통해 재회하고 장거리 로맨스가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상 통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연결(이건 결국 2011년경의 인터넷 기술과도 관련이 있다)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먼 거리도 피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꿈꾸는 미래에 “올인”하고 싶었던 노라는 온라인 관계를 청산한다. (해성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노라는 자꾸 한국에서의 과거에 집중하는 거 같아서 불편해 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각자의 길을 걷는다. 다시 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아서(존 마가로)라는 유대인 작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여전히 서울에서 살던 해성이 처음으로 뉴욕을 방문하고, 이십사 년 만에 노라를 직접 만나자,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잊혔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 시점에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라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삼각관계 플롯으로 바뀌기 마련이며, 노라는 결혼한 미국 남자와 그녀의 “소울메이트”가 될 수도 있는 한국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가 아니다. ‘이게 내 삶이야’(스포일러 주의) Past Lives를 보면서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 (1995년 비포 선라이즈, 2004년 비포 선셋, 2013년 비포 미드나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삶이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삶의 지점에서 해성과 노라를 만나는 것처럼, 링클레이터의 비포 영화도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세 가지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을 관찰한다.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과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둘 다 별(star)이 교차하는 로맨스[결코 맺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로맨스를 의미_번역 주]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가능하도록 한 것만 같다. 그러나 비포에서는 주인공이 “소울 메이트”(심지어 그 과정에서 이혼까지 감행하더라도)의 자석 같은 매력에 빠지지만, Past Lives는 “소울 메이트”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장을 던진다. 해성이 뉴욕을 방문하고, 노라는 불안감을 느끼는 남편 아서를 안심시킨다. “이게 내 삶이야. 내가 같이 사는 사람은 당신이야.” 그리고 그녀는 덧붙인다.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해성을 향한 노라의 복잡한 감정이 진심일지라도, 또 ‘만약에 해성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면?’ 등의 물음이 그녀의 마음을 스쳤다고 해도, 그것은 추상적이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일 뿐 “이게 내 삶이야….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녀는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이 주는 “만약에…”라는 낭만보다 현재의 삶과 약속이라는 현실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마냥 낭만적이며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 아니다. 바로 그녀가 사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주도하는 정신은 그 반대를 외친다. 모든 선택의 여지를 열어 두고 또 모든 가능성을 즐기라고 한다. 약속은 언제라도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쓰지 결코 잉크로 쓰지 않는다. 놀랍게도 노라의 여정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저항한다. 관객이 이십사 년 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뒤에 무언가를 남겨두면 얻는 것도 있다”라는 지혜에 노라가 귀를 기울인 게 분명하다. 한국에서 살았던 노라의 ‘지나간 삶’은 실제였고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러나 뒤에 남긴 상실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녀는 지금 손에 쥔 현실이라는 ‘얻음’에 감사하기로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식의 과거와 현재의 긴장은 친숙한 위안과 매력을 지닌 우리의 “옛 자아”와 비록 원하지만, 종종 거슬리고 불편하며 생소하기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새 자아”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익숙한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 같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삶이 가질 수밖에 없는 후회와 고통, 향수라는 진짜 감정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다. 노라는 해성이 자신의 삶에서 가진 과거의 의미, 현재의 가치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꿈을 가지고 씨름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를 뛰어난 작품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복잡한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주인공은 단지 달콤한 로맨스를 위해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감정을 성숙한 지혜에 복종시킨다. Past Lives는 때때로 가장 스릴 있고 낭만적인 선택이 가장 “지루한” 일이 될 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헌신하라. 그리고 신실하라. ‘인연’ 그리고 인도함을 갈망함 Past Lives는 사랑과 로맨스 이야기인 동시에 떠남과 다른 문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민이 가진 “중간” 성격에 대한 반자서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민자는 동시에 두 문화와 연결되고 두 문화로부터 함께 형성되는 느낌을 받는다. 노라에게 있어 해성과 아서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은 한국 출신과 미국이라는 미래 사이의 긴장과 유사하다. 이야기 속의 두 남자가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두 개의 “집”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을 강조한다. 인연(영어에는 딱 맞는 단어가 없다)이라는 한국어 개념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노라가 아서에게 설명하듯이 인연은 환생을 수반하는 불교적 개념으로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과 운명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낯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옷이 스치는 것도 인연이야. 왜냐하면 전생에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이거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건 팔천 생애 동안 팔천 겹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래.”영화 제목은 환생과 인연이 만들어 냈을 수많은 ‘지나간 삶’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키며,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 노라, 해성, 그리고 아서 사이의 연결을 알리는 지점까지 울려 퍼진다. 노라와 해성이 브루클린의 회전목마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회전목마의 돌고 도는 움직임은 아마도 서양의 선형적 시간 개념과 반대되는 순환을 중시하는 동양적 시간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노라가 실제로 환생과 인연을 믿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이 영화가 인간보다 더 큰 무언가(인연이든 신의 섭리든)가 인간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의 아름다움과 위안을 전한다고 해서 어떤 신비적인 색채를 띄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신비는 다름 아니라 만물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이다(골 1:16-17). 비록 기독교 세계관보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더 많이 반영하지만, 무언가 가치를 주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갈망을 이 영화가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의 삶은 더 장엄한 “계획” 안에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우리의 관계는 단순한 무작위의 충돌 그 이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갈망을 다중 우주 추세와 “정경 사건”(canon eventt) 및 “필연적 교차점”이라는 가짜 영적 개념을 포함하여 대중문화의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무엇이든, 노라는 자신이 단지 삶에서 수동적인 플레이어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기로 맹세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녀가 누리고 있지 않은 “만약에 그러면 어떨까”의 삶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사는 “내가 직면한 삶”(비록 불완전하더라도)을 포용하는 바로 그 선택이다. 바로 그 선택에서 그녀는 드물고도 신선한 지혜의 모습을 제시한다. 원제: ‘Past Lives’: Mature Wisdom in an Indie Rom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명목상 교인들,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3-12-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저명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책 Biblical Perspectives on Evangelism(Abingdon, 1993)에서 구약 관점의 전도 대상자들을 세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교회 바깥 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신자가 되는, 가장 전형적인 전도 과정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들’이 다시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을 들으며 여호와를 경배하는 광경(느헤미야 8장)은 이름뿐인 하나님 백성이 회복되는 장면이다. 이는 바로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시키는 사역의 전형이다. 브루그만이 말하는 세 번째 전도 대상은 믿음의 자녀들이다. 그것은 사랑받는 자녀들이 믿음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신앙이 후대에 게 전수되지 않고 교회학교가 사라지는 현상은 바로 명목상 기독교가 뚜렷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위의 세 유형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명목상 기독교를 형성하는 가장 주된 집단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잃은 교인들, 그리고 신앙이 전수되지 않는 교회의 자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중요한 복음 사역의 대상이다. 이번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현상에 관한 조사를 보면 눈에 띄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연령이 낮을수록 명목상 교인의 비율이 높게 나왔다. 명목상 교인의 연령별 비율이 20대는 50.1퍼센트, 30대는 41.2퍼센트인데, 40대 이상에서는 30퍼센트대로 나온다. 이는 모태신앙인이나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이들의 경우 주체적인 신앙 결단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명목상 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브루그만이 언급한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믿음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서 나온 두 번째 특이한 결과는 한국에서 명목상 교인에 이르는 과정은 단순히 기독교 가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명목상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 출석한 시기를 물으니, 비명목상 교인에 비해서 훨씬 높은 응답률을 보인 시기는 ‘결혼 후’였다. 명목상 교인의 19.5퍼센트가, 비명목상 교인의 9.9퍼센트가 결혼 후 처음 교회 출석을 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 글 “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 많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신앙 그 자체보다는 가족과의 관계로 인해서 교회에 다니는 명목상 교인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현재 교회를 선택한 이유에서도 비명목상 교인들은 설교 때문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명목상 교인들은 가족이 다니기 때문이라는 답이 가장 높았다.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조사에서 나타난 세 번째 특이점은 명목상 교인들의 비율이 중형 규모의 교회들에서 더욱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중형 규모의 교회들(100명 이상 2,000명 미만)에서 명목상 교인의 비율이 평균보다 높았다(약 43.5%). 반면 2,000명 이상의 대형교회 출석한다는 명목상 교인은 34.7퍼센트, 100명 미만의 소형 교회에 출석하는 명목상 교인은 약 35.3퍼센트로 나타났다. 명목상 교인을 산출하는 여러 조건(20회 이상)을 대입해 봐도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에서 중형교회보다 비율이 낮은 것은 일관된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몇 가지 추론적 설명이 가능하다. 일단, 상당히 다양한 신앙 양육 프로그램들이 제공되는 대형교회의 교인들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도전을 자주 받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 순 없지만, 성장하고 있는 대형교회라면 좀 더 생동감 있는 영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반면 정체되거나 쇠퇴하는 기성교회의 경우 오래되거나 습관적으로 교회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좀 더 많을 수 있다. 혹자는 이 결과에 대해서 코로나로 인한 교회의 재편 가능성도 이야기한다. 코로나 시기 동안에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교회들에 관심을 쏠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대형교회로 이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거나, 혹은 가족에 이끌리어 수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이들(한국형 명목상 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는 크리스텐돔(Christendom) 체제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서구형 명목상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창 기독교가 확산하는 곳에서도 복음의 혼합과 약화로 인한 명목상 기독교가 일어날 수 있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의 일부 지역이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성장하는 만큼, 번영신학과 혼합주의 신앙의 문제도 심각하다. 얼마 전 만난 동남아 지역의 한 선교사는 그곳에서 자신이 다녀봤던 현지 교회들 대다수가 번영신학에 물들어 있다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진정한 회심과 온전한 제자도를 위한 과제이며,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늘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이번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조사에서는 명목상 교인들의 신앙 의식과 윤리적 삶에 주목해야 할 결과들이 있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에 대한 동의 비율에서 명목상 교인들은 객관적인 교리들인 성경, 예수의 속죄, 성육신, 성령, 창조, 동정녀 탄생에 동의하는 비율이 70퍼센트 후반에서 80퍼센트 후반에까지 이르렀다. 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인’(48.1%)이나 ‘하나님이 지금도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68.3%)에는 동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가장 동의하지 못하는 항목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38.2%)였다. 이 결과를 보면 명목상 교인들은 기독교에서 표방하는 일반적인 신앙 주제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죄 문제와 하나님의 개입과 같은 실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신앙이 그들의 실제적인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신앙 윤리와 관련된 물음에서도 명목상 교인들은 가장 관용적인 항목은 1위가 음주, 2위가 이혼, 3위가 혼전 성관계, 4위가 흡연 순으로 나왔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목상 교인과 비명목상 교인 간에 허용하는 격차가 가장 크게 나타난 항목들이 있다. 사주, 점, 풍수지리에 있어서 ‘해도 무방하다’는 응답 비율이 명목상 교인은 41.3퍼센트, 비명목상 교인은 7.7퍼센트로 나와서 약 5.5배 차이가 난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명목상 교인은 23.9퍼센트가 허용, 비명목상 교인은 5.3퍼센트가 허용한다고 답해서, 약 4.5배의 차이다. 제사에 대해서 무방하다는 응답도 명목상 교인은 48.7퍼센트가, 비명목상 교인은 13.9퍼센트로 나와서 약 3.5배의 차이가 난다. 이같이 실제 생활의 문제로 들어가면 명목상 교인들은 비교적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과 비교할 때 윤리관과 가치관에서 큰 괴리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명목상 교인들을 위한 사역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이번 조사에서는 명목상 교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의 신앙 수준에 맞는 눈높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첫 번째 진단이다. 교회 안에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지만 정작 신앙의 기초에 관해서, 즉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서 문외한인 많은 “숨은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모임은 드물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양육은 상시 제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 초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회중 전체가 복음의 기초를 갱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둘째로 명목상 교인을 포용하는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 사역이 필요하다. 명목상 교인이 된 이들 중에는 교회 안의 구역이나 모임이 형식적이거나 이미 친하게 지내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에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셋째는 아직 신앙이 미숙하거나 자라지 못한 이들을 위한 목회적 돌봄의 필요성이다. 목회자들은 주로 공식적인 사역에 전념하다 보니 교회 내의 직분자들이나 신앙의 연륜이 있는 이들 중심으로 교제권을 국한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신앙의 언저리에 있는 이들에게 목회적 돌봄이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명목상 교인에 대한 사역을 목회자가 도맡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목회자 중심주의, 성직주의는 명목상 기독교를 유발하는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목회적 돌봄은 전임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리더들이 상호 유기적 체계를 이루어 교회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수행되어야 한다.명목상 교인들을 위한 사역의 방향으로 신앙의 기초 교육과 공동체, 그리고 세심한 목회적 돌봄의 필요성을 거론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은혜의 복음 선포라는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신앙 교육과 공동체, 그리고 목회적 돌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반복되며 강조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적 부흥은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을 돌아오게 한다고 말한다(팀 켈러의 센터처치, 167).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정교한 사역 프로그램의 설계로 해결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이 회중 전체의 확신과 기쁨이 되고,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 때 원천적인 해결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꼽은 2023년 10대 신학 사건
by Collin Hansen
2023-12-19
수년 동안 J. K. 롤링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트랜스젠더를 거부하는 거의 유일한 주류 인사였다. 한때 동성애자의 권리를 지지하기 위해 펜을 휘둘렀던 그녀가 논리적으로 볼 때 성 혁명의 다음 단계를 밟지 않음으로써 많은 팬은 배신감을 느꼈다. 악명 높은 Tavistock 성 정체성 클리닉이 작년에 폐쇄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영국 총리 리시 수낙은 성명을 통해서 동성 결혼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혼합 지지와 트랜스젠더 이념 거부를 비준했다.그리고 10월 7일에 군인과 민간인, 남녀노소를 불문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시작되었다. 실로 엄청난 놀라움과 공포를 가져다준 사실은 서구의 주요 도시와 명문 대학 캠퍼스에 하마스를 지지하는 군중이 모였다는 사실이다. 하마스가 LGBT+ 정체성을 반대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위자들은 스스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결국 하마스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훈련하고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마스가 자유주의 지지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일부 하마스 지도자들은 억압받는다는 주장이야말로 자신들을 감시하는 서구 세계를 향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도구임을 인식했다.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가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시위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리고 대학 총장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량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을 비난할 준비도 하지 않고 의회 청문회에 들어갈 수가 있는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야샤 뭉크(Yascha Mounk)는 이런 현상을 “정체성 합성”이라고 부른다. 뭉크는 신작 The Identity Trap에서 올해 들어서 좌파 진영에서 과도한 비판적 인종 이론과 교차성, 그리고 성, 인종, 성별에 따라 정체성 그룹을 양극화하는 기타 교리에 대한 반대가 증가했음을 보여 준다. 이리저리 맞물린 탄압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동성애자” 그리고 여성 스포츠를 장악한 남성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등 전혀 일관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뭉크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가 교차성에 헌신하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그 운동의 활동가들은 새롭게 참여하는 사람이 인종 차별의 본질, 장애인이 겪는 불의,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일련의 구체적인 입장에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뭉크의 우려를 공유하는 사람은 러시아 문학 분야의 선도적인 전문가인 Northwestern University의 게리 사울 모슨(Gary Saul Morson) 교수이다. 새로운 대작, Wonder Confronts Certainty에서 모슨은 “피해는 그 자체로 악에 대한 하나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피해자는 이제 자신이 초래하는 피해를 정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관찰은 하마스의 공격에 적용이 가능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보복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모슨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복음의 심리학적 진리를 보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기억에 남는 인물들을 통해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설명한다. 악은 단지 나쁜 행동뿐만 아니라 합당하지 않은 욕망이기도 하다. 살인자의 행동만이 악이 아니다. 악은 비통한 마음이 품는 의도에도 담겨 있다. 그렇기에 억압받는 사람이 종종 억압자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악한 시대를 통해 길을 보여 주신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억압의 순환에 쐐기를 박는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요 15:13).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다(눅 6:27). 정체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평화를 찾도록 도울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복음은 더욱 빛난다.매년 회고의 글이 그렇듯, 올해에도 최고의 신학 사건을 식별하기 위해서 나는 TGC를 구독하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이것은 작은 세상 한구석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모습이다. 10. 남침례교 총회는 여성 목회자 문제로 새들백 교회를 제명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이 가장 유명한 목사가 개척한 교회와 관계를 끊는 순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하다. 릭 워렌은 여성을 주요 사역 직위에 앉히지 못하도록 하는 교단의 견해를 바꿔 달라고 남침례교 총회에 호소하는 입장을 밝혔다. 꼭 워렌이 아니더라도, 여성을 목회자라고 부르는 교회를 훨씬 더 많이 제명할 근거를 줄 헌법 개정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신학적 요점에 동의하는 침례교도들조차도 선교를 중심으로 연합된 이 협약에서 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만은 일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9. 선거 패배 이후 생명 보호 운동이 재편성되었다.여러 측면에서 볼 때, 생명 보호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Dobbs가 Roe를 뒤집은 첫해인 2023년 첫 육 개월 동안, 이전이었다면 낙태를 선택했던 어머니에게서 약 3만 2,00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의롭고 생명을 보장하는 법은 실제로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번 가을 선거에서 오하이오에서는 낙태 옹호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켄터키와 버지니아 전역에서는 낙태 반대론자들을 패배시켰다. 생명 보호 운동의 다음 단계로 중요한 건 설득이다. 태어나지 않은 모든 아기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으로 대우받도록 가르쳐야 한다. 8. 티모시 켈러가 사망했다. 팀 켈러가 사라진 지금, 복음주의 진영에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에 대해 폭 넓은 경험과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후계자가 없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과연 어떤 다른 글을 썼을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정체성에 대한 서구인의 집착과 같은 주제를 성경 주석과 문화 분석을 독특하게 결합해서 써내려가는 글 말이다. 그러나 켈러가 이전 세대의 신학자들로부터 배운 것처럼 켈러를 존경했던 지금 세대에게도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7.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새 하원의장에게 집중되었다. 미국 국회의사당 테러 이후,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이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 용어를 정의하기란 어렵다.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이 다 조금씩 이 용어 안에 스며들어 혼합되었다. 지난 10월 미국 하원이 마이크 존슨을 의장으로 선출했을 때, 그는 가장 강력한 대표로서 빠르게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과 연결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옛 종교적 우파부터 새롭게 부활한 신정(theonomy)에 이르기까지, 비평가들이 모든 걸 하나로 묶으려고 할 때, 그들은 법이 필연적으로 도덕성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든다. 단지 그 영향력이 기독교에서 나올지, 다른 종교에서 나올지, 아니면 어떤 세속적인 변형에서 나올지의 문제일 뿐이다. 6. 대중의 이목을 끄는 개종은 세속주의에 대한 환멸을 암시한다.새롭게 기독교에 들어온 아이야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 캐서린 본 드라첸버그(Katherine von Drachenberg), 그리고 몰리 워든(Molly Worthen)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히르시 알리는 신무신론(New Atheism)의 주요 대변인이었다. 리얼리티 TV에서 문신 예술가로 명성을 얻은 본 드라첸버그는 주술과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워든은 역사를 공부하고 미국의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특히 여성에게 희박한 대안을 제시하는 세속 시대에 복음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여성을 위해 모든 걸 바꾸셨던 반면에 세속주의는 남성 지배로의 복귀를 위협한다. 5. 탈교회 추세가 기대를 뛰어넘었다. 올해가 되어서야 우리는 지난 25-30년 동안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규모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크고 빠른 종교 관행의 변화로, 약 4천만 명의 미국인이 교회 뒷문으로 도망쳤다. 아니, 다시는 교회 정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반제도적 정신을 고려할 때, 당파 정치와 학대 스캔들을 탈교회의 주요 원인으로 의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신학의 격하도 의심할 바 없이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단지 이사하고 새 교회를 찾지 않는 등, 탈교회의 진짜 이유는 평범하다. 그럼에도 좋은 소식은 신학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많은 교회가 그나마 쉽게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환대 실천에 대한 도전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4. Z세대가 영적 부흥의 조짐을 보인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어린 세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읽으면 당장 널리 퍼진 정신 질환과 성별과 성적 지향에 대한 혼란 때문에라도 걱정부터 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1960년대에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청소년에 대해서 낙관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며 당시는 예수 혁명으로 부흥하지 않았던가? 올해 발생한 에즈베리 각성에 대한 신학적 평가에서는 열정적인 예배와 진정한 부흥에 대한 고무적인 징후가 많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주님께서 코로나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고통을 견뎌온 이 젊은 세대를 위해 부드럽고 감미로운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고 계신 거 같다.3. 활동가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부터 성의 신학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앤디 스탠리가 복음주의자가 동성결혼을 축복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받아들이기는 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성적 행위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도록 로마가톨릭 신자들을 계속해서 촉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놀라는 사람들도 없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독교 음악은 종종 성경적 도덕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는 수년 동안 동성 결합을 축복했고, 성공회 내에서 분열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왔다. 구도자에 민감한 복음주의자, 음악계의 거물, 로마가톨릭, 국가 교회 등을 막론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신학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회 철학이다. 역사는 실용주의와 복음주의가 결합하는 순간, 결국에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현명한 신학생과 대학생은 남성과 여성을 각각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기독교 인류학 수업에 몰려들고 있다.2. ChatGPT는 기술 미래학자들을 두렵고 놀라게 한다. 아마도 2007년 아이폰 출시 이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적이 없는 거 같다. OpenAI CEO 샘 알트먼(Sam Altman)의 미스터리한 해고와 재고용은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획기적인 기술은 교회 사역과 신학 교육, 그리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좋은 방향이든 또는 나쁜 방향이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이는 이미 AI가 정보를 발견하고 정리하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젊은 세대를 따라잡으려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ChatGPT가 당신의 설교를 작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설교를 단지 데이터 전송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1. 이스라엘 군대와 민간인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이 예상치 못한 지원을 받았다.10월 7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공격의 규모와 파괴는 전 세계,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 정보부, 군 지도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진짜 큰 충격은 무고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까지 살해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하마스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하마스가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많은 하마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식민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당화가 수천 년 동안 경쟁을 벌여온 토지에 대해 명확성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약속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우리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다(시 122:6).원제: My Top 10 Theology Stories of 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임의의 작은 친절
by 전재훈
2023-12-18
예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 중에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짐 캐리가 주인공 브루스 놀란 역을 맡았습니다. 브루스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전능을 위탁받게 되면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지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전능은 반드시 전지를 수반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전지를 갖지 못하고 전능만을 가지고 있던 브루스로 인해 세상이 엉망이 되었거든요. 브루스 올마이티 후속으로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에반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노아처럼 방주를 짓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댐이 무너진 도시에서 에반이 지은 방주로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방주를 짓는 미치광이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던 에반의 아내가 휴게소에서 하나님과 나눈 이야기가 압권이었습니다.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시려 할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뿅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주실까요?”그녀는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방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남편을 돕습니다. 저는 이 대사 말고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임의의 작은 친절’이라고 했던 에반의 말에 하나님이 바닥에 ‘ark’라고 씁니다. 그렇습니다. 방주라는 뜻이지요. 이는 임의의 작은 친절(Act of Random Kindness)의 머리글자였습니다. 영화는 타인에게 이유 없이 베푸는 작은 친절이 세상을 바꾸는 노아의 방주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방주를 항상 심판으로만 이해했던 저에게는 홍수가 심판이고 방주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던 중에 베푸신 작은 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ark’에는 나무로 만든 상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방주와 언약궤를 모두 ‘ark’라고 하지요. 하지만 방주를 히브리어로는 ‘테바’라고 합니다. 테바는 방주뿐만 아니라 모세의 갈대 상자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만들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하셨지요. 모세의 갈대 상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이스라엘 사람의 남자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으로부터 모세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던 상자였습니다. 모세는 나일 강변에서 목욕하던 이집트 공주의 손에 건져져 후대에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가 되었지요.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를 상기시켜 줍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누가복음 2:10-12)이 말씀은 천사들이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실 때 했던 말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유는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대 상자와 같은 느낌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방주에 탔던 노아는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고,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스라엘로 태동시킨 인물이 되었지요. 그리고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반 올마이티의 대사처럼 방주가 세상을 바꾸는 임의의 작은 친절이었다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C. S. 루이스가 남긴 마지막 글: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
by Trevin Wax
2023-12-16
이전에 쓴 칼럼 둘(아메리칸드림은 저절로 불이 켜졌을까?와 자유와 한계, 행복에 대한 ‘권리’)에서 나는 아메리칸드림, 행복 추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자유를 살펴보았다. C. S. 루이스는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Saturday Evening Post에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라는 논평을 기고함으로써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영원한 법칙에 대한 순종과 ‘행복’의 분리라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성적인 행복’이라는 권리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행복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뿐 아니라, 결국에는 인류 문명의 본질까지 필연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 준다. 다음은 루이스의 글 전문이다. C. S. 루이스: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중요한 건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라고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A는 B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고 이혼했고, B도 A와 결혼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이혼했다. A와 B가 서로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또 건강이나 수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앞으로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 두 사람이 과거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했다. B의 경우에, 그녀는 한 때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전쟁에서 몸이 망가졌고, 그 결과 남자로서 능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직장까지 잃고 말았다.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삶은 애초에 B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불쌍한 건 A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외모가 망가졌다. 더불어서 한때 밝게 빛나던 활력도 없어졌다. 여러 번의 출산과 또 오랫동안 A를 간병하는 중에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고 A가 마치 단물 다 짜 먹은 마른 오렌지를 내다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녀의 자살은 그에게도 끔찍한 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젠가 직접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가 말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딱 한 번 오는 기회인데, 나는 그걸 놓칠 수 없었어.” ‘행복할 권리’라는 건 도대체 뭘까? 나는 그날 ‘행복할 권리’라는 말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그와 헤어졌다.얼핏 보면, 이 말은 마치 행운을 누릴 권리만큼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저런 도덕주의 학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관계없이, 행복이나 불행이란 건 인간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 행복할 권리라는 말은 내 키가 180이 넘는 권리, 백만장자를 아버지로 갖는 권리, 소풍 가는 날에는 항상 날씨가 좋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나는 사회의 법으로 보장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이 사회가 자유를 주기에, 나는 공공 도로를 사용해서 여행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로에 “공공”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이다. 나는 또한 권리(right)를 법이 보장하는 요구이자 그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지워지는 의무로도 이해한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백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 내게 백 달러를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A가 아내를 버리고 이웃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을 법이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밀히 말해서 A에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뿐이지, 거기에 무슨 행복이니 하는 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행복과 자연법물론 지금까지 말한 게 클레어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는 법적 권리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있다는 게 클레어의 말이었다. 즉, 클레어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로티우스, 후커, 로크의 스타일을 따르는 고전적 도덕주의자이다. 물론 그건 그녀가 자기 말을 곱씹었을 때 그렇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국가가 보장하는 법 뒤에 자연법이 있다고 믿고 있다.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모든 문명의 기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없다면, 국가의 실정법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된다. 판단할 기준이 없기에 비판도 할 수 없게 된다. 클레어의 격언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의 유래는 8월 선언(the august declaration)이다. 모든 문명인, 이건 특히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말로, 인간의 권리 중 하나가 아예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요점에 도달했다.8월 선언을 만든 사람들은 그럼 무슨 의미로 쓴 것일까? 자연법의 의미그들이 의미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고 싶더라도 살인, 강간, 강도, 반역, 사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아예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의미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법이 궁극적으로 승인하고 나아가서 국가의 법까지 승인하는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권리를 가지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식의, 격언의 원래 의미를 축소하는 동어반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역사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동어반복이 항상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은 아니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정치 원칙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 도전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 개혁 법안 이전의 영국, 그리고 부르봉 프랑스에 던져졌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수단이 누구에게나 합법적이어야 하며 특정 계층, 계급, 지위 또는 종교의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또 어느 당에서도 이 사실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세기였던 만큼, 이것을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러나 어떤 수단이 “합법적”인지, 즉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연법에 의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또는 특정 국가의 입법부에 의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나는 클레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제한의 “행복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적인’ 행복우선 나는 클레어가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건 아주 단순한 ‘성적인 행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클레어와 같은 여성들이 결코 다른 의미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클레어가 다른 종류의 “권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에 있어 다소 좌파적인 그녀이기에 만약에 누군가가 오로지 돈을 버는 데에서만 행복을 찾는 무자비한 살인마 재벌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크게 분개했을 것이다. 그녀는 또한 광적인 금주론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술에 취하면 행복하기에 알코올 중독자로 산다는 사람을 변명하는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다.클레어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 특히 여자 친구들은 말 옮기기 좋아하는 클레어의 귀를 틀어막으면 자신들의 행복이 눈에 띄게 커질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자, 클레어가 과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이론에 친구들의 이런 바람까지도 적용할까?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거다. 사실 클레어는 지난 40여년 동안 서구 세계 전체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진보 진영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거야? 다른 모든 충동을 다루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다루자고”라며 말하곤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들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들이 사실상 정반대의 의미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문명이 다루는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충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섹스 충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충동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인정한다. 자기 보호 본능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비겁함이라고 부른다. 다 가지고 싶은 충동은 탐욕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경계를 서는 보초라면 자고 싶은 충동도 참아야 한다. 그러나 목표가 오로지 “침대 위 벌거벗은 네 개의 발”로 바뀌는 순간, 모든 불친절과 믿음의 배신까지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것 같다. 이건 마치 과일을 훔치는 게 잘못된 일이지만, 그게 복숭아인 경우에는 괜찮다는 식의 이상한 도덕성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런 견해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의 정당성과 아름다움, 신성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성을 나쁜 무언가 또는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청교도의 편견을 품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혐의를 부인한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 황금의 아프로디테… 키프로스의 성모…. 나는 당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복숭아를 훔치는 소년을 반대한다고, 내가 복숭아 전부를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소년들 전부를 다? 내가 반대하는 건 단지 도둑질일 수도 있다.성적 충동과 터무니없는 특권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A에게 아내를 버릴 ‘권리’가 있는가를 일종의 ‘성도덕’에 관한 문제 중 하나로 간주함으로 실제 상황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과수원 강탈이 ‘과일 도덕’이라는 특별한 도덕에 대한 위반이 아니다. 이는 정직성에 대한 위반이다. A의 행동은 (엄숙한 약속에 대한) 선의, (깊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공통되는 인간성에 대한 위반이다.따라서 오늘날 성적 충동은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성적 동기가 포함되는 순간, 다른 경우에서라면 무자비하고 비열한 배신이며 불의하다고 비난받았을 모든 종류의 행동까지도 다 용인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섹스에 이런 식의 특권을 부여할 타당한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성 충동은 강하고 에로틱한 열정이라는 본질을 가진다. 이것은 일시적인 식욕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감정과는 달리 더 큰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욕망은 무슨 약속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게 대단한 건 아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또한 빈번한 황홀경 뿐만 아니라 안정되고 결실을 맺으며 뿌리 깊은 평생의 행복까지 얻을 것이라는 거의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이 경우에 모든 것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남은 인생을 헛되게 살 거 같은 위기감마저 느낀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랑의 약속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어른이 되면 성적인 열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친구들이 떠버리는 사랑에 대한 끝없는 허세 정도는 아주 쉽게 무시한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건 제외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이 지속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꼭 시작할 때 했던 약속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두 사람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은 건 그들이 꼭 훌륭한 연인이어서가 아니라, 좀 거칠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 통제하고, 신실하고, 공정하고, 상호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동의 모든 일반적인 규칙을 대체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적인) 행복에 대한 권리”를 확립한다면, 그건 평소의 경험이 그 사실을 증언해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 열정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것을 한 없이 소중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행동은 실제로 비참함과 타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행복이라는 대상은 여전히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A와 B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 년 정도 지나면 A가 옛 아내를 버렸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B를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또 인생의 전부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진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A가 자신을 향해서 느끼는 동정심은 그로 인해서 불행해질 여자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없기에 가능하다. 성적인 행복 위에 세워진 사회살펴볼 게 두 가지 더 남았다. 하나는 이것이다. 부부간 불륜이 용인되는 사회는 결국 여성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몇몇 남자들의 노래와 풍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보다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요가 만든 결과이다. 따라서 난잡한 행위가 만연한 곳에서 여자는 주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또한 가정의 행복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를 쉽게 사로잡았던 바로 그 특성, 여자의 아름다움은 성숙함을 지나면서 매년 감소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도록 만든 내적인 특성에 있어서는 그 어떤 감소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할 건, 남자의 외모에 관해서 여자는 단 십 원어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자비하고 난잡한 전쟁에서 여자는 이중의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아무리 더 높은 지분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여자는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점점 더 야박해지는 여자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는 도덕주의자를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두 번째로, ‘행복에 대한 권리’가 주로 성적 충동에 대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치명적인 원리라고 해도 일단 특정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건 조만간 우리 삶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 개인 뿐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모든 충동에까지도 백지 위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그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라는 부사를 덧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원제: C. S. Lewis’s Last Written Word: We Have No Right to Happ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일의 신학을 위한 좋은 출발
by 김선일
2023-12-15
세계 3대 전력회사 AES의 최고경영자였던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그 동안 모은 재산으로 겨자씨재단(Mustard Seed Foundation)을 세웠는데,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의 도시선교 지원, 그리스도인 인재 장학 지원, 그리고 일의 신학 프로그램 지원 등에 해마다 이삼백 만 달러를 기부해 왔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신학대학원에서도 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을 정식 교과목으로 개설하고 학생들의 등록금과 도서비를 보조해 주었다. 일주일간 집중 수업으로 개설된 이 과목에는 일의 신학과 리더십 연구로 특화된 미국의 기독교대학원인 바키대학원대학교(Bakke Graduate University)에서 강사를 파견한다. 전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의 신학 프로그램이 개설됐는데, 한국은 주로 신학교들이 지원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인들에게 목회자가 미치는 영향력이 높은 점을 감안할 때, 신학생 때부터 교인들의 주중 일터 생활에 대한 신학적 안목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일의 신학 수업에서 중요하게 보는 과제 하나가 일터의 그리스도인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업을 조율하던 나는 이 과제를 건전하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기업을 탐방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문의해서 그동안 알려진 그리스도인이 운영하는 기업들 외에 최근에 새롭게 떠오르는 주목할 만한 기업들 몇 곳을 알아 놨다. 주일성수와 정직한 납세 등으로 기독교적 모범을 보인 회사들뿐 아니라, 경영 그 자체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혁신과 창의성을 도모하는 기업들이었다. 학생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해당 기업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게 했다. 그렇게 학생들은 일터 그리스도인 인터뷰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했다. 미국에서 파견된 교수는 학생들의 모든 발표를 듣고 수고했다며 칭찬한 뒤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멀리 힘들게 탐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과제의 목적은 훌륭한 기독교 기업을 탐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전문인과 인터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학생 여러분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유명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친 그리스도인 전문인을 일부러 찾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에서 경비일 하시는 분이 교회에 다니신다면 그런 분이 좋은 인터뷰 대상자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교회 청년도 적합한 대상자고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과 신앙이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지, 교회와 목회자로부터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가입니다.” 꽤 참신한 그리스도인 기업들을 발굴해서 알게 해줬다며 나름 흡족했던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일의 신학을 구상하면서 모범적이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기업인들부터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인생의 문제와 해법을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습관에 익숙했던 것인가?’ 이 일을 겪은 뒤 일의 신학에 접근하는 내 관점은 변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찾아서 일터 사역의 실체를 제시하려던 방식을 재고해야 했다. 일의 신학은 우리의 일상과 멀찍이 떨어진, 선망할 만한 기독교적 사례를 찾는 작업이 아니다. 일의 신학은 우리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일’이라는 관점에서 관찰하지도, 성찰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일의 신학은 ‘일’이라고 내놓을 만한 정규직, 전문직, 혹은 기업경영에서 신앙의 모델을 찾는 것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씨름하는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나 자신 또한 수년 전부터 일의 신학을 신학교 교과목에 도입하고, 일터 사역의 필요성을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강조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통상 알려진 ‘일’의 개념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직업, 또는 일자리와 자연스럽게 연관시킨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은 곧 상대의 직업을 묻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도 급여를 받는 고정된 일자리여야 ‘일’을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은 자칫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 왔던 여성들, 그것도 전업주부이거나 경력 단절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아울러 일의 신학은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성년의 자녀들과도 접점이 약해 보인다. 일은 바깥 어딘가에서(out there)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몇몇 교회에서는 일터 사역을 하면서 일의 개념을 확장하여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상과 가정에서의 모든 일을 포함하였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업주부 여성들이 많은 봉사를 도맡아 왔다. 그러나 일터 사역은 전업주부나 미성년자들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제는 단순히 일터 사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의 신학을 더욱 근원적으로 성찰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 일의 신학을 일상과 가족의 차원에서 근본부터 다시 접근해야 한다. 일과 병행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 자녀 양육, 일상의 관계 등이 일의 신학을 위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급여를 받은 일이든 아니든, 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일과 더불어 살아간다. 살림살이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의 관계, 친구들을 사귀며 공동체를 이루는 일, 사람을 섬기는 각종 봉사활동,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취미로 식물을 재배하는 일 등 모두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향하여 의미 있게 에너지를 활용하는 일이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일이란 정신적, 혹은 육체적 에너지를 방출해서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개인의 성취를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261). 일의 유형이나 범위가 중요하지 않다. 일은 직업이나 기업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 일상에서 누구나 참여하고 경험하는 실체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올리고 일의 신학을 말하려면 전문직이나 기업경영에서 모범을 찾는 습관적 행태는 근대적이고, 엘리트적인 일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미래 사회로 나아갈수록 AI 같은 디지털 문명이 전통적 인간 노동을 급속도로 대치할 텐데, 그때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일을 주로 수익을 창출하는 직업이나 활동으로 국한하던 기존 인식에 변화는 불가피하다. 전통적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을 돌보며 공공선과 관계된 일들은 계속 늘어난다는 점을 주목한다(제러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 사회, 2019). 미래의 일은 재화나 용역을 통한 수익 창출 범위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 돌봄이나 공익적 활동으로 확대될 전망이 높다. 일의 신학을 모범적인 기독교 전문인이나 선한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기업을 발굴하려는 태도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일의 신학은 고도를 낮춰야 한다. 일의 신학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을 위한 신학이다. 인생 대부분을 교회와 학교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일의 신학은 엄중한 현실적 고민이자 과제다. 교회와 신학교에도 일터의 문화와 위계질서에 대한 고민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아와 살림만 해왔던 주부들에게도 일의 신학은 중요하다. 자녀들이 자기들의 전공을 선택하고 일을 찾아갈 때 일의 신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이웃들도 일을 하며, 일 가운데 살아간다. 일의 신학은 평범한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원래의 의도된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바울이 말한 몸의 가시가 무엇일까?
by Wyatt Graham
2023-12-14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누가 주었을까? 그리고 바울은 왜 가시를 자신을 괴롭히고 “교만하지 않게” 하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불렀을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이다.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이었나? 가시라는 단어는 은유적으로 바울의 몸에 박힌 막대기를 가리킨다. 가시라는 단어가 은유로 기능하기에 주석자들은 그 은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머레이 J. 해리스(Murray J. Harris)는 사람들이 흔히 바울의 가시를 식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요약한다(2 Corinthians, 532-3). 어떤 정신적 불안 장애로 보는 사람이 있고 또 사역의 대적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의 질병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주석자들은 갖가지 신체의 질병을 제시한다. 나는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 따른 부분적 실명이라는 주장까지 들은 적이 있다(참고. 갈 4:15). 한 가지 일반적인 견해는 바울이 분명하게 “슈퍼 사도들”을 자신의 적대자로 명명했기 때문에 가시가 그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Michael Gorman, Apostle, 386). 불안 장애는 사실 너무 추측성이 강하지만, 바울의 사역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따라서 가시는 불안 장애, 질병, 심지어 특정 상대를 나타낼 수 있다.다양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주석자들은 바울의 가시에 대해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꺼린다. 해리스의 결론이다. “정보의 부족 그리고 바울이 쓰는 언어의 모호함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에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533). 프레드릭 댄커(Frederick Danker)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바울의 가시는 “영원한 신비”라고 결론을 내린다(2 Corinthians, 193). 콜린 크루즈(Colin Kruse)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결정하기에는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한다(2 Corinthians, 266). 어느 정도 확실성을 가지고 바울의 가시를 식별할 수 없다는 데에는 현대 주석자들이 하나같이 동의한다. 바울은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기에 해석자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나는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는 가시를 직접적으로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식별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세 가지 추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바울에게 주었으며, 사탄의 사자/하수인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주었는가?바울은 한 구절에서 가시의 목적을 두 번이나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고후 12:7)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계시”를 받았고, 이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교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시를 누가 주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사탄이 바울의 교만을 꺾으려고 가시를 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친히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는 이유로 가시를 제거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말씀하셨다.그리고 해리스가 설명했듯이, 고린도후서 12:2, 4에서 수동 동사의 사용은 하나님을 가리킨다(2 Corinthians, 532). 마찬가지로, 바울이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고후 12:7)라고 말할 때, 그에게 가시를 주는 암묵적 주체는 하나님이다. 그럼 가시를 준 주체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사탄의 하수인은 무엇인가? 사자/하수인(messenger)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안젤로스(angelos)인데, 바로 여기서 천사(angel)라는 단어가 유래한다. 그리고 바울은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것을 “사탄의 사자/하수인”(a messenger of Satan)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탄이 보낸 천사가 바울의 가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 가시를 준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설명은 천사라는 단어가 (사자/하수인이 되기 위한) 영의 기능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근본적인 관찰을 하기 전까지는 이상하게 들린다(Isidore of Seville, Sententiae, I.10.1).모든 천사가 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이 다 사자 또는 하수인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고 가르친다. 또는 그레고리오 1세(Gregory the Great, AD 540-604)가 말했듯이,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특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령들이 자신의 공의를 집행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친다. 열왕기상 22장에서 선지자 미가야는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둘러싸여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환상을 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보좌에서 “누가 아합을 꾀어 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0).영 하나가 자원하고, 여호와께서는 그 영에게 어떤 방법으로 아합을 꾀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1-22). 이에 대해 영은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왕상 22:22)라고 대답한다.여호와께서 그 계획을 확증하신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왕상 22:22).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는 다음과 같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다.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왕상 22:23). 더 유명한 것은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사탄과의 대화에서 먼저 욥을 언급한 건 하나님이었다(욥 1:8). 그건 하나의 암시적인 도전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탄은 욥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난한다(욥 1:9-11).욥을 사탄과의 대화에 넣은 여호와는 사탄의 도전을 들으신 후, 그가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욥 1:12; 또 욥 2:6 참조).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용하셨지만, 욥은 그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욥 1:21). 욥은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가 언급한 것처럼 “주신 이가 여호와시요, 마귀가 빼앗는도다” (Psalm, §28)라고 말하지 않았다.마찬가지로 사무엘상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삼하 24:1)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을 격동시켜 그들을 치게” 하셨다. 그러나 역대상 21:1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 조사를 하게 한 주체가 여호와인가 아니면 사탄인가? 이 점에서 대답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들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도록 허락하신다.또한 시편 78:49에서 말하는 대로, 재앙이라는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파괴하는 천사들의 무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그분의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50). “파괴하는 천사들”이라는 문구는 “악한 천사들”(מַלְאֲכֵי רָעִי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헬라어 구약성서(ἀγγέλων πονηρῶν)와 라틴 벌게이트(angelos malos)도 그렇게 번역했다. 더욱이 세 가지 번역본(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자들을 보내신다고 말한다. 이 시편을 해설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 악한 세상에서는 악한 천사들을 통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최고의 공의는 악한 피조물이라도 선용하신다”(Psalm, §28)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이러한 성경 배경으로 볼 때, 사탄의 천사는 사자, 하수인(문자 그대로는 천사의 의미)의 역할이나 직무를 맡은 악령을 가리키는 것 같다.그 사자/하수인은 악한 영이다사탄의 천사나 사자/하수인은 사탄에게 속한 악한 영이며, 하나님은 미가야의 환상에서처럼 악령을 보내시기도 하고, 또 사탄이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 것과 같은 역할도 맡기신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사탄을 사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도록 선동함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셨다. 또는 시편 78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출애굽기의 재앙 동안 하나님은 악한 천사들을 통해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49-50).욥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고후 12:8).지금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시고(시 119:68), 악한 영들은 2차 인과율 수준에서 자유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고 확증하는 게 기독교 신학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러한 악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록 악령들이 자신의 악의적인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분의 결정과 재량에 복종한다”(2.20.38).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나는 요점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사탄의 영, 즉 악한 영을 통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어떻게? 정기적으로 우리의 육신에 고통을 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악마의 방식 그대로이다. 가시는 바울의 몸에 있는 사탄의 유혹과 관련이 있다바울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나는 이 말을 바울의 몸 속에 있는 악한 영이 그를 괴롭힌다는 뜻으로 직설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에 관해 말할 때 바울은 몸 안에는 욕망과 정욕, 곧 죄를 짓게 하는 것들이 있음을 명확하게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육체와 그 정욕과 욕심”에 대해 말한다.그리스도인은 쉬지 않고 이러한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롬 7:14)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품고 있다. 바울은 인격과 육체를 의미하는 자신의 “지체” 안에서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스스로를 “내 지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에 사로잡힌 자”(롬 7:23)라고 말한다. 바울이 직면한 이 싸움, 우리 모두가 영광 앞에서 직면하는 이 싸움은 그로 하여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또한 “육신 안에” 살고 있으며 “죄의 정욕”을 갖고 있다(롬 7:5). 바울도 말했듯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기”(갈 5:17) 때문에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정욕과 욕망은 육신 안에 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다가오는가? 몸이 금지된 욕망으로 유혹을 받거나, 또는 방종에 가까운 식욕으로 폭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육체에 뿌리를 둔 열정과 욕망이 뜻대로 활개를 펼치도록 고삐를 푸는 것이다. 흔히 그렇듯이, 과거의 신학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지금 다루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세비야의 이시도르(AD 560-636)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육체의 욕망 및 정욕과 연관시켜 그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사탄의 사자가 일으킨 도발로 인해서 바울에게 임한 육체의 자극(참조, 고후 12:7)은 인간의 몸이라는 지체 속 죄의 법에서 나온 것이다(참조, 롬 7:19-23). 왜냐하면 그건 음란한 욕망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 안에 거하면서 저항하는 이런 충동을 쫓아낼 때, 그는 온전해지고 비로소 음란한 기쁨이라는 약점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싸움을 싸웠다는 미덕을 받는다(참조, 고후 12:9)”(Sententiae, II.39.11).이시도르의 요점은 사탄의 사자가 시각, 후각, 그리고 촉각 등 신체의 감각을 통해 바울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정욕은 육신에 있다. 마귀는 육체의 감각과 욕망을 통해 사람을 유혹한다. 비록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어떤 식으로 공격했는지에 관해서 이시도르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그는 다름 아니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가시라고 결론지었다.결론바울은 몸의 가시를 자신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사탄이 보낸 사자/하수인임을 밝혔다. 나는 이 가시가 육체적인 질병이나 불안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기에는 몸 안에서, 즉 육체의 욕망을 통해 바울을 유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령이 포함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련은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를 겸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에 있는 슈퍼 사도들이 전체 그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더 오래된 기독교 주석가인 세비야의 이시도르의 해석처럼,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바울을 유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이 악령의 공격으로 인해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게 되었다. 권력과 명성에 대한 바울의 욕망, 즉 그의 교만은 가시, 즉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악용하려는 특별한 욕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시는 육체를 입고 있는 사탄의 사자/하수인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바울이 육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악령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성경 말씀을 고려하면, 우리는 바울이 겪은 어려움을 어느 정도 종합할 수 있다. 악한 영이 그의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끝끝내 저항했다.이러한 연약함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악한 목적으로 사탄이 심은 몸의 가시가 예수님을 통해서 선이 되었다. 약함을 통해 바울은 강해졌다. 우리도 약함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로 강해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가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원제: What was Paul’s Thorn in the Fles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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