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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세월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다
by Russell Moore
2020-11-06
얼마 전 C. S. 루이스(C. S. Lewis)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 출판된 지 70주년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앞으로 다가올 세대에 대해서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묻기에 아주 적절한 때를 만난 셈이다. 우리가 때때로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루이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순한 대뇌 네트워크나 변연계로 이뤄진 존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표지판(signposts)을 찾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논리적 이유나 실용적인 지혜 또는 계몽된 자기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을 다루고 있다. 바로 사자의 포효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력을 통해 그 느낌을 알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기도 하다. 기독교 변증론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면 나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서구 사람들이 거의 항상 일등으로 꼽는 책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이다. 턱을 쓰다듬으며 이런 현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글쎄, 사실은 말이야”라며 반론을 제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나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진리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 아니다. 물론 그 책 속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야말로 실로 긴 시간동안 아이를 공격하는 독수리와 같은 많은 비판을 견뎌온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많은 사람들에게 순전한 기독교가 아직까지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그 책이 활자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종교가 가진 냉소주의와는 달리 우리에게 정치적 의제나 종교 제품을 판매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증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되신 분에 대한 증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론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흔들리는 기독교인을 다시 확신 속에 거하게 하는 루이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옥스포드에서 받은 고전 연구가로서의 훈련이 아니라, 아이들을 작은 방과 가로등 기둥을 지나 나니아 왕국의 수도인 케어 페러벨(Cair Paravel)과 그 너머로 인도했던 경험이다. 오늘날 생존하는 가장 존경받는 판타지 작가인 닐 게이먼(Neil Gaiman)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루이스가 “숨겨놓은 정통 기독교에 관한 의제”에 관해서 배우고 싶었던 흔들림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루이스의 작품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품이 루이스가 창조한 마법의 세계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니아 관련한 책들이 주는 이상한 점의 대부분은 마치 그 책 속 이야기가 사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실제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기록된 보고서 같이 느껴진다.”나니아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판타지 장르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루이스의 동료 잉클린(Inklings)조차도 J.R.R. 톨킨(J.R.R. Tolkien)의 작품에 나오는 중간계와 같이 신중하게 구성된 창작물과 비교할 때, 나니아는 루시가 옷장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 및 그 이상과 합쳐진 유대와 기독교 우주론은 아예 산타클로스(Father Christmas)로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니아는 대중문화에서 70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나니아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인생 전체를 함께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겉보기에 혼란스럽고 황당한 신화가 주는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 우주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우주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아마도 “암흑 물질”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짜 장소”라는 게 항상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이상한 우주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기쁨에 놀라다나니아의 기이함, 차와 벽난로 등의 친숙함으로 표현되는 기이함은 여전히 이 책을 매력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현대주의자(modernist)든 또는 근본주의자든 간에,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은 학문적 합리주의나 문명적 헤게모니 또는 좌파, 우파 또는 중도의 정치적 이념 등을 활용해서 무엇보다 기독교를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데에 치중했다. 그러나 나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루이스는 그가 살았던 세대에게 있어서 복음을 받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복음이 너무 신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너무도 친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다의 사자(The Lion of Judah)는 어느새 잘 길들인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성경 속의 서사는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서 어느 존경받는 문화의 대본책과 구분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는 그런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도 듣지 않게 되었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상상의 세계로 던져서 주일학교 스테인드글라스 속 이미지를 다 벗겨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가진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용을 피해서 진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은 사람도 갈기가 다 깎인 채 스톤 테이블에서 죽은 아슬란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에드먼드를 미워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실상 그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달달한 터키 과자 로쿰(Turkish Delight)에 중독된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과 같은, 에드먼드에 대한 아슬란의 말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긴 은혜 때문에 우리는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여기에 당신의 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걸까?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슬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녀의 마법이 약해지고 있습니다.”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양심을 보호하고 또한 직관을 형성한다. 뉴스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소식은 필터링해서 제거함으로 나 자신의 이성을 “조작(spin)”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호하던 안전 장소를 벗어날 때 우리는 기쁨에 놀라게 된다. 나단 선지자가 어린 암컷 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다윗과 이성적인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다윗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감정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랬기에 다윗은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각종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용서는 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진리를 정형화하거나 또는 도덕적 적용으로 요약하는 대신 “한 남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이야기가 펼치는 더 깊은 수준의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단순히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하다”라는 말을 하는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접붙여진 가지도 살아있는데, 하물며 뿌리가 죽겠느냐?”나니아 기독교인스톤 테이블은 십자가, 하얀 마녀는 악마, 마술사의 조카는 창세기처럼, 나니아 연대기가 단지 해독(decode)할 게 많은 우화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지속되는 게 아니다. 나니아가 아직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진짜를 느끼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나니아 이야기가 아직까지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겨울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정신의 눈이 녹기 시작하고 성령의 바람이 그가 뜻하는 곳에서 불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세속화 시대에 나니아처럼 새로운 시작을 출발하기에 좋은 장소도 없다. 하지만 물론 이 70년이나 된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 루이스는 아이들에게 여분의 방은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포털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 경로로 다시 나니아에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거기로 가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에 도달하는 건 당신이 의도적으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나름 장수했다고 성경이 인정하는 나이가 70세이다. 우리는 이야기꾼 루이스로부터 배운 복음,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그 복음을 더 깊이 고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또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스크루테이프 세계(Screwtape world)에서 나니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hronicles of Narnia Still Grips Our Imagination, 70 Years Later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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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과 결혼, 죽음 그리고 설교
by 고상섭
2020-11-05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변증적 설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변증적 설교의 예를 (10월 13일 변증적 설교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살펴보았고, 이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팀 켈러 목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단순히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 안에서 발견한 성경적 명령을, 인간은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주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패턴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한다. 그의 최근 저서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어떻게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고 적용하는지를 예를 살펴보자. 1. 태어남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현대인들은 자녀를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희생하고 싶지 않은 오늘날의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양육하는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5)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양육하는 기쁨이 있지만 또한 마음에 칼이 찔리는 듯한 아픔도 경험한다는 말이다. 부모가 마음의 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녀의 새 생명으로 세상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생명을 양육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희생의 모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실제로 못과 가시에 찔리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르셨다. 이것이 기독교가 부모들에게 주는 위대한 자원이다(‘태어남에 관하여’ 44쪽). 결국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은 복음의 은혜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부모마저도 자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를 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 안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희생하지 않은 문화 속에서, 복음은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 은혜로 내 삶의 정체성을 삼고, 그 은혜로 사람들에게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2.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오늘날 결혼에 대한 두 가지 오해는 결혼자체를 자신의 구원으로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과 결혼을 통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큰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멸이다. 순진무구한 연애 감정에 젖어서 배우자를 맹목적으로 받들어 모셔도 안되지만, 한편으로 너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고역이라고 분노해서도 안된다. 배우자를 우상으로 삼는 것도 위험하고, 배우자를 환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은 결혼관이다.이 두 가지 오해를 피하려면 복음으로 결혼을 재조정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묘사한다. 배우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인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또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소유하고 있던 남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 오시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부정한 배우자를 사랑하기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는 최악의 배우자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대속적 희생을 통해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악의 문제를 대신지시고 해결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너는 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예수님은 자기 땅에 왔지만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까다로운 배우자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는 최고의 배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계속 나를 덮어 주시며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받은 사랑이 족하기에 나도 당신에게 똑같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배신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인을 은혜로 품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이 우상이 되는 것을 막는 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배우자임을 인식하는 것이고 또한 불행한 결혼생활의 해답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결혼에 관하여’ 69~75쪽)3. 죽음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경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고 말한다. 즉 소망가운데 슬퍼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잘못된 침입자임을 말해준다.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인데 인간의 타락이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자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만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죽은 소녀에게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얘야, 일어날 시간이다.”라고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이다.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를 깨우는 어머니의 음성과 같다. 예수님은 죽음 저편에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손을 잡으면, 네가 믿음 안에서 나를 알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도 간밤에 단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내 손을 붙들고 있다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그러니 안심하라” 죽음 앞에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실수는 너무 죽음을 크게 생각해서 슬퍼하기만 하거나, 죽음을 너무 작게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유익하지 않다. 성경은 소망 가운데 슬퍼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이다. 조지 허버트의 말처럼 “죽음은 한 때 사형집행인이었으나 복음 앞에서 한낱 정원사로 전락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모든 눈물을 다 씻어질 것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일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의 해답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죽음에 관하여’ 54~58쪽).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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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일
2020-11-04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는 일반교회와 가정교회(6~12명의 소그룹으로 매주 모여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의 교제를 했는지에 대한 비교 항목이 나온다. 일반교회는 카톡/문자(65%), 온라인 교제(41%), 전화 통화(37%)가 가장 많았던 반면, 가정 교회는 카톡/문자(62%)와 전화 통화(39%)는 일반교회와 비슷한 반면, 온라인 교제는 62%로 훨씬 높게 나왔다. 주목을 끄는 점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대면 모임(일대일 만남, 작은 소그룹 등)에 있어서 가정교회는 68%의 경험을 한 반면, 일반교회의 25%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전체적으로 방역조치로 인한 제한적 상황에서도 소모임 형태의 가정교회는 일반교회보다 한층 다양한 방식으로 교제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코로나 상황에서 가정교회 성도가 일반교회 성도보다 더 활발한 경건생활을 하였으며, 헌금 감소의 타격도 가정교회가 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지난 글에서도 주장했지만, 필자는 앞으로 사람들의 관계와 공동체 유형은 더욱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작은 모임이 될 것이라고 본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방역 통제가 가능한 규모여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단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인간관계를 맺는 규모에 있어서 이전보다 개인적이고, 의미 있는 소수로 좁혀지고 있다. 엠브레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무의미한 관계의 확장 및 유지보다 소수의 ‘친밀한 관계’에만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결과가 나왔다(Trendmonitor 2020년 9월 24일자 리포트). 새로운 관계를 많이 만드는 오지라퍼가 되기보다는 가족과 친구 중심의 관계에 더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서적 변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다 짜놓은 소그룹에, 잘 모르고 편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어색한 공동체 관계를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를 당연시 여기고 무조건 용인만 해줄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낯선 자를 환대하며(신 10:19, 눅 10:25-37) 선한 이웃이 될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나 선교 사역은 사람들이 있는 현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있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맞는 접촉을 하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의 비전을 갖고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소모임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들은 원래 초기 교회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당시 로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5절) 외에도 아리스도블로의 권속(10절, 나깃수의 가족(11절), 아순그리스도와 불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마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14),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15) 등의 4개의 공동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모두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 속한 모임들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로마 내에서 간헐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신앙의 연결은 가지면서도 평소에는 따로 모였던 모임일 것으로 추측한다(로버트 뱅크스의 ‘바울의 공동체 사상’, IVP, 72-74쪽). 이는 바울이 로마서 16장 7절에서 단일한 교회를 언급하지 않고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는 표현을 쓰거나, “너희가 거룩하게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며 서로의 교제를 권하는 것에도 암시된다. 위와 같은 모임과 관계의 소규모화에 비추어 흥미로운 기독교 사역의 형태는 ‘마이크로처치’(microchurch) 현상이다. 마이크로처치는 공식적이거나 제도적인 교회가 아닌, 일상의 작은 만남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신앙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서로 공감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족, 이웃, 공통적 삶의 이슈, 관심사 등을 토대로 5명 내외의 (예수님 말씀처럼 2~3명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정기적 교제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초 소규모라고 해서 반드시 그 한계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모임이 분화될 것인지는 구성원들이 의논해서 결정하면 된다. 미국 플로리다주 템파(Tampa, Florida)에 위치한 언더그러운드(Underground) 교회는 200개 이상의 마이크로처치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그 안에는 지역에서 이웃과 만나는 모임부터, 선생님들의 모임, 간호사들의 모임, 싱글맘 모임, 대학생들의 모임과 같은 다양한 마이크로처치들이 있다. 필리핀과 미얀마의 마이크로처치들도 이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중앙 통제적이고 집중적인 교회 구조가 아니라, 허브(Hub)라고 불리는 ‘코워킹’(co-working) 공유 공간만 있을 뿐이다. 중앙에서부터 소모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소모임들이 공동의 신앙고백과 사명으로 확장되어가는 형태다. 또한 워싱턴주 타코마(Tacoma, Washington)에서 시작된 소마(Soma) 운동 또한 마이크로처치들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소마는 마이크로처치라는 용어가 아니라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ies)를 사용하지만, 그 사역의 유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웃 생활 공동체, 공립학교 교사 공동체, 시니어 공동체, 이슬람 선교 공동체 등 수백 여 개의 마이크로처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는 주로 주중에 선교적 공동체 모임을 갖고 주일에는 연합 예배를 드리곤 한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 뿐 아니라 그들의 사명이 주중 선교적 공동체 모임에 있다.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 선교 운동인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s of the Church)은 파이오니아(Pioneer)라 불리는 사역자들을 훈련하고 양성한다. 파이오니아는 제일 먼저 1)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2)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2) 정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3)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 4) 교회로 발전하는 계획을 실행하게 한다. 이 운동은 지난 10년 이상의 실험적 사역을 통해 영국에서는 가장 건강하고 거의 유일하게 실질적인 전도와 교회성장을 이루고 있다.마이크로처치는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선진화된 사역의 모델인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우리의 현장에서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수 있다. 판교에 있는 심플교회는 약 10년 전 한 평신도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 집사 부부로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지인을 위로하고 영적으로 도와주었는데, 그 지인이 다른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을 소개하면서 규칙적인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합류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정례화되자, 모임의 리더는 신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주일 교회로 발전하였다. 이제는 신앙 공동체와 기독교 대안학교 사역을 겸하는 모범적인 교회로 자립하였다. 꼭 마이크로처치로서의 정체성을 갖거나, 위 사례들의 궤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힌트는 미래의 교회 및 선교 사역이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가족, 이웃, 관심사, 취미 등이 의미 있는 신앙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뜻밖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근래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불안과 탄식이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눅 10;2)라고 하셨건만, 우리는 ‘추수할 것은 적고 일꾼은 많다’고 탄식하는 현실이 아닌가. 우리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 일상에 관심을 갖고 돌아보면, 많은 잠재력 있는 관계들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진실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갈구하는 심령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신 선교명령은 때로 ‘멀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그리고 더욱 깊이’ 가야 할 과제일 수 있다. 임박한 마이크로처치 현상은 그와 같은 가능성과 소명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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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특별한 다섯 가지 이유
by Tim Keller
2020-11-03
초기 3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종교 집단들보다도 가장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황제를 숭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편협하며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들로 비춰졌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일터나 영향권에서 불쾌하게 인식되거나 배제되어 때로는 죽음까지 처하게 된다면, 왜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을까? 래리 허타도 (Larry Hurtado) 는 두 책 ‘이 땅의 어떤 이들은 왜 초기 3세기에 기독교인이 되려고 했을까?’(Why on Earth Did Anyone Become a Christian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와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라는 책에서 이 질문을 다루고 있다. 허타도는 주된 이유로 기독교 교회는 독특한 “사회 프로젝트” 였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대조적인 공동체였고, 도발적이면서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끄는 반문화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기독교 공동체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을까?새로운 정체성허타도는 이토록 특이한 사회 프로젝트의 저변에는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종교적 정체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 이전에는 눈에 띄는 “종교적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민족 혹은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도시, 부족, 혹은 국가의 출신이라면, 당신은 그 도시와 부족과 국민들의 신들을 예배 했을 것이다. 즉 종교란 기본적으로 한 개인에게 할당되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최초로 인간의 사상에 자신의 인종이나 사회 지위를 막론하고 개인이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기독교는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한 개인의 새롭고 본질적인 정체성이 된다는 것을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반면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종, 지위나 성별을 없앨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대신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자신을 두번째 위치로 강등시켰다. 로마 사회에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이러한 주장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혹은 높은 신분으로 태어났건 어떤 인종이나 국적으로 태어났건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갈 3:26–29). 이는 로마 사회의 견고한 사회 구조와 조직에 급격한 도전이 되었고 그것에서 최소한 다섯가지의 독특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1. 초대교회는 다민족 이었으며 놀랍게도 민족의 장벽을 넘어 연합을 경험했다 안디옥 교회의 리더십에 대한 설명을 하나의 예로 볼 수 있다 (행 13).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놀랄만한 연합을 볼 수 있다. 에베소서 2장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복음의 열매로서 민족적 화해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2. 초대교회는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였다이미 언급했듯이, 기독교인들은 배타적이었고 비판을 받았고 그들은 또한 핍박을 받고 옥살이를 했으며 매맞음과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인들은 용서와 대적들을 향해 복수를 그칠 것을 가르쳤다. 복수를 염두해 둔 수치심과 명예의 문화 속에서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대적들을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았고 폭력으로 되 갚지도 않았다. 3.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환대로 유명해졌다한 가족이나 부족의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무차별적인” 도움은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심지어 다른 민족들이나 종교에 있는 사람들까지 도와 주었고 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게리 펀그렌(Gary Ferngren)의 에세이 ‘성육신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자선활동’(The Incarnation and Early Christian Philanthropy)를 보라). 도시에 전염병이 생겼을 때, 기독교인들의 특징은 살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계속 남아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며 공동체에서 병으로 아파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봐주었다.4. 초대교회는 삶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공동체였다이는 단순히 기독교인들은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태는 위험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 보편적인 일들은 “유아 노출” (Infant exposure)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원치 않는 신생아들은 말그대로 쓰레기더미에 버려져서, 죽거나 혹은 노예나 매춘으로 상인들에게 팔려갔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유아들을 구해주고 데려갔다. 5. 초대교회는 성적으로 반문화적이었다로마 문화는 사회 지위를 지닌 결혼한 여성은 혼외 성관계를 삼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남성의 경우 (심지어 결혼한 남성도) 지위의 높낮이에서 낮은 계층에 있는 노예, 매춘부 그리고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로마 문화의 성은 언제나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 성은 주로 참을 수 없는 육체적 정욕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성적 기준은 달랐다. 교회는 이성간 결혼 외의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성이 가지고 있는 “더 심오한 논리”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더 오래되고 겉으로 보기에 더 “자유로워 보이는” 이교도의 성적 관습들은 결국 더 엄격한 기독교 규범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들은 성을 단순히 정욕으로만 보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 연합되는 방법으로써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되 성과 사회적 지위의 이중 잣대를 거부하는 평등주의 자들이었다. 마침내 기독교는 성적 자기 통제를 인간 자유의 실현으로 바라 보았고, 이는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욕망이나 숙명 따위에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수치심에서 죄까지: 후기 고대 사회에서 성윤리의 기독교적 변화’ [From Shame to Sin: The Christian Transformation of Sexual Morality in Late Antiquity]를 보라).사랑의 도전초대 교회는 주변 문화와 어우러지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그들을 도전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결국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만일 오늘날 이와 동일한 사회 프로젝트가 시행된다면, 그때와 비슷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features that made the early church unique번역: 정진호
역사
초대교회
정체성
존엄성
환대
래리허타도
반문화
성윤리
공동체
수치심
그리스도의 못자국은 영원하다
by David Mathis
2020-11-02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소중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죽으셨을 때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셨다. 하지만 그 몸은 다시 살아난 부활체였을 뿐 아니라 변화된 몸이었다. 여전히 사람의 몸이었으나 영광스럽게 된 몸이었다. 썩을 것으로 심었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고전 15:42). 닫힌 문과 벽도 통과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요 20:26) 생선 같은 음식도 드실 수 있었다(눅 24:42). 갈보리에서 죽임을 당한 그의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고전 15:44). 완전히 새롭게 된 그의 몸이었기에 그와 가장 가깝던 이들조차도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 27; 요 20:14; 21:4). 하지만 머지않아 그가 실로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눅 24:31; 요 20:16, 20; 21:7).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멋진 사실 중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그의 못자국에 대한 것이다.내 손을 보라부활 후 변화된 몸을 입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예수님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줄 때 예수님은 주로 그의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 라고 기록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눅 24:39–40)사도 요한도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요 20:20) 라고 기록한다. 요한은 곧이어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라고 쓰면서 도마의 의심에 대해 묘사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겠노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여드레를 기다리신 후에 도마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마침내 다시 찾아오셨을 때 도마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못자국 속의 보화누가나 요한이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의 부활체에 못자국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의 완전케 된, 새로운 차원의 육신에 못자국이 있다는 것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사실, 처음에는 못자국이라는 것이 어떤 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는 썩어질 몸이었으나 부활 후에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개선되었기에, 이 땅에서 당한 고난의 흔적이 부활체에서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그의 아들의 영원히 영광스럽게 된 몸에서 못자국을 없애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라 지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못자국을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피부가 큰 상처로부터 회복된 후에는 흉터가 남도록 만드셨다. 어떤 흉터는 별 의미 없는 것일 수 있으나 어떤 흉터에는 얽힌 사연이 많을 수 있다. 어떤 상처였느냐에 따라 그 상처가 남긴 흉터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도 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누가와 요한 모두 예수님의 부활체의 못자국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한다는 것은 그의 못자국이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라는 뜻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영광스럽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담긴 우리가 영원히 누릴 보화는 무엇일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라먼저, 예수님의 못자국은 그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그는 완전히 인간이 되신 분이고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히 2:17)을 경험하심으로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못자국은 그가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자요 시인이었던 에드워드 쉴리토(Edward Shillito, 1872–1948)는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했으나 인간이 겪는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 “못자국을 지니신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도 고요한 하늘은 우리를 무섭게 하고온 우주에 우리 쉴 곳은 없네상처가 쓰라릴 때 나의 위로는 어디에 있나?못자국 지닌 예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셨으므로 그의 못자국은 자신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찬송가 작가인 매튜 브릿지스(Matthew Bridges)는 못자국에서 그 사랑을 보았기에 1851년에 쓴 찬송시를 통해 “사랑의 주님”께 면류관을 드렸다.‘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나네’죽임 당하신 어린 양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못자국은 이제는 아문 상처이고, 그 못자국은 예수님의 최종적 승리를 우리에게 영원히 선포한다. 요한계시록은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는데, 우리의 구주, 즉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중앙에 서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다(계 7:9–10, 17; 22:1, 3).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부터 시작하여 모두 스물여덟 차례에 걸쳐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다. 천국에서 찬송하는 천사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선포한다. 또한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계 13:8 및 21:27)으로 묘사된다.그의 고난과 그가 흘리신 피를 결코 잊지 않는 그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못자국을 지닌 양, 그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어린 양으로 영원히 송축한다(계 7:14). 또한 그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여전히 선명한 못자국을 통해 흘려진 피로 우리의 대적을 이긴다(계 12:11).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못자국을 보며 영원히 그를 경배할 것이다. 그의 못자국은 구속된 이들의 눈에는 결코 수치가 아니다. 이는 구원 받은 죄인들을 위한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is Scars Will Never Fade: The Wounds Christ Took to Heaven번역: 이정훈
복음
부활
보화
어린양
도마
매튜브릿지스
부활체
사도요한
면류관
요한계시록
섭리 아래 사는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
by 이승구
2020-11-01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소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그 정확한 함의를 다 생각하지 않고 섭리에 대해서 말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섭리에 대해서 말할 때 먼저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빠져 들어 갈 수 있는 잘못된 태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피하면서 바르게 생각하고, 그런 바른 생각에 따라서 참으로 섭리 아래서 사는 성도들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라서 우리들도 먼저 섭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의 있을 수 있는 잘못된 말과 태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섭리를 대하는 잘못된 태도들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니 하나님이 죄를 만든 분이라고 단선적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일을 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다”(the author of sin)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자신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하나님은 죄를 비롯해 모든 것을 다 만드신 분임을 강조해야만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거의 결정론이나 운명론과 비슷한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외국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어서 항상 사람들을 많이 오도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잘못된 태도를 지닌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즉, 불신의 모습으로 가든지, 결정론적 입장에로 가든지), 이런 생각은 생각이 너무 단선적이다. 이런 입장을 가지는 분들은 타락도 결국은 인간을 구원하는 선한 결과를 낳았으니 그것이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하면서 타락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었다는 함의를 전하려고 한다. 소위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Calvinism)들이 여기에 속한다(‘코넬리우스 반틸’, 2007, 98-103쪽).섭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잘못 생각하는 또 다른 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들이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소위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결국 이상한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입장의 궁극적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 있고, 심지어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다가 사람들의 저항을 얻게 되는데, 이를 피한다고 하면서 결국 하나님도 전지적 관점을 가질 수 없는 분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이 겸손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계시한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떤 것은 알지 않기로 하셨고, 결정하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말하는 소위 ‘열려진 유신론’, ‘개방된 유신론’(Open Theism)도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 이웃의 신학들’, 2014, 141-151쪽).섭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이런 잘못된 생각의 태도에 반(反)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누구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며, 죄를 일으킨 분이라는 혐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해 왔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의 발생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후대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이런 악한 일을 만드신 분이거나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일으키신 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적하는 사탄과 그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악한 사람들이 불의하고 공정하지 않게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잘 하시고 정의롭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크고 우리들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들로서는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여 모든 것을 다 묘사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들도 선으로 변용시켜서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신다고 하나님을 무한히 믿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태도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는 것을 참으로 믿고 그것을 모든 정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악한 일들과 도덕적인 악인 죄가 발생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옳다고 하거나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저 우리들은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지만, 이 모든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모든 뜻을 다 온전히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말하는” 것이다(Paul Helm, 이승구 역, 하나님의 섭리, 2004).이런 태도는 결국 우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탐구하여 모든 설명을 다 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모한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1)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히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우리의 생각의 한계, 정당한 이성의 작용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2) 하나님께서 파악하라고 한 것까지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3)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하는 기능인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의 한 측면이 드러난다.이것은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한 “이성 비판”, 즉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함” 이상의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칸트주의자들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는 마치 이성이 주권자이며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하여서 그 한계 내에서는 겸손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종교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구속 종교를 피하려고 하면서 그저 도덕 종교로 기독교를 변용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제대로 하면 오히려 이성이 “신앙의 한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 이성이 제대로 작용할 때 드러나는 또 다른 측면은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잘 정리하는 도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이성의 “도구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Cornelius Van Til, ‘개혁주의 조직신학 서론’ 1995).이 두 측면이 “신앙하는 이성”, 소위 “중생한 이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야말로 섭리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신 것만을 배우고, 그 한계를 넘어 가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감취어진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존숭의 태도로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는 이렇게 하나님만을 높이고 겸손히 그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 포함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생각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며 겸손히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족하는 것이다. 섭리를 생각하며,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간다.여기서 나름대로 섭리를 강조하며 자연의 이법(理法)에 순응하면서 살 것을 권하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같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들과 성경적 섭리를 말하며 믿는 진정한 섭리론자들을 근본적 차이가 드러난다. 물론 근본적으로 섭리를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인격을 가진 분이냐 아니면 무인격적인 자연의 이법이냐 하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그 자명한 것 이상으로 “섭리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참으로 겸손하게 생각하고, 사는 일에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으로 만족한다.우리 상황에 적용하며다시 한 번 자문해 보자. 우리에게 코로나19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이라도 불평이 있다면 우리들은 바르게 생각하며 느끼고 사는 것, 즉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모든 사태를 스스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오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겸손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려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복잡한 상황의 한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에게서만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며, 우리에게 해결의 열쇠가 없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사태는 타락한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는 그야 말로 “출구가 없음”(no exit!)을 잘 드러내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타락한 우리의 삶 자체는 그야말로 닫혀진 세계(closed world)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이 세상이 문제를 해결하고 열려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이런 죄와 악들의 생성자가 아니시며 이런 죄와 악들을 조성하신 분이 아니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통제 하에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들을 선으로 변하게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각도 겸손하게 하고, 살 때도 참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존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여기 먼저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모든 정황 가운데서 그렇게 할 수 있기 원한다. 그리고 아직도 믿지 않는 분들이 우리 모두 살 수 있는 이 유일한 길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청유한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만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가장 바르게 나아가는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No other way!). 구원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참으로 그를 그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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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아름답게 하는 질문 여덟 가지
by Bobby Jamieson
2020-10-31
당신이 지금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어떤 주제와 관련하여 같은 교회 교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음식과 환경 윤리 사이의 관계, 얼마 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 법관이 다가올 대선 투표에 미칠 영향, 이번 가을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지에 대한 문제 등등.어떻게 해야 이런 쉽지 않은 대화를 잘 할 수 있을까? 대화 전과 대화 중에도, 그리고 그 대화를 끝내고도 내가 중점을 뒤야 할 핵심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여기 고려해야 할 여덟 개의 질문이 있다. 1. 이 주제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가?로마서 14장에는 음식과 관련해 과거의 관습에 여전히 매여있는 사람들과 또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주는 바울의 메시지가 나온다. 바울은 물론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훨씬 더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뭘 먹느냐 안 먹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사실상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바울은 양 쪽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 후, 거기에 따른 합당한 방식으로 대화와 행동의 틀을 잡도록 요청했다.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게 복음의 문제까지 관련시킬 정도로 중요한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를 가지고 내가 행여나 복음의 중요성이 달린 것처럼 너무 심각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누가 봐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희석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게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2. 내 입장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가?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얼마나 확신하는가? 당신이 판단의 근거로 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 증거 중 몇 개가 과연 성경 안에 있고 또 몇 개가 성경 밖에서 찾은 것인가? 증거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얼마나 포괄적인가? 당신이 가진 증거와 관련해 당신만큼 또는 당신 이상으로 연구한 사람들 중 당신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지금 다루는 주제에 관해 확신하고 있는가? 믿음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배타성에 대해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이란 불의를 바로잡는 데에 필요한 수단에 대해 확신하는가? 첫 번째 단계는 신념의 종류에 따라서 확신의 단계(levels of certainty)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류에 따라 틀렸다고 판명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있고,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더 쉽게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커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해 가진 확고함과는 달리 당신의 입장이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3. 상식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얼마든지 반대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서로를 단지 형제자매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합리적 사고 능력을 가진 형제자매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여전히 서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는 여전히 형제자매로 남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하게 행하며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세례와 관련해서 당신과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유아 세례에 관해서 또 세례는 오로지 신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가? 나는 할 수 있다. 물론 세례는 세 번째가 아닌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이다. 지역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세례에 관해서 합의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이다. 당신이 가진 지적 공감 능력(intellectual sympathy)은 어느 정도인가? 손에 든 확성기를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찬찬히 그의 생각을 둘러볼 생각이 있는가? 4. 서로 동의하지 않고도 같은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인은 복음 교리와 복음적 정치 형태(gospel polity)라는 두 가지에 동의해야 한다. 건전한 신앙고백의 대부분은 사실상 다 이 두 가지 범주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건전한 교회 언약(church covenant)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필수적인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가 원칙적으로 교인을 출교하는 데에 근거가 되는 회개하지 않은 죄 또는 회개하지 않는 신학적 오류는 함축적으로나마 신앙고백과 교회 언약을 위반한 것이기에 그 잘못의 근거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범주 외에도 광범위한 신학적 입장, 정치적 신념, 실질적 선호 등 다양한 이슈가 있다. 그렇다면 서로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도 여전히 같은 교회의 지체로 있을 수 있는 주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항을 더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서로간의 하나됨을 더 촉진시키고 유지하기 쉬워질 것이다.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이 주제와 관련해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인가?”5. 내가 다른 사람보다 논쟁하기를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논쟁에서는 이겼지만 사람을 잃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건 또한 하나됨을 무너뜨린다. 달리 말해 그건 논쟁에서 이겨서 얻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것을 잃은 것이다. 다른 형제의 영혼에 상처를 주고 말싸움에서 점수를 딴 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인가? 다른 자매의 사랑이 줄어든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잠언은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타인의 상태와 필요를 맞춰주는 것인지에 대한 조언으로 가득 차 있다.“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당신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한정된 팔로워가 있는 소셜 미디어 계정도, 또 지금 대화를 나누는 파트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리는 당신과 달리 실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 논쟁을 하더라도 상대편이 마지막 말을 하게 하라. 상대가 가진 한계(threshold)가 어디쯤인지 알아내고 거기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논쟁을 멈추라. 논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당신은 진리의 씨를 뿌리고 거기에 우정의 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설혹 우정이 깨지게 된다고 해도, 그 우정을 깨는 장본인이 당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 6. 행여 교회의 하나됨보다 어떤 특정 주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때때로 침묵은 웅변이고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큰 소리이다. 셜록 홈즈는 개가 짖지 않은 이유를 알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개가 짖지 않았다면, 한밤중에 마당에 들어왔던 사람을 그 개가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홈즈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로마서 14-1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설득력 넘치는 침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장은 음식 규정과 같은 옛 언약의 의식법이 새 언약 신자들에게도 구속력이 있는지 여부를 다룬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이것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물론 바울의 입장이 있지만 여기에는 침묵이 있을 뿐이다. 한 장 반에 걸친 토론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단 한 번의 주장도 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쓴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각자 다른 양심을 가진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의 목표는 논쟁적 설득이 아니라 목회적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애완동물 문제 보다 교회의 하나됨을 더 중요시하라. 바울처럼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불일치를 통해 오히려 더 사랑하도록 도우라. 당신과 동의하지 않고 또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당신 마음속에 애정의 공간을 만들라. 7. 이 대화를 하기에 지금 여기가 적합한 시간과 장소인가? 딱 하나 실질적인 적용을 해보도록 하자, 바로 소셜 미디어 이야기다.“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이것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 성경적 커뮤니케이션 원칙이다. 바른 이유를 가지고 바른 시간에 바른 방법으로 바른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29절을 소셜 미디어에서 지키기는 너무도 힘들다. 소셜 미디어는 사실상 중립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대화가 너무도 쉽게 갈등으로 바뀐다. 왜 이 말씀을 소셜 미디어에서는 지키기가 어려울까? 다음 네 가지 요소 때문이다.(a) 소셜 미디어에는 비대면이 주는 “온라인 무례 부작용(online disinhibition effect)”이 있다.온라인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나눌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말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모든 종류의 상식적인 조심과 절제(reserve), 감수성과 동정심은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의 얼굴 대신 스크린 속 대화 상자를 쳐다보고 있다 보면 어느 새 우리 머리에서 사라져버린다. (b) 소셜 미디어에는 “친밀함의 수위 조절(gradients of intimacy)”이 힘들다.소셜 미디어에서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또 누가 듣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즉, 누가 듣고 응답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는 “상황에 맞게(소용되는 대로)” 말하라고 촉구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선 그런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게시물은 군중 속으로 발사하는 불꽃놀이와 같다. 누구에게도 일부러 불을 붙이고 싶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당신의 글 때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거실에서 친구와 일대일로 있을 때와 백 명이 모여 있는 거실에서 말할 때가 같은 방식일 수 없다. 소셜 미디어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실로 생각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때그때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폭도들이 모인 거실과 같은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c) 소셜 미디어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가득하다. 당신과 내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당신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으로부터 실시간 피드백을 받을 것이다. 설혹 당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든지 눈치 챌 수 있다.그러나 소셜 미디어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누가 보고 있는지 또 누가 반대하고 또 누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한 마디로 귀한 도자기를 깨부수고 있는데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자본금을 날리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뢰를 잃어버린 우정은 급격히 고도를 잃고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거의 항상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d) 소셜 미디어는 교육 받지 않은 선생, 책임 지지 않는 선생을 만들어낸다. 소셜 미디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손에 확성기가 들려있다. 보다 전통적인 미디어(예: 설교, 강의실 강의, 서적, 잡지 또는 신문)에서 무슨 말을 하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장로와 교인은 목사를 검증한다. 교장 또는 학장은 교사를 인터뷰한다. 편집자와 사실 확인 담당자는 기사가 인쇄되기 전에 그 기사의 진위를 검토하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손짓하는 무료 초대에 대답만 하면 된다. “바비,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그렇기에 소셜 미디어는 야고보 사도가 가장 엄중하게 던진 다음 두 가지 경고를 싸그리 무시하도록 만든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1–2).따라서 게시물을 올리기 전에 물어야 한다.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 지금이 바른 시간이고 또 여기가 바른 장소인가? 8. 서로가 더 하나되는 방향으로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군가 반대할 때 당신은 오히려 기뻐하는가?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 중에서 최소한 한 명 이상은 반대할 때에도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건 당신에게 반대하는 그들이 적이 아니라 부드럽고 자비롭고 또 친절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불일치는 당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깊이를 표현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반대하기 쉬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학생 중 한 명이었던 조지 왓슨(George Watson)은 루이스가 죽고 몇 십 년이 흐른 후에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최고의 선생님이자 최고의 동료인 그는 자신의 신념을 내가 공유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 그의 태도는 공손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무자비하다고도 묘사될 수 있습니다. … 당시 그가 가진 두 가지 열정은 문학 자체와는 별개로 사람과 논쟁이었지만, 그는 그 둘을 혼동하는 실수를 자주 범하진 않았습니다. … 그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독이 전혀 없는 활력을 가졌고, 그는 또 관대했습니다. …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입니다. 반대하는 방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the art of disagreement)이라고.”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경지를 허락하시길 간구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Master the Art of Disagreement—in the Church and on Social Media번역: 무제
생활
관계
로마서14장
C.S.루이스
소셜미디어
교회언약
복음적정치형태
비대면
지적공감능력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by 김형익
2020-10-30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너무 섬뜩하게 들리는가? 이 말은 목회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은 아니지만, 목회의 중요한 본질을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동료 목회자들처럼, 나도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죽음들을 보아왔다. 연로하고 기력이 다하여 돌아가시는 죽음은 물론, 사고로 인한 죽음 그리고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심지어 살인사건의 죽음까지 말이다. 죽음은 우리 일생에서 자신의 것으로는 단 한 번 직접 겪는 일이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죽음 이전에, 부모의 죽음은 물론, 배우자나 자녀의 죽음 그 외에도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학의 발달로 과거 100년이나 20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죽음으로 인한 사별을 경험하는 일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드문 일은 아니다. 그리고 목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모든 죽음 앞에서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장례예식을 집례해야 한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도록 준비시키는 목회내가 목회를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례예식을 은혜롭게 치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장례예식에서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가족을 적절히 위로하고 모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젠가 우리도 다 눕게 될 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살아생전에 신실한 믿음으로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일이 목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목회는 영원을 목표로 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잘 사십시오. 여러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라도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오늘을 잘 사십시오.” 그리고 약간의 엄포를 놓을 때도 있다. “제가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여러분, 이 분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산다면 그 죽음은 비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잘 사십시오.”라고 말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들의 뒤에서 전쟁 포로들로 하여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치게 했던 로마의 장군들은 얼마나 지혜로운 자들었던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일지라도 언젠가 너의 죽음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히 행하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지혜로웠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어리석은 시대다. 팀 켈러가 그의 책 ‘죽음에 관하여’에서 말했듯이, 의학의 발달 위에서 비종교화, 세속화된 현대 사회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삶의 쾌락 뒤로 숨겨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틸리케의 말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교우들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게 하는 목회는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주제를 매주일 마다 상기시켜 주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강단에 설 때마다 교우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오늘을 교우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말씀으로 깨우치려는 수고를 감당한다. 그리고 성경이 신자들에게 약속하는 영원의 소망을 상기시켜 주려고 한다. 이 세상에 목을 매고 살아가려고 하던 마음이 번쩍 깨어나고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목회의 이런 초점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더 진지하게 대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는 정말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별을 믿음으로 직면할 수 있게 하는 목회목회가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할 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통한 이별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다양한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먼저 대면하면서 살아간다. 몇 번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결코 익숙해질 수도 없고, 감당하기 쉬운 일도 아니다. 목회는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라는 아픈 현실을 신앙으로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요즘 교우들과 함께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사랑플러스 간)를 읽으면서 ZOOM으로 독서 나눔을 하고 있다. 유전적 병을 안고 태어난 두 아이를 각각 6개월 만에 잃은 데이비드와 낸시 거쓰리 부부가 쓴 책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또 어떻게 믿음으로 이 상황을 직면해야 하는지를 잘 정리해준 책이다. 사별은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은 인생에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의 경험이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Thomas Holmes and M. Masusu)는 생활의 다양한 경험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측정할 수 있는 표를 만들었는데(1974, 오래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룬 인생의 스트레스의 문제는 여전하다), 여기서 그들은 스트레스 지수를 0점에서 시작해서 최고를 100점으로 정하였는데, 최고의 스트레스를 받는 1-3 순위는 이렇다: ①배우자와의 사별 100점, ②이혼 73점, ③가족과의 사별 63점. 홈즈와 마수스는 스트레스는 축적되는데 한 해 동안의 스트레스 지수를 합산하여 150점이 안 되는 사람들의 1/3 정도가 향후 2년 내에 큰 병에 걸릴 수 있고, 150-300점인 사람들은 4/5가 향후 2년 내에 심각한 병에 걸린다고 말한다. 가정은 물론, 좀 더 큰 가정인 교회에서는 먼저 가는 성도들을 보내는 사별의 사건들이 쉼 없이 일어난다. 목회는 이런 상실의 경험을 교우들이 믿음으로 직면하고 잘 감당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이라는 죽음을 준비시킨다는 점에서,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죽음아무리 신자가 죽음의 순간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해도, 죽음이 본질상 선한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들어왔고, 죽음은 죄의 삯이다(롬 6:23). 그럼에도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히브리서 2:14–15)”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를 역전시켰다. 여전히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슬프고 비통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고 그들의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이 말은 진리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말이다. 우리가 이 진리로 자신을 무장시키고 살아왔을지라도,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엄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결코 달가워할 수 없는 일이다.나는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죽음의 강에 이르게 된 ‘크리스천’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모습을 그려준 것이 감사하다. 성도들 중에는 ‘소망’처럼 죽음의 강을 의연하게 건너는 이들도 있고, ‘크리스천’처럼 죽음의 강 앞에서 두려움이 차오르기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성도는 영광스럽게 그 천성문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의 고백은 목회가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를 하지 못할 사람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듯이 말입니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의 본질이, 이 땅의 교회들에서 회복되기를 고대한다.이 글과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죽음을 더 많이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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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위한 뉴노멀
by Irwyn Ince
2020-10-29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에게 인간성(Humanity)은 아름다운 공동체로 시작했던 그 시점부터 각인된 것이다. 즉,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있어서는 하나됨을 추구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간성을 주신 이유이다. 비록 인간은 죄를 지어 부서지고 분열되었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이 주시는 회복의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서 지금 바로 여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추구하도록 부름받았다. 공동체 속에 있다는 것은 소속감, 환영과 포옹, 집에 있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 있고 싶다는 느낌과 정반대의 느낌이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성령님에게 달려 있으며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타인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친절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필요패트릭(가명)은 콩고 공화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다.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중서부 한 교회를 다닌다. 몇 년 전 그를 인터뷰했을 때, 교회 안에서 문화적인 차이를 느낀 경험이 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어느 날 교회에서 정말 좋은 백인 친구가 ‘옷 하나 줄게’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난 ‘그거 좋지’라고 대답했지요. 그는 낡은 티셔츠가 잔뜩 든 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나는 그 친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뭔가 주고 싶을 때는 다 쓰고 버릴 것을 주지 말고, 너한테도 소중한 것을 줘야해.’ 그 백인 친구는 낡은 티셔츠를 내게 줌으로 내 가치를 평가 절하했습니다. 그 친구 눈에는 아마도 내가 10달러짜리 셔츠도 살 형편이 못 되는 것으로 보였나봐요.” 패트릭의 친구는 패트릭에 대해서 아프리카 이민자라는 생각과 함께 어떤 암묵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패트릭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패트릭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신 분명한 증거는 그가 백인 친구에게 화를 내거나 왜 나를 모욕하느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교회는 환대를 베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환영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교회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교회라면 예외없이 사람들을 환영하고 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교회를 향한 이러한 요구는 매우 일반적이며 지역 사회를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한 책임은 교회 안에서도 어떤 특정 그룹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런 환대는 안내판일 수도 있다. 교회 집사일 수도 있다. 또는 교회가 특정 환영 팀이나 환영 위원회를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음속에 주신, 친밀한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와 연결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어디엔가 속하고 싶고 그럼으로 집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교회가 환영하는 장소가 된다는 점에 높은 가치를 두지만, 그럼에도 같은 사람을 더 선호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교회조차도 우리와 다른 인종, 민족, 사회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적으로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1956년 11월 4일 설교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교회에서 일어나 ‘그리스도 안에는 동쪽이나 서쪽이 없다’라는 찬양을 부를 때 당신은 가장 비극적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기독교 국가 미국이 가장 분리되고 찢어져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설교가 있고 무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메시지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이웃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환대하는 공동체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함께 있지 않을 때면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람일수록 우리에게 나눠줄 더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Edge People)과의 공동체한 연구에 따르면 종교 단체 내 이직률은 다수 집단보다 소수 집단이 더 높다고 한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종교 조직 내에서 인종 통합을 위한 투쟁(Against All Odds : The Struggle for Racial Integrations in Religious Organizations)’라는 책에서 브래드 크리스터슨, 코리 에드워드, 마이클 에머슨(Brad Christerson, Korie Edwards, Michael Emerson)은 그들이 연구한 각 종교 단체의 “가장자리” 구성원과 “핵심” 구성원을 구분했다. 가장자리 구성원은 조직 내에서 비주류에 해당하는 구성원이고, 핵심 구성원은 가장 큰 그룹에 속하는 동시에 가장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의 정체성과 사명을 바탕으로 조직 내 가장 중요한 연결점을 공유하는 그룹이다. 가장자리 구성원은 계속해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핵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다른 게 아닌 조직 내 친절함과 환대였다. 가장자리 구성원들이 핵심적 소속감을 경험하며 핵심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전에 나는 전국을 다니면서 다양한 교회에서 설교하고 연설하는 특권을 가졌다. 내가 다닌 교회 대부분은, 비록 통계적으로 다양한 인종이 사는 지역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인은 여전히 백인이었다. 그런 교회에서 강의 또는 설교를 마친 후 그 교회를 다니는 유색 인종 교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같이 그들은 다수가 백인인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해당 교회로의 부름을 확신하고 또 다양성 속에서 추구하는 하나됨이라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군분투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가 무엇인가요?”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질 때면 그들은 교회에서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회라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환영한다고 믿고 있지만, 소수 민족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기 위해 지불하는 고통스런 대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환대 속에는 핵심 또는 주류 문화에 속하는 회중이 치러야 하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다.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는 대가를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무료지만 그렇다고 구원이 값싼 것은 아니다. 환대의 아름다움을 기르는 것은 제자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다양한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아의 죽음이 있어야한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하는 좁은 길이다. 서로를 위해서 살기COVID-19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는 이제 잠시 멈추고, 재조정하고, 뉴노멀(new normal)로 회복되는 길을 상상하는 상황을 맞았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다시 모일 때를 위해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떨까? 너무 좋아하다 보니 이제는 아예 파괴해야 할 우상이 되어버린 것은 혹시 없었는가? 다양한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려 할 때, 우리가 지금도 손에 꼭 쥐고 놓지 못하는 좋아하는 것 중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기독교 공동체에서 누리는 자유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버리는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더불어 쾌락을 향한 무질서한 욕망을 죽이는 자유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유는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진 마음의 소망은 여러분을 북돋으며, 신앙을 키우고,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명이다. 서로를 세우고, 서로를 북돋우며, 서로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Call—and Cost—of Beautiful Church Communit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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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름과 편리 대신 평안과 기쁨을!
by 정요석
2020-10-28
10월 27일 현재 한국의 코로나19 감염 사망자가 460명이다. 미국이 23만 명에 가까우니 한국이 코로나19를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의 확진자는 26,043명인데 비하여 미국은 857만 명에 이른다. 올해 2월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란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 등 4개의 상을 탔다. 봉준호의 아카데미 수상과 견줄 만하다는 ‘빌보드 200’ 1위를 BTS는 쉽게 기록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은 12위로 스페인과 호주를 앞선다. 미국 민간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가 발표한 ‘2019년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한국은 7위로 영국·독일·이탈리아 등 G7 국가를 앞선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손홍민은 현재 득점 1위를 달리고,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 김광현, 최지만 등이 크게 활약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경제와 군사와 문화와 방역과 스포츠 등에서 세계의 상위에 해당하는 국가가 되었다. 우리는 이 면에서 큰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그런데 우리나라의 2019년 자살자 수가 13,799명으로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이다. 최근 3년 하루 평균 36.5명이 죽었다. OECD 전체 37개국 평균의 약 2배이다. 10대와 30대의 사망 원인들 중 자살이 1위이다. 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와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온 나라가 노력하여 457명 사망자라는 탁월한 결과를 거두었지만, 매일 36.5명이 자살로 죽는 어이없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요사이 택배 기사들이 과로로 인하여 죽는 기이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자살과 과로사의 원인들이 무엇인지 분석하면 우리나라가 여러 분야에서 일류를 이루었지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15~19세 청소년들의 약 54%가 자살을 생각한 이유로 ‘성적·진학 문제’를 들었다. 수능고사 후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한 수험생들의 자살이 벌어지곤 한다. 그들의 성적은 하위에 속하지 않고 상위에 속함에도 sky라는 불리는 일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2등임에도 1등이 되지 못하기에 자살한다. 노인 자살률도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1위인데 평균 3배로 높다. 인구 10만 명당 노인 자살률은 81.8명으로 미국 14.5명, 일본 17.9명이니 4-5배 이상으로 높다. 심각한 것은 최근 이십 년 사이에 자살 인구가 2배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혼자 사는 노인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 더 좋은 집과 차와 위생 환경이 지난 이십 년 사이에 크게 향상되며 편안하고 깨끗하여졌지만, 오히려 혼자 사는 노인들은 증가하고, 평안과 화목은 사라지고 있다.일부 연예인과 정치인과 운동인은 언론과 유튜브와 댓글의 지나친 비판과 악성 루머로 자살하였다. 언론과 팬의 정당한 문제 제기와 긍정적 비평은 필요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악랄한 비난은 살인에 가깝다. 얼마나 악성 댓글이 심한지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는 연예 뉴스 댓글 폐지를 이미 작년 10월과 올해 3월부터 시행하였고, 올해 8월 7일부터 스포츠 뉴스 댓글도 폐지하였다. 국민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댓글이 지니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기능에도 불구하고 일률적으로 댓글이 금지되었다.과로사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가 10월 23일자로 14명에 이르렀다. 한진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11월부터 심야배송을 전면 중단하고, 전국 사업장과 대리점에 분류 작업을 위한 지원 인력 1천명을 단계적으로 투입하겠다고 10월 26일에 발표하였다. 왜 택배 회사들은 심야배송을 통해 새벽에 택배물이 도착하게 할까? 이것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아 경제성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짧은 유학 경험과 몇 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빠르고 편한 나라인지 경험하였다. 어떤 주문과 요구이든 빠르게 반응하는 한국의 회사와 공기관에 비하면 OECD에 속한 나라들은 한국에 비하여 상당히 느린 수준이다. 심야배송과 새벽도착이 이루어지려면 택배 노동자들이 야간작업까지 해야하니 노동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과 식당들이 있으려면 누군가 그 시간에 일해야 한다. 한 사회가 24시간 누리는 편리함과 빠름이 있다면 누군가는 그 편리함과 빠름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는가?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고 먹을 방법이 없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광고 카피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 문장은 한국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잘 표현한다. 올림픽에서 2등이나 3등을 한 한국 선수가 기뻐하는 대신 슬픔에 빠져 침울하거나 우는 것을 드물지 않게 경험한다. 외국 선수들은 올림픽에 참여하는 자체로 기뻐하며 즐기고, 게다가 입상까지 하면 메달색에 상관없이 좋아하는데, 우리나라 선수는 금메달이 아닌 한 실패로 여기곤 한다.편함과 평안은 다르다. 한국의 아파트는 디자인과 건축 자재와 동선 등에서 매우 높게 향상되었다. 1인당 거주 면적도 이삼십 년 전보다 넓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건축학적으로 더 넓고 깨끗하고 편리한 집들에서 산다고 마음까지 더 넓어지지 않고, 더 평안과 행복과 기쁨이 깃드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률에 있어서 한국은 거의 세계 1위 수준이다. 하지만 소통은 어떤가? 그 빠른 인터넷 망으로 악랄한 비판과 악성 댓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초등학생들까지 자신의 방에서 스마트폰의 웹툰과 유튜브와 카톡에 빠져 가족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오히려 가족들의 소통을 해치고 있다. 과학은 편리만이 아니라 부작용도 대부분 동반하곤 한다.필자는 대학생 3년부터 중1까지 다섯 명의 자녀가 있다. 우리 부부는 자녀들이 중학생이 되면 2G 핸드폰을 사주었다. 그런데 자녀들이 핸드폰이 생기면서부터 자신의 방에 들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곤 하였다. 그 전까지는 친구들이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부모는 전화를 자녀에게 바꾸어주면서 누가 자녀의 친구인지 알 수 있었고, 통화를 들으며 내용도 대강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을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이 생기자 바로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자녀들의 친구와 고민도 알 수 없었다. 고학년이 될수록 학교 수업에 스마트폰이 사용되고 다른 친구들이 모두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면서, 우리 부부도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었다. 그러자 자녀들이 자신의 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 많아졌고, 가족과의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들 또래 문화의 영향을 더 받았다. 그만큼 성경을 접하고 묵상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가치관도 변해갔다. 우리나라는 경제와 군사와 문화와 방역이 발달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이고 기쁨이고 행복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에 대한 고찰과 대응이 없다면 우리나라의 자살률과 과로사는 계속하여 높아질 것이고, 중요한 가치와 덕목들이 사라지며 국가의 총경쟁력과 효율성도 퇴보하게 될 것이다. 특히 기독교가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사회에 좋은 문화를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한다. 과학의 발달과 상황의 변화는 삶의 형태를 다소 바꿀 뿐이지 본질적인 새 것을 주지 않는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는 잠언 1:4절의 말씀은 사람이 땅과 해와 바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이고,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10)는 말씀을 신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과학과 경제와 문화의 발전이 편리와 빠름과 세련됨을 줄지 모르지만 오래 전 세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주지 않고, 더 큰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과학과 경제와 의료에 대한 허황된 과신은 오히려 큰 부작용을 가져온다. 빠름과 편함과 효율성을 행복과 평안과 기쁨으로 여기는 것도 큰 착각이다. 우리나라가 이삼십 년 전보다 더 행복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빠른 택배 시스템이 진정 우리에게 무엇을 배달해 주는지 그리고 다소 느린 택배 시스템이 정말로 불편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기독교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일등주의와 효율성과 부자와 강함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빠르고 편하고 깔끔한 이 땅의 삶을 인하여 하늘나라를 소망하지 않게 만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자신의 편함과 높음이 아니라 이웃의 소외와 아픔과 뒤처짐을 챙기고 격려하도록 잘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종교들은 2등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만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의하여 느리게 살아가는 2등을 기억하고 격려해야 한다. 기독교는 민족주의도 국가주의도 아니고, 우로나 좌로도 치우치면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다(고후 13:8). 기독교는 사회에 효율과 편리와 빠름 대신에 진리에 대한 통찰을 선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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